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로 ‘갑’들이 달라지진 않겠지만

유인경 선임기자

SBS 월화극 <풍문으로 들었소>가 처음 시작되었을 때,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가뜩이나 ‘갑질 횡포’ 기사가 가득한데 드라마에까지 갑들이 을들을 가슴 아프게 하고 굴욕을 안겨 을이 흘리는 눈물을 보기 싫다는 노파심 탓입니다.

길을 잃을 만큼 큰 남주인공 이준의 집에는 집사·비서·유모·가정부와 가정교사 등 고용인들이 가족보다 더 많습니다. 아버지 유준상은 로펌 대표인데 총리를 비롯한 각료들의 인사를 밀실에서 행하고 어머니 유호정과 그 친구들은 고급 화장품과 성형수술로 방부제 미모를 자랑해 기를 죽입니다. 그와 대조적으로 너무 남루한 집에 살고 총체적 난국인 상황에 여주인공 고아성의 알량한 자존심이 더 슬펐습니다.

[TV 전상서]드라마로 ‘갑’들이 달라지진 않겠지만

그런데 정작 이 드라마는 주인공이 이준·고아성이 아니라 유준상임이 드러나고, 그의 언행이 고상하고 진지할수록 더더욱 코믹스러워져 자꾸 헛웃음이 납니다. 어떤 이들은 ‘유준상의 성장일기’라고도 합니다. 선대의 최고지향 덕분에 유럽 귀족처럼 자란 유준상은 아들과 함께 아침마다 <군주론>의 영역본을 읽고 능력과 의전의 달인으로 알려졌습니다. 아내가 갑자기 흥분해서 격한 말을 하면 “워딩에 조심해요”라고 은근히 주의를 줄 만큼 매너도 뛰어납니다.

대한민국 0.1% 상류층을 대표하는 그가 정작 가난한 사돈 앞에서는 광폭해지고, 신분차이 난다며 결혼을 반대하던 며느리가 낳은 손자를 보기 위해 도둑처럼 잠입해 헤벌쭉한 웃음을 짓고, 탈모에 세상이 무너질 듯 낙담하며 셀카도 찍습니다. 심지어 치질까지 있답니다.

사실 우리가 흔히 상류층, 권력층이라고 하는 이들의 실상은 이보다 더 블랙코미디가 아니던가요. 엄숙한 국회에서 야한 사진을 보거나 내연녀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의원들, 성추행을 일삼는 권력층, 부정과 비리를 일삼는 갑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사실 이들에게는 ‘상류층’이란 단어도 적절하지 않습니다. 부유층이나 특권층이라면 모를까요. 부의 세습에 이어 계급 세습까지 꿈꾸는 이들의 속물근성과 허위의식이 이 드라마에서 묘사된다고 세상이 달라지진 않겠지요. 다만 ‘을’들이 그런 속물인 ‘갑’들에게 비굴해질 이유는 없다는 것만이라도 다짐하는 순간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럭셔리한 슈트에 감춰진 유준상의 치질이 빨리 쾌유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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