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습 안 한 이유 “노래에 때가 묻는다”

손동우 사회에디터 sdw@kyunghyang

데뷔 40주년 기념음반 낸 가수 정훈희

자신이 다녔던 초등학교를 성인이 되어 찾아본 일이 있는 사람은 알 것이다. 웅장하게 솟아있던 교사(校舍)가 얼마나 나지막하게 누워있고, 철봉대며 책상·걸상 따위도 얼마나 앙증맞도록 조그마하게 변해있는지를. 이처럼 세월의 흔적에 따라 작아진 교정의 갖가지 모습들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친밀감과 일체감을 던져주게 된다. 아, 어렸을 적 학교란 것은 무시무시하거나 범접하지 못할 그 무엇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와 함께해 왔으며, 결국 우리의 일부였구나라는.

[세상 그리고 사람]연습 안 한 이유 “노래에 때가 묻는다”

가수 정훈희와 만났을 때도 그랬다. 초등학교 시절 잡음이 섞이곤 하는 오래된 트랜지스터 라디오지만 그것을 통해 들리는 그의 목소리는 얼마나 황홀하도록 아름다웠던가. 몇 집 건너서 흑백TV가 보급됐던 시절 화면에서 보았던 그의 자태는 또한 얼마나 소년의 마음을 사로잡았던가.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나 먼 것처럼 여겨졌던 그 정훈희는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님’처럼 넉넉한 품성을 지니고 있었고, 소년 역시 한참 어른이 되어 있었다. 60·70년대 가요계를 풍미했던 ‘디바’와 그 디바의 노래를 가슴에 담고 흥얼거렸던 지방 소도시의 소년이 같은 50대라니…. 최근 데뷔 40주년 기념 음반을 낸 정훈희를 경향신문 5층 스튜디오에서 만나 40년 노래 인생에 얽힌 얘기를 들어보았다.

정훈희는 “이번 앨범에 트로트는 한 곡도 없다”고 말했다. 트로트를 폄훼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처음부터 걸었던 발라드 가수의 길을 앞으로도 계속 걷겠다는 뜻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정훈희는 “혜은이, 민혜경, 이은하 등 후배 가수들에게 발라드 가수로서의 자리를 굳건하게 지켜달라고 했다”면서 “어떤 일을 하든 자신만의 장르를 지키고 가꾸는 건 소중한 일이 아니냐”라고 반문했다.

‘40th 애니버서리 셀리브레이션스(anniversary celebrations) 정훈희’라는 이름이 붙은 이번 음반은 그가 1967년 ‘안개’로 데뷔한 것을 기념하는 동시에 1978년 발매된 ‘꽃밭에서’ 이후 30년 만에 나온 독집이기도 하다. 음반에는 ‘안개’ ‘꽃밭에서’ ‘그 사람 바보야’ 등 그의 히트곡 3곡과 신곡 8곡이 담겼다. 인터뷰에 동행한 정훈희의 소속사 (주)뮤직 마운틴의 권민영 마케팅 운영팀장은 “정훈희의 데뷔 40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후배 가수와 작곡가들이 대거 참여한 사실이 음반의 가치를 더해준다”고 설명했다. 즉 부활의 김태원, 김현철, 그룹 45rpm을 비롯해 김형준, 윤명선, 최희찬, 김현종 등의 작곡가들이 참여했으며, 윤도현의 음반에 참여한 작곡가 김신일이 프로듀서를 맡아 ‘안개’를 편곡하는 한편으로 ‘노 러브’와 ‘러브 이즈’를 작곡했다는 것이다. 특히 ‘노 러브’는 정훈희가 가장 아끼는 후배인 인순이와 듀엣으로 부른 곡으로 정훈희의 곱고 부드러운 목소리와 인순이의 폭발적인 음성이 잘 어우러졌다고 한다.

이번 앨범의 대표곡은 신나고 경쾌한 멜로디의 ‘삐삐코로랄라’로서 장윤정의 ‘어머나’를 작곡한 윤명선의 작품이다. 정훈희는 “고유가와 물가고, 생활고 등 신나는 일이 별로 없는 우리 사회에 ‘삐삐코로랄라’가 조그마한 위안이라도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정훈희는 포즈를 잡아달라는 사진기자의 요청에 곧바로 음반을 틀고 ‘삐삐코로랄라’와 ‘꽃밭에서’를 불렀다. ‘삐삐코로랄라’에서는 흥겹고 신나는 율동을 곁들였고, ‘꽃밭에서’를 부를 때는 그의 전성기때 선보였던 크고 우아한 포즈를 취했다. 온갖 잡동사니가 가득한 조그마한 창고같은 스튜디오는 일순간 ‘정훈희 리사이틀 공연장’으로 변했고, 세 명의 관객은 노래 중간중간에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이번 앨범을 내기 위해 연습을 어느 정도 했느냐는 질문에 정훈희는 “하지 않았다”고 잘라 말했다. 연습을 하면 할수록 노래의 참신한 맛이 떨어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지금까지 음반 취입을 앞두고 연습해본 적이 없다”면서 “멜로디만 알고 곧바로 취입해야 노래의 맛이 살아나며 연습을 하면 노래에 때가 묻는다”고 말했다. 그것은 자신의 천부적 재능에 대한 강렬한 확신으로 들렸다.

정훈희의 노래 인생에서 운명과도 같은 존재는 작곡가이자 색소폰 연주자였던 고(故) 이봉조일 것이다. 고교생이었던 정훈희에게 ‘안개’를 선사해 일약 스타로 만들었던 이봉조는 작고하기 직전 최후의 유작이 된 ‘꽃밭에서’를 건네주면서 “이것은 정훈희만이 부를 수 있는 노래”라고 말했다고 한다.

고교 1학년이었던 1967년 방학을 맞은 정훈희는 서울 그랜드 호텔 나이트 클럽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나이트 클럽 밴드 마스터였던 삼촌을 따라와 연습삼아 몇 곡을 흥얼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때 이봉조가 들어왔다. 나이트 클럽 옆의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있던 그는 정훈희의 목소리를 듣고 ‘필이 꽂혀’ 단숨에 달려와서 이렇게 말했다. “쪼맨한(조그마한) 가시나가 건방지게 노래 잘 하네.” 당시 이봉조는 ‘안개’를 만들어놓고 자신의 색소폰 연주로 취입한 상태였는데 그 노래에 맞는 목소리를 찾고 있던 중이었다. 정훈희-이봉조 콤비는 이렇게 이뤄졌다.

정훈희가 데뷔한 1967년은 대중음악계에서는 뜻있는 해로 꼽힌다. 핑크 플로이드, 도어스, 지미 헨드릭스, 벨벳 언더라운드 등 걸출한 가수들이 등장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나홀로 걸어가는 안개만이 자욱한 이 거리’로 시작되는 ‘안개’의 운치있는 노랫말과 곡조는 정훈희의 비음섞인 고운 음색과 절묘하게 어우러졌고, 17세 소녀는 일약 신데렐라로 떠올랐다. ‘안개’는 김승옥의 단편소설 ‘무진기행’을 소재로 한 영화 ‘안개’의 삽입곡이 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거장 김수용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신성일, 윤정희 두 남녀 스타배우가 주연을 맡은 이 영화에서 ‘안개’는 정훈희의 노래와 재즈풍의 편곡으로 흐른다. 현대인의 물신주의와 도시인의 소외와 고독과 같은 관념적인 주제를 아름다운 흑백영상에 담은 이 영화를 통해 신성일은 단순한 미남스타에서 배우로 거듭났고, 윤정희 또한 연기력을 인정받게 됐다. 영화 ‘안개’의 성공으로 “소설도 걸작” “영화도 걸작” “노래도 걸작”이라는 ‘3걸작’의 신화를 남겼다.

정훈희-이봉조 콤비는 수많은 국제가요제에서 상을 휩쓸면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1970년 도쿄 국제가요제에서 정훈희는 ‘안개’로 가수상을 받았는데 당시 ‘댄싱 퀸’으로 유명했던 스웨덴 최고의 그룹 아바도 상을 받지 못하고 빈 손으로 돌아갔던 터였다. 1972년 그리스 아테네 국제가요제, 1975과 1979년의 칠레 국제가요제 등에서도 정-이 콤비는 빠짐없이 상을 탔다. 국제가요제에서 무려 6번이나 입상한 정훈희에게는 자연스레 ‘국가대표 가수’라는 별명이 붙었다.

정훈희는 “내가 상을 휩쓸었던 것은 반드시 가창력이나 노래 자체의 작품성 때문만은 아니었다”라고 말했다. 국제사회에서 ‘사우스 코리아’의 위상이 변변찮았던 1970년대 당시의 상황은 국제가요제에도 그대로 적용됐다. 그래서 이봉조는 가요제 전야제 등의 행사에서 심사위원을 ‘친한파’로 만들기 위해 특유의 유머를 마음껏 발휘했다고 한다. 정훈희는 “선생님이 브로큰 잉글리시로 야한 농담을 할 때마다 심사위원들이 배를 움켜쥐고 떼굴떼굴 굴렀다”면서 “이렇게 친분을 쌓고 인맥을 구축한 것들이 도움이 됐다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이봉조의 음악을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정훈희는 “내가 어떻게 감히 그 분의 음악을 놓고 평가 운운 할 수 있겠느냐”면서 “한마디로 위대하고 탁월한 재능의 작곡가”라고 스승에 대한 끝없는 존경심을 나타냈다.

국제가요제 입상 배경에다 발표하는 노래마다 히트곡이 되자 정훈희는 ‘가창력이 뛰어나고 용모가 아름다운 여가수’에게 붙여지는 ‘디바’의 칭호를 얻게 됐다. 그러나 1975년 위기가 왔다. 이른바 공연정화법 규제라는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의 횡포에 따라 가수의 80% 이상이 잡혀 들어간 대마초 파동에 그도 끼게 됐던 것이다. 정훈희는 “당시에는 시골에서 대마초를 진통제로 사용하기도 하고 담배처럼 아무 스스럼 없이 피울 때였는데 느닷없이 대대적인 규제를 가해 아까운 가수들이 무더기로 무대에서 사라졌다”고 안타까워했다. 자신은 대마초를 피운 사실이 없다는 사실이 밝혀져 유일하게 훈방으로 나왔지만 ‘대마초 가수’라는 낙인으로 인해 더이상 활동하기가 어려웠다.

81년 규제가 풀렸지만 노래는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죽기 살기로 노래해도 사소한 것으로 버림받는다는 좌절감과 섭섭함” 때문이었다. 그 뒤 가스펠과 골든 히트 음반, 남편 김태화와 함께 낸 ‘우리는 하나’를 빼고는 정규음반은 내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의 맑고 고운 목소리는 대중들의 기억속에 꿈틀거리는 생명으로 살아있었다.

정훈희가 같은 가수로서 가장 높이 평가하는 가수는 미국의 다이애나 로스, 바버라 스트라이샌드 두 사람이다. 그 이유를 묻자 그는 “더이상 잘 할 수 없을 정도로 노래를 잘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정훈희에게 ‘한국의 다이애나 로스’라는 칭호가 붙어있다는 사실이 문득 생각나서 “다이애나 로스의 데뷔 연도가 1970년인데 그렇다면 그를 ‘미국의 정훈희’라고 불러야 하는 것 아니냐”라고 썰렁한 아부를 했다. 정훈희는 웃으면서 “다이애나는 솔로로 나오기전 1960년대 초반부터 슈프림스라는 그룹활동을 했기 때문에 그것은 당치 않다”고 말했다.

정훈희는 아주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정근수·작고)의 노래를 들으면서 자랐다. 아버지는 만주와 일본 등지에서 공연을 가졌고, 일본 빅터 레코드에서 취입까지 한 알려진 가수였다. 삼촌도 가수였고, 네 살 터울의 오빠(정희택)도 왕년의 인기 그룹 히식스의 보컬이었다. 평생의 반려인 남편 김태화는 한국 록의 1세대 가수이고, 조카 제이도 활발하게 노래를 부르고 있으니 그야말로 노래 가족이라고 할 만하다. 정훈희는 “우리 가족들이 영원히 음악에 대한 열정을 품에 안고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정훈희는 “잘 부르도록 가르쳐진” 요즘 가수들이 당연히 노래를 잘 하지만 잘 불러서만은 안된다고 말했다. 자신만의 색깔과 목소리를 갖고 있어야 하며 노래에 대한 깊은 이해에서 우러나는 감정 또한 풍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목소리에 진심을 담아 듣는 이와 소통하는 것이 바로 노래의 힘이라고 그는 거듭 힘주어 말했다. 역시 핵심은 소통이다.

[세상 그리고 사람]연습 안 한 이유 “노래에 때가 묻는다”

▶정훈희는?

▲1951년 부산 출생

▲1967년 ‘안개’로 데뷔

▲‘무인도’ ‘꽃밭에서’ ‘그사람 바보야’ ‘진실’ ‘빗속의 연인들’등 히트곡 다수

▲1970년 제1회 도쿄국제가요제 가수상 수상

▲1972년 아테네 국제 가요제, 1975년 칠레 국제가요제 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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