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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 주인 윤성근
부모님은 맞벌이였다. 가난해서 텔레비전이 없었고, 내성적인 성격이라 친구도 없었다. 어린 시절의 윤성근(37)은 무언가 읽고 시간을 보내야 했다. 닥치는 대로 읽으려 했으나, 어린이용 책은 없었다. 뜻도 모른 채 <일리야드> 같은 고전을 읽었고, 나중에는 국어사전, 전화번호부까지 펴들었다. 그래서 지금도 전화번호부 맨 앞에 나온 가씨 성의 여성 이름을 기억한다. ‘활자중독’이었다고 할까.옆집에 살던 대학생 형들이 윤성근을 구해냈다. 그들의 방에는 뜻모를 전단이 뒹굴었고, 수염이 텁수룩한 남자가 그려진 책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운동권 학생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사람이 ‘혁명’만 생각하며 살 수가 있나. 해문출판사에서 나온 추리소설 시리즈에 윤성근의 눈이 번쩍 뜨였다. 코넌 도일은 거칠었고, 엘러리 퀸은 무서웠다. 조용하고 차분했던 윤성근에게는 “뇌세포를 굴려 사건을 푸는” 애거사 크리스티가 딱이었다. 윤성근은 형들에게 제안했다. “방을 치워줄게. 책을 보... -
장르 안 가리고 신작 선호…관통하는 키워드는 ‘어둠’
장정일은 자신의 시 ‘삼중당 문고’에서 삼중당 문고에 얽힌 15살 시절의 추억을 이야기한다. 검은 교복 호주머니에 쏙 들어가는 삼중당 문고를 “개미가 사과껍질에 들러붙듯 천천히 핥아 먹은” 그는 “간행목록표에 붉은 연필로 읽은 것과 읽지 않은 것을 표시”했다고 회상한다. 대중문화평론가 김봉석(45)은 기자와 만나는 날 미국의 범죄소설 작가 레이먼드 챈들러의 을 들고 나왔다. 동서추리문고 103번으로 나왔으며 깨알 같은 글자가 세로로 쓰여져있다. 뒤편의 간행목록 밑에는 김봉석이 중학생 때 표시한 동그라미 혹은 동그라미 안의 엑스표가 보인다. 은 엑스, 는 동그라미, 는 엑스…. 보고 싶은 책은 동그라미, 구해 읽은 책은 엑스다. 말을 심하게 더듬었던 그는 세상에 대한 두려움, 열등감, 자괴감에 절어 있었다. 학교가 싫고 친구도 없었다. 어떤 사람이 되리라는 꿈도, 무언가 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도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도피’였고, 그 방식은 독... -
“시 속의 ‘칼날 같은 표현이’ 멋진 가사 창작욕 자극”
시는 원래 노래였고, 노래는 시였다. 무의미한 의성어로 점철된 요즘 노래들을 들으면 무색한 말이지만, 포크 가수 밥 딜런이 매년 노벨문학상의 유력한 후보로 꼽히는 데에서는 시와 노래의 접점이 드러난다. 이기용(40)은 록밴드 허클베리 핀의 리더이면서, 스왈로우라는 이름의 솔로 프로젝트도 병행하고 있다. 허클베리 핀으로는 5장, 스왈로우로는 3장의 음반이 나왔다. 그는 홍익대 앞 인디 음악의 전성기였던 1990년대 중반부터 꾸준히 음악을 해왔다. 한국대중음악상에서 올해의 앨범상, 모던록 앨범 부문상 등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명색이 음악인인 이기용에게는 음반보다 시집이 더 많다. 음악 하기를 열망하던 20대 중반에도 음반은 빌려 들어도 시집은 꾸준히 샀다. 새 책 살 돈이 부족했기에 헌책방을 샅샅이 훑었다. 그렇게 모은 시집이 1200권 이상이다. 요즘도 철이 바뀔 때마다 헌책방에 들러 2500~4000원 하는 시집을 30권씩은 산다. 덕분에 거처는 시집에 점령됐다.... -
‘책바보의 서가’에는 그리움과 희망이 꽂혀있지요
남편은 2만권의 책으로 남았다. 거실과 현관과 서재의 모든 벽에 세워진 책꽂이, 그곳에 두 겹으로 채워진 그 많은 책들. 신순옥(42)도 때론 책이 “징그럽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책벌레가 슬고, 종이가 변색하고, 이사를 갈 수 없어도, 그 책들을 버릴 수는 없다. 신순옥의 남편은 지난해 7월 45세로 타계한 출판평론가 최성일이다. 뇌종양이었다. 2004년부터 수차례 수술과 회복을 반복했으나, 지난해 초 입원한 뒤에는 서서히 기력, 기억을 잃어갔다. 사랑하는 두 아이와 아내, 친구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고, 자신의 이름도 잊었다. 최성일은 애서가였다. 아니 ‘책바보’였다. 책을 보기 전에는 꼭 손을 씻었다. 술도 모르고 돈도 몰랐지만, 책에는 욕심을 냈다. 그러면서도 필요한 책은 얻거나 빌리기보다는 사서 보았고, 필요한 사람에게 책을 내주길 주저하지 않았다. 13년간 쓴 역작 을 비롯해 등의 저서를 남겼다. 최성일의 국문과 3년 후배였던 신순옥은 ... -
건국대 의대 하지현 교수 - ‘미녀와 야수, 그리고 인간’(김용석 지음)
1990년대 어린이 관객에게 사랑받은 디즈니의 장편 애니메이션 <인어공주> <미녀와 야수> <알라딘> <라이언 킹>을 하지현(45) 역시 잘 알고 있었다. 한창 애니메이션에 빠져있을 나이였던 아이와 함께 본다는 핑계를 대긴 했지만, 사실 하지현도 애니메이션의 팬이기 때문이다. 하긴 아이와 함께 보다가 <스폰지밥 네모바지> <보노보노> <로보카 폴리>의 팬이 되었다는 부모가 꽤 있다. 2000년 막 정신과 의사로 발을 내디딘 하지현은 우연히 한 권의 책을 접했다. 당시 한국에선 무명에 가까웠던 철학자 김용석이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분석한 <미녀와 야수, 그리고 인간>(푸른숲)이었다. 라캉, 프로이트를 들먹이며 “계통 없는 정신분석”을 시도하는 문화비평에 질려있던 하지현은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읽고 나서는 “머리를 맞은 것 같았다”. 그때 한국의 글쟁이들 사이에서 영화는 ‘담... -
서평가 금정연 - 보네거트의 ‘타이탄의 미녀’
‘우주적 농담’을 들어보았나. 텔레비전 코미디 프로그램의 말놀이나 정치풍자 말고, 술자리에서의 야한 우스갯소리 말고, 거대한 우주를 배경으로 삼은 웃음 말이다.너무 큰 것은 보이지 않는다. 행성 ‘크로노 신클래스틱 인펀디블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지구인들이 알게 뭔가. 커트 보네거트(1922~2007)의 소설이 한국에서 큰 인기를 누리진 못하는 것도 그의 ‘우주적인 스케일’ 때문인지 모르겠다.그래도 보네거트의 작품 중 가장 잘 알려진 이나 정도면 모르겠다. 하지만 (2003·금문서적)는 들어본 이가 더더욱 드물게다. 1959년 나온 이 책은 보네거트의 두번째 장편소설이다. 현재 한국에서 는 절판 상태다. 지난 9일 서울 정동에서 만난 서평가 금정연(31)은 샛노란 표지의 를 들고 나왔다. 표지 가운데에 날개를 단 정체 모를 여자의 그림이 그려져 있어, 지하철에서 꺼내들기엔 민망해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다. 3~4번을 읽었다는데 밑줄 하나 친... -
“22살의 작가가 서투름 속에 쓴 고민하는 진동 느껴져”
정혜윤(43)은 기억도 안 날 만큼 오래전 어느 날, 알베르 카뮈의 을 읽었다. 카뮈의 스승이었던 장 그르니에의 글도 함께 읽은 때였던 것 같다. 이 책에는 그르니에가 가난한 카뮈의 집을 찾아 헤매는 부분이 나오고, 카뮈는 그런 스승에게 22세에 쓴 자신의 처녀작 을 헌정했다. 물론 정혜윤은 이른바 ‘세계문학전집’에 속하는 을 읽었고, 이나 도 좋아한다. 그러나 그는 자꾸만 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삶의 정수를 얻어낸다. 예를 들어 이런 문장.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죽음, 그러나 각자에게는 저마다인 죽음. 하여간, 그렇기는 해도 역시 태양은 우리의 뼈를 따뜻하게 데워준다.”역자 김화영은 이 “서투르고 불분명한 구석이 많다”고 이른다. 그러나 “그러한 한계가 때로는 우리에게 유별난 감동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고 재빨리 덧붙인다. “그 서투름 속에서 번민하는 젊음의 진동이 아직도 가라앉지 않은 채 우리의 영혼 속으로 직접 전달되기 때문”이다. 기실 ... -
정치의 계절에 읽는 ‘군주의 필독서’
위대한 저작은 때때로 예기치 못한 계기를 통해 더 널리 알려지거나, 그 명성에 위광(威光)이 더해지곤 한다. 다산 정약용의 가 그러하다. 조선 왕조 최고의 천재이자 불꽃 같은 인본주의 지식인의 대표적 저서인 이 책은 인본주의와는 전혀 무관한, 오히려 그 정반대였던 현대의 파시스트 통치자 전두환에 의해 다시금 조명됐다. 전두환이 대통령이었던 시절, 그가 해외순방에 나설 때 전용기의 서가에 ‘목민심서가 꽂혀 있다고 보도할 것’이라는 이른바 ‘보도지침’이 당시의 언론매체에 하달됐다는 사실이 밝혀졌던 것이다. 전두환이 실제로 를 읽었는지의 여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베트남의 국부 호찌민도 즐겨 읽었다는 이 책의 ‘정치적 효용성’을 전두환이나, 그의 참모들도 잘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울 뿐이다.동서고금을 통틀어 가장 탁월한 군주로 꼽히는 당 태종 이세민의 정치와 관련한 언행을 모은 는 또 어떠한가. 이세민의 포용력, 정치적 상상력, 위민정신, 중용과 화합의 통치술 등 그의 ... -
‘정의론’에 비추어지는 불의사회
해가 바뀌고도, (마이클 샌델)가 잘 팔리는 책 목록에 올라 있다. 사실 완독이 쉽지 않고, 샌델 교수의 강의를 토대로 살을 붙인 이 책이 고단하고 곤궁한 이 땅의 사람들에게 애독되는 것은 책제의 ‘정의’ 때문일 게다. 소위 정의 열풍은 지금의 우리 사회가 정의와는 멀고, 해서 정의에 대한 갈망이 강력하다는 징표이겠다. 책이 나온 지난해 현실에서 벌어진 너무도 많은 불의를 목도하면서 실로 정의로운 사회는 불가능한 것인가, 하는 관심과 열망이 정의 열풍으로 이어졌을 터이다.대체 정의는 무엇이고, 정의로운 세상은 어떤 것이며, 정의로운 사회는 어떻게 구성될 수 있는가. 솔직히 주요한 정의론을 소개 섭렵하면서 나름의 정의관을 도출하고 있는 샌델의 책만으로는 그 답의 고리를 찾기가 힘들다.그래서 책꽂이에서 뽑은 책이, 샌델 교수에 앞서 30여년 전에 역시 하버드대에서 ‘정의란 무엇인가’를 가르친 존 롤스가 1971년에 펴낸 이다. 은 인류 역사 이래 그 많은 선철들이 ... -
장자는 꿈에서 깨라고 했다
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중국 푸단대 교수 뤄잉밍(60)은 “정신의 절대적인 자유”에 이르는 것이 장자가 추구한 경지이며, “(어떻게) 초월을 실현해 자유의 경지에 도달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장자 철학의 핵심이라고 진단한다. 최근 출간된 (글항아리)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하지만 새로운 해석이 아니다. 익히 들어온 장자 해석의 범주에서 빗나가지 않는다.알려져 있다시피, 현재 전해지는 에는 33편의 이야기가 들어있다. 내편 7편, 외편 15편, 잡편 11편이다. 내편이 장자 본인의 글이고, 나머지는 ‘장자학파’로 부를 만한 후대의 글을 모았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물론 이마저도 확실치는 않다. 장자 본인의 저작으로 거론되는 내편의 글들도 후대에 기록되면서 윤색되거나, 새롭게 추가된 것이 있을 수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게다가 라는 텍스트가 ‘철학’의 뼈대를 ‘문학’이라는 외피로 보여주는 일종의 ‘이야기 모음’인 까닭에,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는 것도 특징이다.앞서 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