사람냄새 사라진 ‘박제된 동화’···‘사랑따윈 필요없어’

사람냄새 사라진 ‘박제된 동화’···‘사랑따윈 필요없어’

9일 개봉한 한국 영화 ‘사랑 따윈 필요없어’(감독 이철하)는 2002년 일본 TBS에서 방영된 10부작 드라마 ‘사랑 따윈 필요없어, 여름’을 원작으로 한다. 그런데 한국 배우들이 한국을 배경으로 한국어 대사를 한 영화가 4년 전 제작된 일본 드라마보다 낯설어보이는 건 왜일까. 둘의 다른 점을 비교해보자.

영화는 원작의 설정을 거의 그대로 따랐다. 10부작 드라마를 119분으로 압축하다보니 삭제된 캐릭터나 세부 묘사도 있지만, 흠이 되진 않는다.

문제는 보편성과 현실성이다. 사랑을 믿지 않고 이기적이었던 두 남녀가 차츰 가까워진다는 얘기는 흔하다. 이 통속적 소재로 보는 이의 마음을 움직이는 게 관건인데, 원작 드라마는 성공했다. “사랑 따윈 필요없다”고 말하던 두 남녀가 있었고, 주위에는 그들의 마음보다 더 냉정한 세상이 있었다. 믿었던 지인들은 하나 둘씩 그들을 배신하지만, 자신의 세계에만 갇혀 있던 두 남녀가 조금씩 서로에게 끌리고 의지하는 과정이 설득력 있게 담겼다. 차가운 표정의 히로세 료코와 나른한 허무의 느낌을 보여준 와타베 아쓰로가 탄탄하게 드라마를 받쳤다. 이후 와타베 아쓰로의 연기는 한국의 젊은 남자 배우들도 은근히 연구할 만한 대상이 됐다. ‘사랑 따윈 필요없어, 여름’은 일본 드라마지만 대한해협 저편의 시청자까지 끌어당길 수 있는 보편적 감수성을 건드릴 수 있었다.

드라마 ‘사랑 따윈 필요없어, 여름’ 의 히로세 료코(왼쪽), 영화 ‘사랑 따윈 필요없어’ 의 문근영.

드라마 ‘사랑 따윈 필요없어, 여름’ 의 히로세 료코(왼쪽), 영화 ‘사랑 따윈 필요없어’ 의 문근영.

영화는 실패했다. 통속적 소재를 도식적인 스타일로 꾸며 구제할 수 없는 지경이 돼버렸다. 헤어진 남매의 사연이 간직된 스노볼, 줄리앙에게 남은 시간을 재는 고풍스러운 회중시계, 대저택의 거실에 걸린 커다란 사슴머리 등은 영화 속으론 녹아들지 않는 그저 멋진 소품일 뿐이다. 배우들은 현실에선 아무도 할 법하지 않은 문어체 대사를 읊조린다.

영화는 3억5천만원을 들여 보성 녹차밭 한가운데 지었다는 민의 대저택 같다. 그 멋진 집이 왜 녹차밭 한가운데 있어야 하는지 아무도 모르는 채, 그저 눈을 즐겁게 하기 위해 서있는 집이다. 잠시 눈을 붙들어야 하는 고급 아파트 CF나 뮤직비디오에는 어울릴 법 하지만, 영화에는 아니다. ‘사랑 따윈 필요없어’에는 많은 사람이 등장하지만, 사람 냄새는 전혀 나지 않는다. 김주혁의 분투조차도 이 박제된 동화속 세상에서는 무의미하다.

한때 ‘싸이더스FNH가 만들면 믿을 만하다’는 말도 있었지만, 이제 그런 믿음을 거둬야 할 때가 된 걸까.

〈백승찬기자 myungworry@kyunghyang.com〉

※영화 ‘사랑 따윈 필요없어’ 줄거리=최고 인기의 호스트 줄리앙(김주혁)은 1개월 안에 사채빚 28억7천만원을 갚아야 한다. 궁지에 몰린 줄리앙은 교통사고로 죽은 동료 류진 행세를 한다. 류진과 16년 전 헤어진 여동생 민(문근영)이 엄청난 재산을 상속받았기 때문이다. 줄리앙은 민의 대저택을 찾아 오빠 행세를 하지만, 병에 걸려 시력을 잃은 민은 마음을 닫은 상태다. 줄리앙은 민의 마음을 열기 위해 노력하고, 그 과정에서 두 남녀 사이엔 의도하지 않았던 묘한 감정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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