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계한 독립운동가 ‘청뢰’ 이강훈옹

1903년 6월13일 강원도 김화에서 태어난 청뢰 이강훈옹은 16세의 어린 나이로 3·1독립운동 만세시위에 참가하는 등 일찍이 항일투쟁의 길을 걸었다. 1920년 이옹은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일을 도왔으며 북간도에서 사범학교를 졸업했다.

24년 김좌진 장군의 신민부에 가담해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나들며 국내의 독립운동 자금을 거둬들이는 한편 백두산 근방의 신창학교 교사로 근무하며 젊은이들에게 조국 광복을 위한 민족정신을 고취시키도 했다.

제1차 상하이사변이 일어나자 중국 동지와 함께 비밀단체 ‘흑색공포단’을 결성, 일본기관 파괴와 침락원흉의 처단활동에 나섰다.

30년 김좌진 장군이 암살당하자 이옹은 북만주를 떠나 상하이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만주에서 함께 지내던 동지들이 경성한 ‘남화한인청년연맹’에 참가하여 생명을 내던지는 거사에 나섰다. ‘육삼정 사건’이라고도 불리는 주중 일본공사 아리요시 암살사건이 그것이다. 이옹은 33년 백정기, 원심창과 함께 아리요시를 저격하려 요정 ‘육삼정’에 접근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돼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다. 이옹은 일본 도쿄로 이송돼 옥고를 치르던 중 1945년 조국 광복으로 출소했다. 항일투쟁으로 젊은 날을 보낸 이옹은 인생의 황금기인 30대와 40대 초반을 감옥에서 보낸 것이다.

출옥 후 이옹은 일본에 거주하며 김구 선생과 연락, 이국땅에서 눈을 감지 못하고 있던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선생의 유골을 46년 5월 국내로 모셔와 효창공원에 안장하기도 했다.

이옹은 광복 이후 재일한국거류민단 부단장으로 일하다 60년 귀국해 한국사회당 총무위원으로 활동했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 이후 민주화 활동을 하던 이옹은 사상을 의심받아 3년간 옥고를 치르고 다시 일본으로 떠났다.

67년 재귀국한 이옹은 독립운동사 편찬위원과 독립운동유공자 공적심의위원으로 활동하며 10권에 달하는 ‘독립운동사’와 20권이 넘는 ‘독립운동사 사료집’을 편찬, 간행했다. 또 개인으로는 엄두도 내기 어려운 ‘독립운동사 대사전’ 상·하권을 90년도에 편찬, 간행했다.

77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받았으며, 88년부터 5년동안 제10대, 제11대 광복회 회장을 역임했다. 그외에도 백범 김구선생 시해진상규명투쟁위원회 부위원장(1961), 윤봉길의사 기념사업회장(1983), 민족화합추진위원회 위원(1988)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해외독립운동사’ ‘항일독립운동사’ ‘독립운동대사’ ‘대한민국임시정부사’ ‘마적과 왜적’ ‘민족해방운동과 나’ ‘무장독립운동사’ 등이 있다.

〈김윤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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