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과 사람들

(12)인천의 마지막 남은 송도 갯벌

글 박정환·사진 김순철기자

‘황금 갯벌’ 할퀴고 지나간 70년대 개발 광풍

‘대한민국의 갯벌에는 바람 잘 날 없었다. 1960년대 경제개발계획이 시작되고부터 갯벌은 줄곧 개발론자들의 타깃이었다. 시화호가 그랬고, 인천의 무수한 갯벌 역시 그랬다. 송도매립 현장의 한가운데 연세대학교터가 있다.

올해 5월 이후 환경영향평가 용역이 진행되는 인천 송도 지역의 마지막 갯벌인 11공구 전경. 계획대로 2014년 매립이 완공되면 720만㎡의 갯벌은 사라진다.

올해 5월 이후 환경영향평가 용역이 진행되는 인천 송도 지역의 마지막 갯벌인 11공구 전경. 계획대로 2014년 매립이 완공되면 720만㎡의 갯벌은 사라진다.

현재 5, 7공구에 강의동이 올라가고 있으며 마지막 남은 갯벌인 11공구가 매립되면 그곳에도 역시 연세대학교가 지어질 예정이다. 정당하지 못한 자리에 올라온 학교에서 학생들은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오히려 무분별한 국토개발에 대한 긍정만을 배워야 하는 것은 아닌가?’ 연세대 여총학생회가 인천 송도지역의 마지막 갯벌 11공구 매립을 반대하면서 1일 발표한 성명서의 한 대목이다.

1970년대 휘몰아친 개발의 광풍은 인천의 갯벌을 여지없이 할퀴고 지나갔다. 때론 항만과 공항터로, 때론 공장과 아파트터로 갯벌은 자리를 내주어야만 했다. 밀리고 밀려서 이제 인천시내에 남아있는 갯벌은 송도국제도시 11공구 매립 예정터가 유일하다. 그곳도 얼마 못 갈 지경이다. 인천시가 2014년까지 그곳 갯벌 720만㎡를 메워 더 큰 송도국제도시를 마련할 계획이기 때문이다. 인천 송도해안도로로 닦인 그 자리는 1970년대 초 ‘백합’ 껍질이 수북히 쌓였던 곳이다. 바닷물이 빠졌을 때 남구 용현동 토지금고 앞 낙섬( 落島)에서 연수구 옥련동 아암도(兒岩島)까지 백합 껍질 길이 펼쳐 있어 초등학교 소풍의 단골 장소였다.

항만과 공항터로, 공장과 아파트터로

송도 앞바다는 ‘황금 갯벌’이었다. 정월 보름 송도의 모시조개(가무락)탕을 먹지 않으면 ‘나이를 헛먹는다’며 서울 사람들이 일부러 찾아오던 곳이 송도였다. 맛 좋기로 소문난 송도의 뻘 꽃게는 그 유명세를 단단히 치르기도 했다. 송도 갯벌은 한강과 예성강에서 내려온 민물이 빠지는 길목인 데다 드넓은 뻘에서 운동을 많이 한 꽃게의 육질은 단단하면서도 쫄깃했다. 그러다 보니 타지 장사꾼들이 다른 곳에서 잡은 꽃게에다 뻘을 발라 ‘송도 꽃게’라며 속여 팔 정도였다. 알고 보면 지금의 라마다송도호텔 앞에서 500m 떨어진 동막의 꽃게탕 밀집지역은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다.

물이 빠지면 갯벌은 수십만마리의 칠게들 세상으로 변한다.

물이 빠지면 갯벌은 수십만마리의 칠게들 세상으로 변한다.

송도 갯벌은 남구 용현동∼연수구 옥련·청학·동춘동∼남동구 고잔·논현동까지 펼쳐 있었다. 남구 용현동 갯골은 OCI(옛 동양제철화학) 앞까지 나 있었고, 송도 석산 바로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 남구 학익동과 연수구 옥련동 사이 작은 동네가 ‘조개골’로 붙여진 것도 이 때문이다. 바로 앞 갯벌에서 조개를 캐다 팔았기 때문이다.

지금 현대·럭키 아파트 등이 들어선 옥련동의 능허대는 밀물 때 바닷물에 잠기는 섬이었다. 동춘동 앞바다에서 연수동 롯데마트 인근까지도 갯골이 길게 나 있었다. 남동구 고잔동 앞바다에서 선학동 문학경기장 인근까지 바닷물이 들고나는 뻘이었다.

인천의 어촌계도 주요 갯골을 중심으로 생겼났다. 송도(연수구 옥련동)∼척전(연수구 청학동)∼동막(연수구 동춘동)∼고잔(남동구 고잔동)∼소래(남동구 논현동) 등이다. 이들 어촌계는 1957년 정부가 양식업 진흥을 계속 사업으로 추진하면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환경단체 “개발 반대” 천막농성 계속

송도 갯벌은 양식업 투자의 핵심지역이었다. 송도해안도로에 조개껍질이 쌓이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어촌계는 백합과 바지락, 가무락 등 조개류를 중심의 양식에 집중했다. 1961년 47만6238㎏이었던 양식 생산량은 이듬해 106만1697㎏으로 두 배 이상 늘었다. 계속된 양식업 진흥사업으로 1965년 양식 생산량은 472만7073㎏으로 급증했다.

1970년대 정부가 양식사업을 국가장려사업으로 권장하면서 송도 등 연안 갯벌은 대규모 조개 양식장으로 개발됐다. 1971년 백합이 118㏊, 가무락 315㏊, 굴 10㏊이었던 양식장이 1979년 백합이 374㏊, 가무락 438㏊, 굴 22㏊로 넓혀졌다. 생산량도 712만908㎏으로 늘어났다.

송도 갯벌의 수난기는 1980년대였다. 1980년과 1981년 인천위생공사와 (주)한독은 송도 갯벌 136만㎡를 매립했다. 이바람에 연수구 옥련동 아암도(兒岩島·면적 5940㎡)와 소아암도(所兒岩島· 198㎡)는 육지로 변했다.

여름철새인  백로와 왜가리들에게  11공구 갯벌은 훌륭한 먹이공급처다.

여름철새인 백로와 왜가리들에게 11공구 갯벌은 훌륭한 먹이공급처다.

1985년 토지공사는 281만㎡에 이르는 갯벌을 매립해 남동산업단지를 조성했다. 역시 섬이었던 대원예도(大遠禮島)와 소원예도(小遠禮島)가 사라졌다. 남동산업단지 2단지에 화학·섬유 등 20개 공해 업체가 들어서면서 송도 갯벌은 ‘죽음의 뻘’로 변했다. 1988년 7월에는 연수구 동춘동 앞바다 2000㏊에 어패류가 떼죽음을 당해 인천시와 환경청, 국립수산진흥원 등이 원인 규명에 나서기도 했다.

송도 갯벌의 치명타는 해상신도시 개발계획이었다. 인천시는 송도 앞바다에 해상신도시 건설계획을 세우고 1990년 6월 1단계사업으로 1766만㎡의 갯벌 매립면허 승인을 정부로부터 얻어냈다. 송도 해상도시 건설계획은 송도국제도시로 이름을 바꾸고 매립면적도 4250만㎡로 늘렸다. 송도의 마지막 갯벌 11공구가 바라다 보이는 남동공단 유수지에서는 매립을 반대하는 환경단체의 천막농성이 계속되고 있다.

-송도 갯벌에 즐비했던 어촌계‘딱지의 아픔’만 생채기로 남아-

전업대책 용지 대부분 헐값에 팔아넘겨

어촌계원이라는 이름만 있을 뿐 온전한 어민이라고도 할 수도 없다. 꽃게를 잡고 조개를 캤던 갯벌은 이미 ‘내 것’이 아니다. 공사판이 갯벌을 점령한 지 오래다. ‘당장 뻘에서 나가라’고 해도 어업보상은 말도 못 붙인 채 꽁무니를 뺄 수밖에 없다. 그곳에 갯벌은 금방이라도 숨넘어갈 듯 아슬아슬하다. 하지만 송도어촌계는 갯벌에 대한 미련을 떨칠 수 없다. 저 멀리 달아난 짜투리 갯벌을 향해 오늘도 승합차에 오르는 송도 어촌계원들은 어쩔 수 없는 어민이다.

11공구 갯벌을 찾은 이주노동자 가족이 숭어등 물고기를 잡아 뭍으로 나오고 있다.뒷편에 모래채취 예인선이 보인다.

11공구 갯벌을 찾은 이주노동자 가족이 숭어등 물고기를 잡아 뭍으로 나오고 있다.뒷편에 모래채취 예인선이 보인다.

송도어촌계장 황인국씨(69)는 3일 한정면허(맨손어업)연장 승인 신청을 하는 묘한 감회에 빠졌다. 한편으로 섭섭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 ‘천만다행’이다 싶었다. ‘맨손어업이 매립공사를 방해해선 안 된다. 한정면허를 취소해도 보상을 요구하지 않는다 ’는 이행각서를 붙인 한정면허 3년 연장신청서 앞에서 황씨는 초라해질 수밖에 없었다. 송도국제도시 매립으로 1990년 어업권이 사라지기 전 넓디넓은 송도 갯벌에 나가면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다. 경운기를 끌고 나간 갯벌에서 한나절 쉬엄쉬엄 호미질을 하면 동죽과 가무락 등이 혼자서는 들지 못할 정도로 한바구니 그득했다. 아낌없이 토해냈던 송도 갯벌은 어촌계의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한정면허) 3년 연장이 어디야. 갯벌 아니면 노인네들이 무슨 수로 하루 반나절에 9만 원을 벌어!” 황씨는 어촌계원 60여 명이 갯벌에서의 일할 수 있는 3년의 세월을 더 벌었다는 사실에 위안을 삼고 있다.

송도국제도시가 들어서기 전 송도에는 갯벌을 따라 4개의 어촌계가 있었다. 어촌계원만도 송도 275명을 포함해 척전 462명, 동막 319명, 고잔 209명 등 모두 1265명에 달했다. 하지만 동막과 고잔 어촌계는 이제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다. 남아있는 송도와 척전 어촌계원도 65명과 217명으로 줄었다.

송도 갯벌에 즐비했던 어촌계는 갯벌의 광풍으로 대표되는 ‘딱지의 아픔’을 생채기로 안고 있다. 송도 앞바다 공유수면 매립승인이 떨어지면서 1996년 어업보상라는 게 나왔다. 어촌계원들에게 전업대책으로 송도국제도시 1공구 안에 1인당 165㎡(50평)씩이 돌아갔다. 조개를 캘 갯벌이 없어지니 대신 송도국제도시 안에 상가를 지어 장사라도 해서 먹고 살라는 뜻이었다.

“어민들에게 돌아간 전업대책 용지는 ‘남 좋은 일’만 시킨 거여. 딱지가 나놀면서 땅 소유권이 벌써 다른 사람 손으로 넘어갔지.” 1997년 IMF 외환위기로 먹고 살기 힘들었던 시절, 어민들은 2500만 원에서 3000만 원에 송도국제도시의 소유권을 딱지로 넘겼다. 실직한 자식들의 사업자금으로, 빚더미에 오른 친척의 생활비를 대기 위해서였다. 실제 땅을 분양받기 위해선 토지조성원가의 125%(140만 원)를 내야 했던 대금도 부담이었다.

외환위기가 끝나고 송도국제도시가 뜨면서 ‘딱지’ 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2003년 2억4000만 원에서 2억5000만 원선에 거래됐다. “아마 어민들 60% 정도는 딱지를 부동산업자에게 팔았지. 어민들에게 남은 건 보상조차 요구할 수 없는 조그마한 갯벌이지.” 황씨는 쓴 입맛을 다시며 얼마 전 장만한 25인승 승합차에 올랐다. 사라질 듯 붙어있는 송도국제도시 6공구 너머 갯벌이 황씨에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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