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의식은 찾지 말라, 연극은 감각으로 즐겨라”

문학수 선임기자

‘THE BEE’ 공연 위해 한국 온 TMT 예술감독 노다 히데키

“연극은 일종의 환상이다. 머리가 아니라 감각으로 즐겨라. 주제의식을 찾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일본 도쿄도립예술극장(TMT)의 예술감독 노다 히데키(58)가 방한했다. 2005년 서울국제공연예술제에서 그의 작품 <빨간 도깨비>가 공연된 이후 8년 만의 공식 방문이다. 이번에는 2006년 영국 런던에서 초연했던 <THE BEE>를 한국에서 처음 선보인다. 초연 이후 도쿄, 뉴욕, 홍콩 등지에서 공연되며 극찬을 받았고, 일본에서는 아사히 연극상과 마이니치 예술상, 요미우리 연극상 등을 석권했던 화제작이다. 니나가와 유키오, 구리야마 다미야 등과 더불어 작금의 일본 연극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극작가 겸 연출가로 손꼽히는 그를 5일 낮 명동예술극장에서 만났다.

연극 <THE BEE>의 한국 초연을 이틀 앞둔 5일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극작가 겸 연출가 노다 히데키가 환하게 웃고 있다. | 김정근 기자 jeongk@kyunghyang.com

연극 <THE BEE>의 한국 초연을 이틀 앞둔 5일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극작가 겸 연출가 노다 히데키가 환하게 웃고 있다. | 김정근 기자 jeongk@kyunghyang.com

▲ 9·11 테러 목격이 계기‘폭력의 연쇄’ 그린 작품
인간의 심리나 태도를 배우의 움직임으로 표현
연극은 현실 아닌 환상

- <THE BEE>는 폭력에 대한 연극이라고 하던데, 창작계기는?

“9·11 테러와 이라크 전쟁을 목격한 것이 계기일 수 있겠다. 2003년 런던에서 영국 배우들과 워크숍을 하게 됐는데, 쓰쓰이 야스타카의 소설 <이판사판 인질극>이 떠올랐다. 희생자와 가해자가 뒤얽히는 두 개의 인질극을 소재로 삼은 단편이다. 그것이 이 연극의 원작인 셈인데, 배우들과 토론을 거치다 보니 원작과 많이 달라졌다. 내가 연극에서 그려내고 싶었던 것은 ‘폭력의 연쇄’ 같은 것이었다.”

- 며칠 전에 당신보다 후배 세대인 일본의 극작가 겸 연출가 히라타 오리자(51)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가 이런 말을 하더라. 자기보다 예닐곱 살 위 세대들이 연극으로 보여줬던 것은 ‘축제’와 ‘웃음’인 것에 비해, 자신의 연극적 키워드는 ‘말(언어)’과 ‘도시’라고 했다. 히라타의 평가에 동의하는가?

“음… 히라타가 말한 ‘위 세대’에 나도 포함될 것이다. 하지만 축제와 웃음은 1980년대 중반까지만 유효했다. 1980년대 후반부터는 그런 연극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당시 일본은 버블경제의 정점을 찍었고 관객들은 다들 들떠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연극까지 축제와 웃음으로 갈 수는 없었다. 나는 당시 관객들에게 심한 위화감을 느꼈고 내 연극적 작업은 의미를 잃고 말았다. 결국 그때까지 이끌어왔던 극단을 해산하고 영국 런던으로 갔다. 연극은 무엇인가를 위해 ‘기능’하는 것이 아니다. 나와 함께 온 배우들을 보지 않았는가. 그들은 어린아이 같아서 때때로 유치해 보일 정도다. 그게 배우다. 그냥 연극을 하는 것이다. 히라타처럼 ‘깨끗하게 정리된 언어’로 설명할 수 있는 연극은 나하고 무관하다.”

- 9·11테러와 이라크 전쟁에 대해 언급했는데, 그것은 지금 당신이 말한 연극적 태도와 배치되는 듯하다.

“내 연극은 테러나 전쟁과 직접적인 상관이 없다. 그냥, 폭력에 대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태도와 심리 같은 것을 배우들의 움직임으로 보여주려는 것이다. <THE BEE>는 9·11을 상징하는 연극이 아니다. 연극은 현실이 아니라 환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공연시간 80분이 지나면 사라지는 환상 말이다. 하지만 (연극작가는) 그 환상이 현실과 동떨어진 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그래야 환상은 현실보다 길게 남을 수 있다.”

연극 <THE BEE>는 테러와 복수의 사슬 속에서, 병 속에 갇힌 벌처럼 날뛰는 인간을 풍자한다. 때로는 심리 스릴러처럼 보이기도 한다. 평범한 회사원 ‘이도’는 어느날 퇴근길에 아내와 아이가 탈옥수의 인질로 잡혀 있는 상황에 봉착한다. 경찰과 기자들이 몰려들어 집 주변은 북새통을 이루지만 사건을 해결할 실마리는 도무지 찾아지지 않는다. 결국 이도는 탈옥수의 가족을 인질로 잡는 ‘맞불작전’으로 대응하면서 스스로 가해자로 변신한다. 말하자면 무대 위에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기괴한 역할 놀이가 펼쳐진다. 2006년 초연 당시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는 이렇게 평했다. “인간의 무자비함을 주제로 희생자와 공격자의 역할놀이를 탐구하는 희곡. 예의바른 사회의 이면에 숨어 흐르는 거짓말의 물결. 일본 문화에 웃음과 고통, 아름다움과 잔인함이 어떻게 공존하는지를 기분 나쁠 정도로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연극.”

- 당신이 도쿄대 법대 시절부터 극단을 만들어 연극판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극작, 연출, 배우를 다 겸하면서 많은 주목을 받았다. 어찌 보면 당신의 연극관은 니체적으로, 혹은 탈근대적으로 들린다. 대학 시절부터 ‘노는 연극’을 좋아했는가?

“(크게 웃으며) 내가 극단을 처음 만들었던 1976년에는 전 세계가 젊은이들의 열기로 들썩였다. 젊은이들이 스스로 문화를 만들고 세계를 바꿀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아까 말했듯이 1980년대 후반에 접었다. 극단을 해산하면서다. 사실 나는 그때부터 일본에서 바보 취급을 받았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쟤는 아무 생각이 없는 인간이야’라는 손가락질을 받았다는 뜻이다. 런던에 가서도 마찬가지였다. 영국은 얼마나 ‘생각’이 많은 나라인가? 하지만 난 달리 생각한다. 연극은 주제를 강조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예술이 아니다. 그것은 연극이 아닌 다른 것으로도 가능하다. 나는 오로지 연극에 관심 있을 뿐이다. 그래서 배우들의 신체로 표현하는 것에 집중한다. 연극은 신체를 통해 말해야 한다. 한데 요즘 젊은 연극인들이 연극에 대해 가진 생각은 허약하다. 심지어 로봇을 무대에 등장시킨다!”

- 마지막 질문이다. 한국에 오기 직전에 당신은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공연했다. 한국 공연 직후에는 루마니아로 날아간다. <THE BEE>에 대해 각각의 관객 반응이 다를 듯하다.

“예루살렘 공연 때 걱정을 많이 했다. 관객이 공연 중에 나가버리지 않을까 해서. 다행히 거의 나가지 않았다. 2005년 <빨간 도깨비> 공연 때 한국 관객을 처음 만났는데 뜨겁고 진지했다. 벌써 8년이다. 세월이 참 빠르다. 이번에는 크게 걱정되지 않는다. 내년쯤 한국 배우들과 또 한번 작업을 하고 싶다. 지금 추진 중이다.”

연극 <THE BEE>는 7~8일 명동예술극장에서 막을 올린다. 캐서린 헌터, 글린 프리차드, 마르첼로 매그니 등 영국 연극계에서 일급배우로 손꼽히는 배우들이 출연한다. 작가 겸 연출가 노다 히데키도 배우로 무대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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