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무연 ‘춤추는 제비’의 고독한 날개짓

일생 동안 풀무질해온 춤길. 길고도 험했다. 행복한 외로움과 고단한 화려함 속에서 걸어온 춤길이었다. 정무연(80·본명 정항섭). 스페인춤 스승이던 가와카미 선생이 지어준 이름 ‘무연(舞燕)’, 즉 ‘춤추는 제비’라는 예명으로 춤을 지켜왔다. 그리고 이제 춤 하나만 남았다.

#트로트에 맞춰 추는 정무연의 스페인춤

정무연의 인도춤 ‘남국의 정서’. 화려한 의상·춤사위·눈짓 등 3박자가 감상포인트다.

정무연의 인도춤 ‘남국의 정서’. 화려한 의상·춤사위·눈짓 등 3박자가 감상포인트다.

정무연 무용학원은 부산 진구 부암동 고가 옆 건물 2층에 있다. 학원으로 오르는 층계에서 1953년의 유행 가요가 흘러나온다. 우아한 한국무용과 어울리지 않게 금사향이 부른 ‘홍콩아가씨’다. ‘무용학원에서 웬 가요?’ 기자, 문열고 고개를 살짝 학원 안으로 밀었다. 중년 부인들과 할머니들이 노래에 맞춰 캐스터네츠를 양손에 들고 스페인춤을 추고 있다. 가요에 맞춘 스페인춤? 낯설고도 재미있다.

노래가 끝났다. 춤도 끝났다. 춤 제목은 ‘즐거운 스페인 무(舞)’. 어르신들의 눈높이에 맞춰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트로트 스페인춤이 됐단다. 정무연은 거울 맞은편 의자에 앉아 할머니 단원들에게 다음 작품을 주문하고 기자를 맞는다.

전화 속 그는 무뚝뚝한 소리로 ‘(부산에)오지 말라’고 몇번이고 사양했다. 기자에게 해 줄 이야기가 없단다. 옛 이야기는 모두 잊었다고 했다. 부산에서 만난 그는 역시 아무 말도 해 줄 게 없단다. 기자, 힘이 빠지기는커녕 ‘춤추는 제비’의 기억을 되살리고 싶은 욕심이 샘솟았다.

85년 문을 연 40여평 학원은 한 면이 거울, 다른 한 면은 공연 소도구 보관소, 또 다른 한 면은 미니 분수와 오디오·전자오르간 등이 차지하고 있다. 각 벽 위에는 ‘문화재급’ 포스터가 걸려 있다. 정무연을 비롯해 강선영, 임성남, 한순옥, 최희선, 최현, 조용자, 김진걸 등 당대의 무용 스타들이 공연한 ‘해방 10주년 기념 무용발표회’ 포스터를 비롯, 정무연의 화려한 시절을 말해주는 50년대 무용 포스터가 빛바랜 위엄을 발한다.

“과거, 추억, 꿈…. 그런 말은 잊은 지 오래. 화롯가에 앉아 오순도순 가족들과 정담을 나누던 기억, 모두 지웠어요.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정무연은 말끝마다 항상 “어휴~ 다 지난 일이 무슨 소용이에요” 했다. 과거를 잊고 싶다는 말? 절대 아닐 것이다. 과거로 돌아갈 수 없는 안타까움의 발로일 뿐.

“10년 후 춤을 그만둘 겁니다. 정무연 무용단의 할머니 단원 중에 늙어서 기력이 안되는 단원은 방출하고 야들야들한 단원으로 보충하며 10년을 버틸 겁니다. 부산! 서울에선 상상도 못하는 도시죠. 부산에서 1년만 살아보면 압니다. 부산 사람들은 극성스럽고 정열적이죠. 서울 사람들은 그 정열의 반도 못 따라갑니다. 그러니까 제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활동할 수 있고요.”

얼마 전부터 무용학원이 대학입시 위주로 운영되자 학생이 아닌 일반 수강생을 가르치던 학원들은 고전을 면치 못한다. 정무연 무용학원을 비롯, 부산시내 500여개의 무용학원 대부분 같은 실정. “학원 운영으로 돈벌 생각은 없어요. 학원마다 어머니반이 많은데, 우리 학원에서도 12명의 수강생들이 무용단을 조직해 활동하고 있어요. 각종 복지시설을 찾아가 무용, 노래, 음악 등을 공연합니다. 연습도 매일 해요. 20년 됐으니, 50세에 시작한 단원이 지금 70세 최고령이 됐지요. 하하하….”

#서울에서 유명한 의사집안의 돌연변이

정항섭은 1927년 용인에서 태어나 두살 때 서울 인사동으로 이주했다. 아버지 정성근씨와 어머니 배석태씨의 아들. 7남매인지 8남매인지 확실치 않지만 끝에서 둘째였다. 남동생은 체신부 우정국장을 지냈고, 두 명의 누나가 있었다. 지금은 정무연만 남고 모두 작고했다. 부친은 정항섭이 7세에 금강산 구경을 다녀온 후 담 걸린 후유증으로 작고했다. 모친은 정항섭이 일본유학 중 세상을 떴다.

[춤과 그들]정무연 ‘춤추는 제비’의 고독한 날개짓

부친은 인사동에서 한의원을 경영했고 큰형 정귀섭은 인사동 골목에서 이비인후과를 열었다. 당시 서울에서 윤치호, 이승만, 윤보선 등이 모두 정귀섭 안과·이비인후과 단골이었다. 둘째형 정흥섭은 소아과 의사. 셋째형 운정 정완섭은 한국화가, 넷째형은 서양화가였다. 서울에서 정항섭의 집을 모르면 간첩일 정도. 무용가 강선영이 정귀섭과 친구였다. 큰누나는 일본 도쿄 양재학원과 오사카 양재학원을 졸업했다. 남자 형제들은 배재학당, 누나들은 이화학당 출신이었다.

“무용하느라 이렇게 죽어지내니까 저를 알지 못하지만, 옛날 같으면 저 만나기 힘들었을 겁니다.” 그러면서 얼른 “앞으로 10년만 살다 죽을 테니 옛일을 알려주기 싫다”고 덧붙였다. 다시 기자와 춤추는 제비는 ‘과거찾기 게임’ 한판 승부에 들어갔다.

“어휴! 말도 마세요. 어머니는 무당집에서 춤추는 저를 보고 땅을 치며 우셨고, 저는 형님께 온몸을 두들겨 맞고….” 그런데 왜 춤을 추었을까.

“본격적으로 인사동 태화유치원과 수송초등학교 동창인 무용가 정인방의 집에 드나들면서 배웠죠. 정인방의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때 국악위문단 중국 만주 공연을 위해 동숭동 자신의 집에서 국악인들을 집합시켜 연습시켰거든요. 정인방과 단짝인 저는 초등학교 때 그 집에 놀러갔다, 결국 장구 치며 춤까지 추었습니다.”

그러다 동숭동 장추화 무용학원을 다녔다. 최승희 전속악사인 박성옥이 그 학원에서 무용을 반주했다. “장추화의 실력은 기찼습니다. 최승희 무용단에서 남방춤을 가르쳤을 정도이니 그 실력이 대단했죠. 저는 장추화 무용학원에서 조교를 하며 한국무용을 가르쳤습니다.”

배재학당을 졸업했지만 집에서 춤춘다고 쫓겨난 신세. 춤추기 전에는 2년 동안 은행원으로 돈도 벌었다. 수송초등학교 2학년 3반 담임선생도 한 학기 동안 했다. 그런데 정인방이 문제였다. 그의 꼬임에 빠져 성남극장 무대에 올라 춤추었는데 소문이 나는 바람에 학교를 그만두었다.

“안국동 조흥은행 지점장인 박용삼씨가 은인이죠. 우리 형님 정귀섭의 친구였는데 멋쟁이였어요. 저보고 유학 후원을 해줄 테니 조흥은행 본점 강당에서 공연하래요. 물론 집에 돈이 있었지만 은행지점장이 돈을 만들어 주었죠.”

47년 부산 자갈치시장과 다대포에서 3일을 기다렸다 똑딱선타고 다시 5t 고기잡이 배에 옮겨 탔다. 40여명이 탄 배는 지옥이었다. 배에서 내리니 우에노 하마라는 항구. “제가 무용을 시작해 일본 유학 가서 돌아올 때까지가 영화 같아요. 당시 일본과 국교를 맺지 않아 모두 밀선을 탔죠. 우에노 하마에서 한 달, 오사카에서 6개월 머물고 도쿄 정착 후 무용을 가르쳤어요. 조택원과 10년 동안 동거한 오사와 준코가 저의 제자죠. 오사와 준코 무용학원을 주 3일 빌려 ‘정무연 무용연구회’ 이름으로 한국무용을 가르쳤어요.” 일본에서 한국에 온 이유. 누군가 잘나가는 정무연을 밀입국자로 신고하자 자진 귀국했다.

#미8군에서 한국 최고의 춤을 만들다

54년 귀국하자마자 부산에 정착, 2년 동안 어머니들에게 무용을 가르쳤다. 그리곤 서울로 직행, 원효로에 있는 화양연예주식회사 소속 무용팀장으로 안무를 담당했다. 미8군 쇼에 출연하는 연예인들에게 춤과 노래를 가르쳤다. 한명숙, 최희준, 위키 리, 모니카 유 등 유명 가수들에게 한국무용뿐 아니라 일본에서 배운 라틴음악과 라틴무용을 가르쳤다.

“그때 돈 많이 벌었어요. 남부럽지 않게 살았습니다. 아유! 지저분해서 말하기도 싫다! 결혼요? 예술에 미치서 다니느라 못했습니다. 결혼했으면 일찌감치 돈 많이 벌고 잘 살았을 텐데, 춤만 추고 싶으니! 춤보다 더 좋은 게 없어요. 제가 주역도 보며 철학공부를 해서 제 사주를 알아요. 후회는 없습니다. 행복은 자신의 마음에 보듬고 있는 것. 누가 가져다 주는 게 아니죠. 그 마음을 못 다스리면 문제가 생겨요.”

잘나가던 서울 생활. 이인범·김민자와 서울발레연구소도 공동운영했다. 김두한이 연구소 옆집에 살았다. 57년 제1회 무용발표회. 다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난리가 났다. 춤추는 제비의 춤을 보겠다고 밀려드는 관객들. 명동시립극장 사흘 공연이 완전 매진이었다. 스페인춤, 라틴춤, 전통춤 등을 추었다.

서울대감놀이도 당시의 작품이다. 요즘은 재창작해서 공연하지만 정무연은 원전 무당춤 그대로 춘다. 황해도 신장굿이면 신장굿, 대감놀이면 대감놀이 등 따로따로 구성하기도 한다. 대중이 지루하지 않도록 그때그때 연출한다.

“정인방을 만나기 전부터 무당집에 놀러가 춤을 배웠습니다. 누나 화장품 몰래 바르고 무당집에서 신나게 춤추며 대감놀이를 배웠어요. 원래 대감놀이는 하루종일 추어도 되지만 무대에선 관객을 위해 10분 이상 추지 않는 게 좋습니다. 지루할까봐 그렇죠. 서울대감놀이에 어울리는 음악은 김영임의 창부타령소리가 제일 좋아요.”

그는 스페인어, 인도네시아어도 했다. 어학에 취미가 있다. 서울에서 무용학원을 운영하며 돈을 많이 벌었다. 60~70년대에 신촌 연세대 입구에서 무용학원 할 때 학생이 60명이나 됐다. 조교가 춤 교육을 도왔는데, 조교 오빠가 사업한다며 400만원을 꿔갔다. 모래내 집이 130만원 할 때였다. 조교 오빠는 돈을 갚지 않았다. 결국 정무연이 학원과 아파트를 팔고 빚잔치를 끝낸 후 수중에 남은 돈은 단돈 3만원. 77년 부산으로 내려갔다.

“서울에서 3층 건물을 학부형과 동업으로 야무지게 지었는데 빚잔치하느라 팔고 창천동 아파트도 팔았더니 3만원이 남더군요. 일본으로 다시 가려고 제자 양정화가 있는 부산 수정동 무용학원에 짐을 부리고 3일 후 다다미 3조짜리 방 2개를 얻어 6개월 동안 출장교습했죠. 그리고 수영에 학원을 냈어요. 객지에 와서 고생한 거 다 쓰면 삼국지 돼요. 죽지 않은 게 용하죠. 우리는 몸이 연주 악기잖아요. 아프면 끝이에요. 건강관리요? 춤밖에 몰라요.” 춤이 애인이다. 자식도 없고 오직 춤만 춘다. 자다가 죽을 때까지 무대에서 춤출 것이다.

‘춤추는 제비’는 학원에서 거주한다. 연습실 한쪽에 냉장고와 식탁이 있다. 신혼부부가 사용함직한 미니 전기밥솥에 이틀치 밥이 담겨있다. 그나마 단원들이 없으면 외로운 공간. 그 외로움을 지우는 지우개처럼 60년 전 공연 포스터가 묵묵히 빛난다. “이제 그만 물어봐요. 10년 후 하늘가는 날만 기다리는데…. 정말 그렇게 될 겁니다. ‘꿈은 이루어진다!’ 개봉박두!”

‘10년만 춤추겠다’는 말. 옛일 생각하면 마음만 아프다는 고백일 터. 춤추는 제비를 만나고 돌아오는 서울길은 은퇴한 옛 담임선생님을 몇십년 만에 처음 만나고 돌아서는 길처럼 송구하고 벅찼다.

〈유인화 선임기자|부산에서 rhew@kyunghyang.com〉

[춤과 그들]정무연 ‘춤추는 제비’의 고독한 날개짓

◇정무연 약력

1927년 경기 용인에서 출생
45년 서울 배재고교 졸업, 서울 장추화무용연구소 졸업, 서울 조선 정악원 고전무용연구소 수료
47년 일본으로 감
49년 일본 도쿄 가와가미고로 무용연구소 입소
49~54년 일본 도쿄 사사스가 정무연 오자와 준코 합동연구소 운영
51~52년 일본 도쿄 아사구사 국제극장 안무 겸 전속출연
53년 일본 도쿄 요미우리 신문회관에서 정무연 무용발표회
54년 귀국
55년 서울발레연구소 이인범·김민자와 공동 운영
57년 제1회 무용발표회(서울 명동시립극장)
61년 미8군 화양연예주식회사 전속안무 담당·출연
55~75년 서울에서 정무연 무용연구소 운영
75년 이후 현재 부산에서 정무연 무용학원·정무연 무용단 운영, 한국무용협회 부산지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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