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성기훈’들은 아직 싸우고 있다

유혜림 이투데이 정치경제부 기자
2009년 경찰특공대가 파업 중인 쌍용자동차노조원을 곤봉 등으로 구타하고 있다. /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

2009년 경찰특공대가 파업 중인 쌍용자동차노조원을 곤봉 등으로 구타하고 있다. /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

“(경찰)청장님,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 아시죠?”(이은주 정의당 의원)

지난 10월 5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국정감사, 드라마 <오징어게임>이 서울 여의도 국회로 소환됐다. 이 의원의 물음에 경찰청장이 “네”라고 짧게 답하자 이 의원은 방호복과 곤봉으로 무장한 경찰이 파업노동자를 구타하는 드라마 장면을 언급했다. 해당 장면은 2009년 쌍용차사건 당시 실제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이 의원은 “<오징어게임>은 자동차회사 구조조정에 맞서 파업에 참여하지만 끝내 해고된 노동자가 주인공”이라며 실제 쌍용자동차 사태를 모티브로 삼았다는 감독의 말도 함께 소개했다.

그러면서 “여전히 노동자들은 28억원이 훌쩍 넘는 (국가가 제기한) 손해배상액으로 밤잠을 못 이루고 있다”며 “소송 취하 의견을 대법원에 제출해달라”고 촉구했다.

쌍용차 노조원들은 또 다른 ‘성기훈’들이다. 드라마의 주인공 성기훈이 다녔던 자동차회사 이름마저 쌍용차를 연상시키는 ‘드래곤 모터스(용차)’다. 실제 <오징어게임>의 황동혁 감독은 “쌍용차를 레퍼런스(자료)로 삼은 게 맞다. 평범했던 기훈이 어떻게 바닥까지 갔는지를 그 사건을 레퍼런스 삼아 만들면 어떨까 생각했다”고 말했다.

■‘현실판’ 오징어게임은 현재 진행 중

쌍용차 노동자들은 국가손배소로 13년째 벼랑 끝에 서 있다. 1심과 2심 모두 국가가 승소했고, 현재 대법원 판단만 남았다. 앞서 경찰은 2009년 쌍용차노조 파업 진압 과정에서 크레인·헬기가 파손되고 경찰이 정신적 피해를 봤다며 101명의 노동자를 상대로 24억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이후 2019년 7월, 민갑룡 당시 경찰청장은 파업 진압 과정에서 있었던 경찰력 남용과 인권 침해를 공식 사과했다. 경찰이 농성 진압을 위해 사측과 ‘합동작전’을 펼쳤고, 대테러 장비와 헬기까지 동원해 해고노동자들을 과잉 진압했다고 인정했다. 하지만 경찰은 손배소에 따른 임금 가압류는 해제하면서도 대법원 판단을 받겠다고 했다.

현재 쌍용차 국가손배소는 1심과 2심을 거쳐 11억6760만원이 선고된 상태다. 여기에 지연이자까지 더하면 노조원들이 갚아야 할 손해배상금 규모는 총 28억원에 달한다. 자고 일어나면 매일 지연이자가 62만원씩 쌓인다. 심적 압박을 느낀 30명의 쌍용차 노동자들과 가족들이 생을 마감하는 비극도 벌어졌다.

드라마 <오징어게임> 감독 역시 성기훈을 설정하는 데 있어 ‘트라우마’에 주목했다. 그는 “쌍용차 대량 해고 이후 사람들이 많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평범한 한 사람의 노동자가 무너지면서 이들의 가정 또한 일순간에 망가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해고당한 후 기훈은 치킨집도 했고, 대리기사도 전전하지만 결국 멘털이 많이 망가진 사람으로 설정했다”고 설명했다.

살아남은 자들의 아픔은 여전히 치유되지 못했다. 지난 10월 2일, 경기도 평택에서 만난 김득중 금속노조 쌍용차지부장은 쌍용차 사태를 “더는 기억하고 싶지 않다”면서도 여전히 2018년 세상을 떠난 고 김주중씨의 죽음을 새기고 있었다.

김득중 지부장은 “2018년도 주중이의 죽음으로 (덕수궁) 대한문 앞에 분향소를 설치한 뒤 경찰청에서도 여러차례 방문하고 기자회견도 했다. 특히 주중이 같은 경우, 경찰청 인권침해조사위에 참여해 자기가 국가 공권력으로부터 당했던 치욕스러움까지 진술하는 과정을 거쳤다. 10년이 넘어도 우리는 떨어지지 않는 (국가폭력) 꼬리표를 붙인 채 여전히 살아가고 있다”고 회고했다.

끝나지 않은 소송에 쌍용차 노조원들은 계속 트라우마를 복기해야 했다. 김득중 지부장이 지난해 김창룡 경찰청장 인사청문회에 참석한 이유 역시 ‘잊히기 싫어서’였다. 이날 현장에 참석한 그는 ‘대법원의 판결을 봐야 한다’는 경찰의 원론적인 입장을 들었다. 김 지부장은 예상되는 답변을 듣더라도 가야 했다고 했다. 그는 “사실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다만 쌍용차에 가해지는 국가폭력이 여전히 진행형이라는 사실에 대해 신임 경찰청장과 국회 행안위 위원들에게 알리고 싶었다. 좀더 욕심이 있다면 언론을 통해서라도 쌍용차 국가폭력이 10년이 지난 지금도 현재 진행 중이라고 알리고 싶었다”고 밝혔다.

또 다른 ‘성기훈’들은 아직 싸우고 있다

■쌍용차 국가폭력, 이제는 끝내자

계속되는 국가폭력에 정치권이 나섰다. 사법부 판결을 기다리기보다 정부가 제기한 소송 자체를 취하할 수 있도록 입법부가 목소리를 모으자는 취지에서다. 지난해 9월, 이은주 의원은 쌍용차 노동자들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취하하라는 내용을 담아 결의안을 만들었고, 지난 8월 가까스로 본회의를 통과했다.

이 의원은 지난 5일 행안위 국감에서 경찰청장에게 재차 물었다. 이 의원은 경찰청장에게 “시간이 좀 걸렸지만 그래도 국회는 (쌍용차) 결의안 통과라는 정치의 역할을 다했다. 청장께서도 결의안 취지를 무겁게 받아들여 주시고 하루라도 빨리 손배 소송 취하 의견을 대법원에 제출해달라”고 했다.

김창룡 경찰청장은 “국회에서의 결의안 취지와 또 국회에서 결의안을 통과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도 반대하진 않지만, 법리적인 그런 법률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경찰청은 (대법원의 판단을 기다리겠다는 기존의) 그 입장을 유지할 수밖에 없다는 점도 양해해달라고 말씀드린 기억이 난다”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개인적으로는 안타까운 점도 있지만, 대법원 재판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 경찰청으로서도 자유로운 결정을 할 수 없다는 점에 대해서는 양해를 부탁드린다”며 기존 입장을 재확인시켰다.

<오징어게임>에는 우리 현실이 겹쳐보인다. 해고 후 대리기사를 전전하며 살아가는 성기훈을 보며 김득중 지부장은 먼 타인이 아닌 이웃 혹은 나의 문제가 될 수 있다고 했다. 황 감독 역시 자본주의 사회에서 누구나 기훈과 같은 처지에 놓일 수 있다고 말한다.

심지어 명령에 따라 일하다 죽음을 맞이한 <오징어게임>의 진행요원마저 현실과 닮았다. 쌍용차 사태에 투입된 경찰 중에선 부상을 입고 여전히 트라우마를 겪는 이들도 있다. 이번에 통과된 쌍용차 결의안에는 “(국가는) 소송 취하뿐만 강제진압 현장에 투입된 ‘경찰’들의 치유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내용도 함께 담아냈다.

<오징어게임> 규칙 제3항, 참가자의 과반수가 동의할 경우 게임을 중단할 수 있다.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조항이다. 국가폭력을 끝내기 위한 오징어게임의 마지막 한표, 이제 정부 선택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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