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반쪽 해법’ 일제 강제동원 배상, 끝 아닌 새로운 문제의 시작

박진 외교부 장관이 6일 서울 종로구 외교부청사 브리핑룸에서 일제 강제동원 피해배상 해법을 발표하며 굳은 표정을 짓고 있다. 이준헌 기자

박진 외교부 장관이 6일 서울 종로구 외교부청사 브리핑룸에서 일제 강제동원 피해배상 해법을 발표하며 굳은 표정을 짓고 있다. 이준헌 기자

한국 정부가 6일 일제하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판결 해결책을 발표했다. 행정안전부 산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대법원 승소 판결을 받은 피해자들에게 일본 전범기업들을 대신해 위자료를 지급하는 방안이다. 재원은 “민간의 자발적 기여 등을 통해” 마련하기로 했지만 일본 기업 참여는 명시하지 않았다. 일본 정부는 “1998년 한·일 공동선언(김대중·오부치 선언)을 포함해 역사 인식에 관한 역대 내각의 입장을 전체적으로 계승한다”는 말로 피해자에 대한 사과를 대신했다.

2018년 대법원 판결이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과 배치되는 상태가 길어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생존 피해자들이 고령인 데다, 한·일관계 개선의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정부의 ‘제3자 변제’ 방법을 고육지책으로 인정할 수 있다. 우리가 대법원 판결과 피해자 의사를 존중해야 한다는 전제하에 윤석열 정부의 해법 마련 시도를 일단 지켜본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이날 발표는 피해자와 시민들의 지지를 받기 어려운 반쪽 해법이다. 우선 일본의 제대로 된 반성과 사과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일본 기업들이 내야 할 위자료를 재단이 대신 지급하기로 했음에도 일본 기업의 기금 조성 참여를 명시하지 않은 것은 식민지배와 강제동원의 불법성을 전제로 한 대법원 판결 취지에 맞지 않다. 일본이 진심으로 사죄할 뜻이 있었다면 새로운 반성·사과 메시지를 내는 것이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일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일본이 계승하겠다고 밝힌 역대 내각 입장에 ‘추가 사죄는 불가하다’는 2015년 아베 담화도 포함돼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 정부의 외교적 완패로 볼 수밖에 없다. 양금덕 할머니 등 생존한 피해자 3명 모두 이번 해법에 대한 거부 의사를 밝혔다. 가해자가 사죄라고 하지 않는 것을 피해자에게 사죄가 맞으니까 받아들이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정부는 당면한 외교 상황이 엄중해 이런 선택을 했다고 밝혔다. 안보·경제 위기 상황에서 한·미·일 3국 협력을 강화함으로써 활로를 열기 위한 조치라는 뜻이다. 당장은 다음달 윤 대통령의 미국 방문 때 환대를 받고 5월 일본 히로시마 G7 정상회의에 참관국 자격으로 초청받는 것을 염두에 둔 것이다. 정부 발표 직후 미국이 바로 조 바이든 대통령을 비롯해 국무장관과 주한 미국대사가 환영 성명을 낸 것을 보면 미측과 사전 교감이 있었던 것 같다. 이날 발표의 여세를 몰아 다음주 시작하는 한·미·일 군사훈련도 대규모로 진행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는 필시 북한, 중국 등의 반발에 이은 한반도 주변 긴장 고조라는 비용을 치를 공산이 크다.

정부는 “대승적 결단이자 우리 주도의 해결책”이라며 “문제 해결의 끝이 아닌 진정한 시작”이라고 했다. 한국이 먼저 해법을 내놓았으니 이제 일본이 호응해야 한다는 뜻이 담겼다. 하지만 이번 해법은 ‘새로운 문제의 시작’일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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