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규|시인

지난 겨울은 너무 추웠다. 봄도 더디게 왔다. 그래서 올 여름은 아무리 더워도 불평하지 않고 감사하게 생각하며 지내자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유례 없이 연일 쏟아지는 장맛비와 물난리 소식 등으로 내 마음도 덩달아 흠뻑 젖어 허우적거리기 일쑤였다. 그러다가 무더위를 진득하게 즐겨보기도 전에 가을이 왔다. 가을만큼 아쉬운 계절이 또 있을까. 어느덧 입동도 지나고 소설이 코앞이니 계절은 다시 차가운 동토의 겨울로 치닫고 있다.

우리 집 안방의 창밖에 서 있는 나무들도 늦가을 찬바람에 마지막 잎사귀들을 털어내고 있다. 어떤 나무들은 일찌감치 마른 잎 몇 개만 가지 끝에 매달고 허탈한 모습으로 서 있다. 빛바랜 단풍잎 하나가 바람에 실려 나의 창가를 잠시 스치고 사라진다.

[낮은 목소리로]늦가을 애상

몸무게가 40㎏ 안팎인 피골이 상접한 한 중증환자가 창가에 놓인 침대에 누워 자신의 앙상한 팔다리와 창밖 나무의 앙상한 가지들을 번갈아가며 바라보고 있다. 한여름만 빼고 내내 시린 두 발은 일찌감치 두툼한 양말 속에 숨어서 잔뜩 웅크리고 있다.

중증환자에게 겨울은 고난이 가중되는 시기다. 가뜩이나 외출하기 힘든 처지인 나 같은 환자에게 겨울의 혹한은 아예 문밖에 나서는 것을 꿈조차 꾸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겨울은 환자가 가장 많이 사망하는 계절이기도 하다.

가벼운 감기 증세조차 중증환자에겐 곧장 폐렴으로 이어질 수 있는 위험한 요소다. 창틈을 비집고 방안으로 스며드는 실바람도 병약한 몸에는 산꼬대로 느껴진다. 올 겨울은 혹독한 추위가 되도록 적게 찾아오기를 바라본다. 혹여 맹추위가 기승을 부리더라도 삼한사온의 미덕만은 지켜줬으면 좋겠다.

내가 루게릭병에 걸렸다는 진단을 처음 받았을 때 나는 당시 의학계의 정설대로 꼼짝없이 2~3년 내에 죽는 줄 알았다. 그러나 이렇게 언어장애와 전신마비 상태로 10년 넘게 멀뚱멀뚱 살아있으니 이게 복인지 욕인지 모르겠다. 어쨌든 엄동설한에 이 세상 ‘소풍’을 끝내고 싶지는 않다. 그날이 ‘시월의 어느 멋진 날’이나 ‘산에 들에 진달래 피는’ 따뜻한 봄날이면 좀 좋을까.

지난달 단풍이 절정일 즈음 또 그동안 알고 지내던 루게릭병 환우 한 명이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평소 관련 인터넷 사이트에 투병기 등 여러 글을 종종 올리곤 했다. 많은 사람이 그녀의 글을 읽으며 동병상련과 더불어 희망을 나누던 터라 안타까움은 더 컸다.다음은 그녀가 마지막으로 올린 글 가운데 일부다. “나 때문에 고생하는 가족들이 딱하고 미안해서 빨리 죽고 싶다고 기도해 보지만 아픈 것도 운명이듯 가는 날도 운명에 맡겨야 할 것 같다. 나의 친정어머니는 자식들을 유별나게 위하셨다. 당신 자식들이 고생할까봐 아프지도 않고 춥지도 덥지도 않을 때 죽어야 한다고 노래를 부르시더니 그 소원 이루시려고 늦가을 하루 만에 돌아가셨다. 낳은 자식도 다 짝지어 놓고 사는 것 보셨으니 어머니는 복 중에 좋은 복을 가지셨다.”

결국 그녀도 친정어머니를 따라 가을 속으로 영원한 여행을 떠났다. 그녀의 마지막 글을 조금 더 옮겨본다.

“우리 아들, 하얀 이를 보이며 환하게 웃던 얼굴 어디로 갔나. 아픈 엄마 때문에 학교도 휴학하고 군대도 연기하고, 아들의 소중한 시간은 자꾸만 흘러간다. 남편과 아들이 교대로 밤에 뒤척이지 못하는 내 몸을 체위변경해준다. 아들은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며 여기저기 몸을 주무르고 자세를 고쳐준다. 누군들 단잠을 자고 싶지 않겠는가. 우리 모자는 함께 쇼핑하는 것을 즐거워했다. 시식코너에 가면 아들은 쑥스러워해 엄마가 먹여주곤 했는데 엄마가 아파 손을 못 쓰게 되니까 아들은 쑥스러움을 감추고 음식을 엄마 입에 넣어주며 웃곤 했다. 그 모습이 그립고 아른거린다.”

나는 한때 죽음에 대해 깊게 묵상해 본 적이 있다. 그렇다고 어떤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했다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당당히 맞서 싸울 줄도 알아야 하고, 겸허하게 받아들일 줄도 아는 용기와 지혜가 필요하다. 나만이 아닌 모두에게 닥치는 운명 앞에 유독 두려울 것도 없다.

그러나 이쯤해서 늦가을 깊은 상념에서 깨어나고자 한다. 나처럼 투병 중이거나 여러 가지 어려움에 처해 있는 사람일수록 기운 빠지는 사색은 아예 안 하거나 짧을수록 좋다.

창밖의 나무들이 갑자기 허리를 격하게 구부리더니 아까운 단풍잎들을 땅바닥에 무더기로 쏟아낸다. 겨울을 재촉하는 찬바람이 한바탕 거세게 휘몰아쳤다. 그러나 ‘마지막 잎새’마저 힘없이 떨어진다 할지라도 나는 결코 낙담만 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새벽이 오면 어둠이 순식간에 물러가듯 내 삶의 뜨락에 희망의 불씨가 남아있는 한 반드시 내게도 좋은 날이 오리라고 굳게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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