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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SNS시대, 인문학의 과제는 무엇인가
■ 집단지성이라는 알리바이바야흐로 SNS의 시대, 곧 사회적 네트워크 서비스의 시대다. 나는 물론 이 시대에 대해 지극히 ‘인문학적’으로 질문을 던져볼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인문학은 이러한 시대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아서 어떻게 바뀌고 있는가, 혹은 반대로 인문학은 이러한 시대에 어떤 효과를 미치면서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들 말이다. 말하자면, 마치 원래 ‘인문학’이란 것이 이러한 ‘시대적 현상’들에 대한 진단과 소화와 평가를 어쩌면 필연적이고도 의무적으로, 당연하고도 자연스럽게 수행하거나 반영해야 하는 학문이라는 듯이 말이다.그러나 인문학이 SNS의 시대라고 하는 어떤 ‘거대한 흐름’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언급을 하거나 의미를 부여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면, 그것은 인문학이 인간과 사회의 모든 현상들에 대해서 객관적이고 독립적이며 메타적인 층위에서 무언가를 규정할 수 있는 ‘당연한’ 위치에 있는 학문이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그러한... -
(11) 인문학은 과학에 자리를 내주어야 하는가
인간존재의 가치와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인문학이 학문으로서의 지위를 위협받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 아니다. 이미 베이컨과 데카르트의 시대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영국의 근대철학자 베이컨은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을 통해 과학의 실용적 위력을 강조하였고, 프랑스의 근대철학자 데카르트는 ‘진리의 절대 부동의 토대’를 찾는 급진적 학문 이념을 통해 기존의 모든 지식과 학문, 전통과 관습을 부정하였다. 거기에서는 절대적으로 확실한 진리를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모든 학문을 과학으로 환원한다?20세기 초 논리실증주의의 통일과학 이념은 이런 사상적 흐름의 극단으로 등장하였다. 논리실증주의는 지식의 유일한 토대로서 경험을 강조하며 과학적 방법에 의한 방법론적 통일을 주장하였다. 객관적으로 입증할 수 없는 것들은 지식의 영역으로부터 추방되었다. 형이상학은 물론 종교, 윤리학, 문학, 예술 등은 더 이상 지식으로서의 지위를 누릴 수 없게 되었다. 인문학이 학문으로 남을... -
(10) 번역된 언어가 우리가 느끼는 세계를 규정한다
번역과 번역자의 비가시성온라인이건 오프라인이건 우리가 서점을 방문하면, 어김없이 신간서적들이 눈에 띄고 그것을 클릭하거나 집어들게 마련이다. 이런 흔한 일상의 경험에서 가장 덜 주목받는 것 중의 하나는 책의 크기나 디자인, 가격이 아니라 바로 그 책이 ‘번역’된 책이라는 점이다. 얼핏 보아도 온라인 서점의 첫 페이지를 장식하는 책의 절반 이상은 번역서들이다. 그것이 누군가에 의해 번역되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임에도 어디엔가 꼭꼭 숨어버린다. 우리 문학이 노벨문학상에서 여러 차례 물을 먹고 나서야 누가 어떻게 번역했는지 겨우(?) 관심을 가질 뿐이며, 심지어 한·미 FTA 같은 국가경제의 명운을 가르는 조약의 진행과정에서도 정작 번역이 쟁점으로 떠올랐지만 누가 어떤 과정을 거쳐 그 중요한 조항을 옮겼는지 묻지 않는다. 우리의 시선은 번역자에 잠시 머무는 둥 마는 둥 하고 바로 원전과 원저자에로 나아간다. 이는 번역이라는 고도로 인문적인 활동에 대한 자각을 가로막... -
(9) 학문언어로서의 독일어는 사라졌는가
한 나라나 공동체에서 일상적 언어 외에 다른 언어가 학문적·문화적 세계의 교양어로 통용되는 것은 문화적 격차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문화적으로 선진적인 중심부의 언어가 주변부에서 교양어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에게 한문이 그랬던 것처럼, 서양에서는 오랫동안 라틴어가 학식 있는 지도층의 언어로 사용되었다. 적어도 로마 가톨릭 교회가 지배하는 서양 내에서는 라틴어라는 공통의 언어가 민족적 차이를 넘어서 문화적 세계의 통일성을 보장해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근대로 넘어오면서 라틴어는 그러한 보편적 교양어의 지위를 상실한다. 종교 개혁 이후 성경은 독일어·영어 등으로 번역되어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 사용되기 시작했고, 문학과 학술 서적의 출판에서도 점차 민족어가 라틴어를 압도하기에 이른다. 그것은 무엇보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로 책이 과거보다 훨씬 더 광범위한 독자 대중에게 접근할 수 있는 매체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독자를 실질적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책은 사람들이 ... -
(8) 트랜스내셔널 역사학은 민족사를 극복할 수 있을까
텔레비전을 켜니 한 역사학자가 나와서 조선 시대에 관한 강연을 하고 있다. 간간이 농담을 섞어 방청객의 웃음을 유도하는 것이 인문학 대중화 바람을 타고 적잖이 대중 강연을 해 본 솜씨다. 흥미롭게 시청하고 있는데 갑자기 귀가 의심스러워진다. “그래서 임금님은 어재실에서 하룻밤을 주무시고 난 뒤 망묘루에서 기다리고 계시다가 어도를 지나 정전으로 가시는 거예요.”가만 있자, 이게 뭐지? 우리가 지금 왕의 다스림을 받는 조선 시대에 살고 있나? 아홉 시 뉴스 앵커가 대통령의 동정을 보도할 때도 반말을 하는데, 민주화됐다는 개명 천지에 망해 버린 전제 왕국의 지배자에게 높임말을 쓰는 이유가 도대체 뭐지? 북한 방송이라도 본 듯한 착각을 주는 장면이지만, 주위를 잠깐만 돌아봐도 고개가 끄덕거려진다. 궁궐·동상 등 왕조의 유산이 백화점·멀티플렉스 따위 자본주의의 쇼윈도와 서울의 명소를 분점하고, 조선 시대 인물이 근대적 경제 주권의 상징인 화폐의 얼굴을 독차지한다.... -
(7) 인문학은 한국 영화를 어떻게 변화시켰나
죽음의 한 형식, 영화<천일야화>에는 현자 두반과 왕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치명적인 병에 걸린 왕을 현명하게 치료해 낸 두반은 왕의 대신들에게 모함을 받게 된다. 은혜를 입었음에도 그를 의심한 왕은 결국 그에게 죽음을 명한다. 두반은 죽기 전 왕에게 책을 건넨다. 아무 내용이 없는, 백지뿐인 책은 잘 떨어지지 않는다. 침을 묻혀 가며 책장을 넘기던 왕은 현자 두반의 목이 떨어지기도 전에 먼저 죽는다. 내용 없는 책은 곧 죽음이다. 누군가 태어나면 이야기는 시작되고 죽고 나면 끝난다. 거꾸로 말해 이야기가 시작되면 누군가 살고 끝나면 죽는다. 그런 점에서 영화는 죽음의 체험이다. 책을 펴는 순간 삶이 시작되듯 영화가 시작되면 한 인물은 살아있는 인격으로 관객에게 다가온다. 그리고 마지막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 그 삶은 증발된다. 그리고 다시 영화가 상영될 때 그 삶은 반복된다.이미지의 일회성과 반복성, 죽음과 재생 가운데 영화의 운명이 놓여 있... -
(6) 오늘날 시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시? 쓸모없는 언어집에 도둑이 들면 곁에 있던 막대기라도 잡고 휘둘러야 한다. 우리는 ‘언어’도 이런 식으로 사용한다. 위기에 처하면 다급하게 “도와 줘”라고 외치고, 생존권을 위협당할 때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하나하나 따져 묻는다. 그러니까 언어를 다른 연장들처럼 도구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도구란 늘 그것이 수행하는 기능을 통해 의미를 얻으며 그 기능을 상실했을 때 쓸모없는 것으로 버려진다. 그런데 어떤 이상한 언어가 인간의 역사와 함께해 왔다. ‘시’ 말이다. 이 언어는 도구처럼 일하지 않고 베짱이처럼 노래만 부른다. 예술가가 만든 항아리가 물을 담는 용도로 봉사하지 않는 것처럼 이 언어는 도무지 용도를 가지지 않는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쓸모없는 돌멩이를 어루만지는 수석가처럼 별다른 용도를 가지지 않는 시어를 입에 넣고 사탕처럼 굴리고 또 굴린다. 그러면, 시어는 경이로운 단맛을 우리 혀 위로 흘려보낼까? “이불 속에서 누군가 손을 꼭 쥐어 줄 때는 ... -
(5) 여성학은 ‘성폭력’을 통해 무엇을 말해왔는가
인문학과의 고즈넉한 만남을 통해 마음의 평정을 얻고 삶의 자양분을 보충하고자 기대한 독자들이라면, ‘성폭력’을 화두로 풀어가는 여성학의 이야기가 다소 어색한 모양새로 비쳐질런지도 모른다. 여성학은 역사가 길지 않은 신생 학문인 까닭에 대중과의 접촉면이 상대적으로 넓지 않았고, 적나라한 폭력의 실상과 대면하는 것이라면 언론의 사회면에 차고 넘치는 각종 엽기적인 범죄 사건들을 일별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단지 폭력의 잔혹함이나 범죄성의 여부를 논하는 것은 이 글의 의도를 벗어나는 일이다. 누구나 성폭력이 나쁘다고 말하며 이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1990년대 이후 우리 사회에서는 성폭력범죄를 처벌하고 가정폭력을 방지하며 성희롱의 피해를 구제할 수 있는 법제도적 장치들도 마련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별의 차이를 둘러싸고 발생하는 각종 폭력의 피해가 여성에게 집중되는 현실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더욱이 최근 수원에서... -
(4) 동양고전은 왜 처세로 읽히나
“동양철학하면 점 볼 줄 알겠네요?” “동양철학은 결국 자기계발 서적에서 찾아볼 수 있는 처세를 말하는 게 아닌가요?” 동양철학을 전공하는 사람은 이 질문을 받으면 얌전하던 사람도 흥분한다. 이 질문은 동양철학을 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반드시 ‘부정’의 단일 대오를 짓게 만들 정도로 불편하다. 그것은 미신(迷信)이기에 미덥지 않은 것일까, 아니면 미신(美信)인데도 아직 믿지 못하는 것일까 따져볼 가치가 있다.■ 동양철학의 자충수, 유학 중심성부정해도 다시 살아난다면 동양철학이 처세술로 읽힐 만한 빌미를 제공했다고 할 수 있다. 여러 가지 이유를 생각해볼 수 있지만 여기서는 동양철학의 다양한 흐름을 유학 중심으로 바라보려는 시각의 문제점을 살펴보자. 선진시대 하면 ‘제자백가’를 떠올릴 정도로 당시 학인은 사상의 자유를 맘껏 누렸다. 한제국 동중서의 사상 통일, 당송시대의 성리학적 도통론 그리고 조선 성리학의 교조화 등으로 유학은 동아시아 사회의 지배적 지위를 굳힌 ... -
(3) 운동으로서의 사회과학은 어떻게 되었나
■ 운동의 시대, 사회과학의 전성기‘운동으로서 사회과학’을 설명할 때 1991년 이후 오늘날까지 가장 큰 변화는 ‘마르크스주의의 퇴조’라고 할 수 있다. 애초 사회과학이 운동과 동일어로 사용되진 않았다. 하지만 1980년 광주, 시민군의 절대공동체, 이념적 급진화, 노학연대 그리고 보편적(유기적) 지식인을 통해 현실을 변화시키는 자원으로 사회과학은 자리 잡았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1980년대 마르크스주의(혹은 마르크스주의 사회과학)의 복원은 한국 사회를 어떻게 변혁할 것인가를 둘러싼 현실적인 과제 속에서 이뤄졌던 것이다. 사회성격 논쟁, 국가성격 논쟁, 계급론 논쟁 등이 의미 있던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이 점에서 정확히 규정한다면 ‘80년대 사회과학’이라고 칭함이 올바른 표현이다.사회과학의 시대인 1980년대에 한국의 비판적 지식인은 노동계급을 대변하는 보편적이며 실천적 지식의 생산자이자, 이들을 해방시키기 위한 사회혁명과 사회변혁을 구현하기 위한 예언자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