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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물질 자체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 가치는 인간이 임의로 부여하는 것…먼지 쌓인 수학교육용 모형들에 예술가의 시선이 활력을 불어넣다
■ 예술의 가치는 어떻게 생길까“이제 회화는 망했어. 저 프로펠러보다 멋진 걸 누가 만들어낼 수 있겠어?” 1912년 항공공학박람회를 다녀온 마르셀 뒤샹이 한 말이다. 뒤샹은 과학기술에 관심이 많았다. 이듬해 제작한 ‘세 개의 표준 정지장치’는 1m 길이 실을 1m 높이에서 떨어뜨려 만든 것이다. 땅 위에 널브러진 실의 모습이 작품이다. 길이의 표준인 ‘미터(m)’가 인간이 임의로 정한 것이란 사실을 예술적으로 비꼰 것이다. 뒤샹의 작품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는 얼핏 보면 계단을 걸어 내려오는 로봇의 연속 사진을 이어 붙인 것 같다. 시대를 앞서가던 입체파 작가들조차 이건 미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작품은 당시 문화적으로 이류 국가였던 미국에서 인정받는다. 틀에 박힌 유럽 미술에 염증과 열등감을 느끼던 미국 부유층의 가려운 곳을 긁어준 것인지도 모른다. 뜻하지 않은 관심과 환대에 용기를 얻은 것일까. 뒤샹은 1917년 뉴욕의 한 전시회에 작품 ‘... -
(25)유머란 어떤 일에 몰두하다가도 여유롭고 넓게 보며 균형을 잡는 힘…의견 차이 해소에는 유머가 특효약, 그것은 불편을 호감으로 바꾼다
■ 나는 유머감각이 깃든 진지한 글자를 좋아한다독어독문학과 전공 수업을 내 전공처럼 듣던 학부 시절, 후배들이 가끔 물어봤다. “왜 그렇게 독일을 좋아하세요?” 아마 진짜 궁금해서가 아니라 대화 공백을 메우려고 의례적으로 물어본 것일 터다. 여기에 심각한 답변을 하면 상대방이 얼마나 난처할까? 그래서 나름 배려한답시고 답을 하나 만들어냈다. “사실 제 피의 8분의 1이 독일인이에요.” 그러면 다들 수긍했다. 누가 들어도 말도 안되는 농담이므로, 나름 잘 작동한다고만 여겼다.한참 지나 문제가 생겼다. 저 낭설을 진짜 믿는 사람들이 나타났고, 심지어 퍼져나갔던 것이다. 다가와서 신기하다는 듯 내 얼굴을 요모조모 바라보다가 “정말 피의 8분의 1이 독일인이에요?” 반짝이는 눈빛으로 물어보면 난 어쩌란 말인가. 당연히 농담이지 그런 걸 어떻게 믿을 수가 있냐고 항변하니, 내가 웃지도 않으면서 천연덕스럽게 말을 했고, 듣고 보니 딱히 한국 토종처럼 생기진 않았으며, ... -
(24)단순한 기술적 보조물인 도구가 세상의 틀을 짜고 우리를 변화시켜…보이지 않는 도구인 ‘의식’의 혁명, 실제 도구의 혁명만큼 과학에 기여
■ 우리의 몸을 구속하고 생각에 영향을 미치다언어는 인간의 생각을 구속할 수 있다. 일본과 미국의 심리학자 이마이와 겐트너는 언어학과 연계해 흥미로운 연구결과를 발표한 바 있다. 영어에서는 가산명사와 불가산명사를 구분하지만, 일본어에서는 그렇지 않다. 셀 수 있는 가산명사와 셀 수 없는 불가산명사를 문법적으로 구분한다는 것은, 그 언어사회가 개체로 존재하는 사물과 물질의 경계를 뚜렷이 구분한다는 표시다. 영어권 화자는 영어의 이런 특성에 의해 물질보다는 사물, 재료보다는 모양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런데 이들의 실험에 의하면, 아직 한 언어를 완숙하게 습득하기 전인 4세 이전에는 영어권 어린이들도 일본어권과 똑같이 재료에 흥미를 보인다고 한다. 이 흥미는 4세 이후 일본인들에게는 그대로 남지만 영미인들에게는 사라진다.언어가 담을 수 있는 양상 제한적생각을 특정 방향으로 몰 수 있어타이포그래피는 텍스트를 구속소프트웨어도 인간의 행동을 제한... -
(23)자연과 생명의 완결된 복잡함을 미래의 조형은 끌어안을 것이다…‘단순화된 대상’이 불러일으키는 ‘복잡한 상상’이 주는 미적 쾌감
■ 복잡함의 디자인, 유기적 생명력의 경이로움요리스 라르만(Joris Laarman)의 뼈의자(Bone Chair). 호리호리하고 유기적인 곡선이 낯설다. 규칙은 잡힐 듯 말 듯 한눈에 파악하기 어려워 호기심이 생긴다. 일반적 감수성에서, 나의 공간에 들이기에는 다소 그로테스크하다. 하지만 나는 이 의자가 디자인의 중요한 이정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시대는 어떤 시대인지를 드러내면서 미래를 예측하게 한다.이 의자의 디자인에는 인체의 뼈가 성장하는 과정이 수학적으로 적용됐다. 이런 생명의 원리는 생물학 연구실에서 아주 복잡한 방정식을 통해 규명된 바 있다. 이 연구를 토대로 나무와 뼈가 성장하는 방식의 차이를 비교해보자. 나무는 튼튼하게 성장하기 위해 물질을 보탠다. 그러나 인간의 뼈는 무작정 무게를 보태기만 하면 생명활동의 효율이 떨어진다. 효율을 위해 때로 물질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성장한다. 그래서 뼈는 가운데 부분이 오목하다. 이런 진화적인 프로세스를 통해... -
(22)우편마차의 말발굽소리에 실연한 청년은 헛된 희망이 고동친다…담뱃대가 아니라 하셨죠, 담뱃대라는 ‘단어’로는 담배를 못 피우니
■ 오지 않을 편지를 기다리는 마음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보리수 아래 쉬고 떠난 청년은마차소리에 편지를 떠올렸을까다가닥다가닥 말발굽 소리가 다가온다, 피아노의 왼손 반주로. 우편나팔 소리가 울린다, 피아노의 오른손 전주로. 피아노 양손의 연주는 우편마차 소리에 맞춰 덜커덕덜커덕 뛰는 나그네의 심장 박동에 공명한다. 고동치는 마음을 안고 나그네는 노래한다. “거리 저편에서 우편나팔이 울리네. 왜 그렇게 길길이 뛰는 거니, 어떻게 된 거니, 나의 마음아?”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 연가곡 중 열세 번째 곡 ‘우편마차’의 도입부다. ‘겨울나그네’의 원제는 ‘빈터라이제(Winterreise)’. 라이제(Reise)는 ‘여행’을 뜻하지만 정처 없이 헤매는 내적 방황의 여정이라는 뜻에서 ‘나그네’는 원제의 심상을 잘 옮긴 적절한 의역이라고 생각한다.슈베르트는 빌헬름 뮐러의 연작시 스물네 편 전체에 곡을 붙였다. 슈베르트와 뮐러는 비슷한 나이에 요절, 생... -
(21)신체와 가까울수록 사물은 ‘구’가 된다…편평한 세상 깊숙한 곳에 ‘구’가 있다
■ 구(球)체적인 다차원벽 쪽 큰 가구는 대개 직각육면체책장 → 의자 → 주전자 → 찻잔 등우리 몸과 가까워질수록 둥글어져“주거 건축의 벽에 붙어 있는 큰 가구들은 대개 직각의 육면체입니다. 그런데 책장에서 의자, 의자에서 주전자, 주전자에서 찻잔 등 벽에서 멀어져 인간에게 다가올수록 점점 둥글어지죠.” ‘무인양품’의 일본 본사 디자이너가 강연에서 들려준 인상적인 통찰이었다. 이 강연의 내용을 떠올리며, 손을 동그랗게 오므려본다. 사과처럼 동그란 과일이 쏙 들어오게 생긴 모양이다. 모든 과일이 구(球)의 형태인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원에 기반한 형태가 대부분이고 각진 과일은 별로 없다.과일은 왜 둥글까? 진화생물학에서는 번식 때문으로 본다. 인간과 동물이 열매 속 씨앗을 섭취한 후 이동해 퍼트려야 번식에 유리하니 먹기 좋고 다루기 편한 형태가 된 거라고도 한다. 구는 부피 대비 표면적이 가장 작은 입체 도형이다. 과일은 구의 형태일 때 껍질이... -
(20)획일적 기준으로 산출된 평균 속에서 개인의 다채로운 고유성은 소외된다…평균이 집단을 대표하지 못하는 사회, 해답을 찾는 집단지성이 민주주의다
■ 모든 어린이는 고유하다일본과학미래관서 열린 체험 전시우주선 모형 둘러싸고 각자 스케치남들의 평가 따위는 아랑곳 않고즐겁게 참가하는 과정 자체에 의미‘디자인 아(あ)’ 전시에는 이름 그대로 ‘아(あ)’라는 감탄사가 가득했다. ‘아아~’ ‘아?’ ‘와아아’ ‘아아하하하’…. 일본 NHK방송이 주최하고 일본과학미래관에서 열린 체험형 전시였다. 내게 인상적이었던 ‘아’의 순간은 일반인 참가자들, 특히 어린이들이 우주선 모형 하나를 동그랗게 둘러싸고 스케치하는 모습이었다. 그들의 스케치는 곧바로 전시장 벽에 프로젝터로 크게 디스플레이된다. 그림에 다소 서툴러 보이는 어린이들도 남들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즐겁게 참가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그 모습을 보며, 일반 교양을 위한 미술교육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생각했다. 능숙한 기술을 연마하기보다는 개인의 기분과 정서를 존중함으로써 공동체의 자존감을 높이는 방식이어야 할 것 같았다. 시도하고 실행해낸 ... -
(19)‘있는 그대로’ 이름에 담는 건 환상, 과학의 언어도 늘 과학적이진 않다…이름은 존재를 보장하지 못하지만 어울려 조화 이룰 때 의미를 얻는다
■ 벌거벗은 이름거북이에게서 등 껍데기를 떼어내면? 독일어로는 두꺼비가 된다. 거북이는 독일어로 ‘쉴트크뢰테’다. ‘쉴트’는 방패처럼 단단한 껍데기, ‘크뢰테’는 두꺼비라는 뜻이다. 거북이와 두꺼비는 생물학의 분류상 그리 가까운 동물들은 아니지만 독일어 덕에 거북이를 보면 한번씩 웅크린 두꺼비가 떠오른다.지구 위 여러 언어들은 그 지역만의 생태를 품을 때가 많다. 한 토착어에서는 특정한 물고기와 나무가 같은 이름을 가지는데, 물고기가 그 나무의 열매를 먹기에 그렇다고 한다. 생물에 붙은 이름들 속에 그들의 관계가 네트워크로 얽힌 것이다. 번역을 하면 안타깝게도 이 관계망이 무너진다. 생물학의 라틴어 학명에서는 이런 각종 자연어들 속의 지역적인 고유성이 물러나고, 전 세계적인 통일이 이뤄진다. 과학적인 ‘명명규약’에 합치되어 공인된 이름만 국제 표준인 ‘학명’의 지위를 얻는다.과학적 명명규약 따른 이름도불가피하게 ‘해석’이 개입돼대상과의 관계에 ... -
(18)소리는 시간과 공간 모두에 존재, 우주 어디에도 완전한 침묵은 없다…불변의 공간을 깨뜨린 ‘첨벙’ 소리, 미술·음악, 함께 시공간을 구성하다
■ 소리로 연결되는 뜻밖의 공간들도쿠멘타(Documenta)는 독일 카셀에서 5년에 한 번 열리는 현대미술의 중요한 한 장이다. 2007년 도쿠멘타에서다. 커다란 검은 스크린 장막이 설치된 작품이 있었다. 그 앞에 바짝 다가서면 암흑 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 검은 장막 뒤편 여기저기로부터 불쑥 소리가 뛰쳐나왔다. 흘러나온 것이 아니라 ‘뛰쳐나왔다’. 시각을 박탈당하고 곤두선 상태에서, 그 소리는 청각보다는 온몸의 촉각으로 감각되었다. 그런데 미술은 조형과 시각의 영역이다. 청각과 촉각 등 다른 감각의 경험을 강화하기 위해 오히려 시각을 제거하다니, 이것을 미술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미디어아트를 전공하는 후배가 답했다. “‘공간’을 다룬 작품이잖아요. 공간이니까 미술의 영역이 맞죠.”학부 수업에서 수년 전에 지도한 시각디자인 전공 학생을 얼마 전 우연히 만났다. 이후 진로를 물어보니, 음성 사용자 인터페이스(VUI)를 세부전공으로 택했다고 ... -
(17)‘눈’으로 보고 ‘뇌’로 지각할 때 인간은 비로소 재질을 ‘감각’한다…인간의 감각을 믿지 말지어다, 진실은 감각과 의식 너머 있나니
■ 눈으로도 만져지는, 재질의 촉감속초로 겨울 바다를 보러 간 적이 있다. 자연에는 직선이 없다고도 하는데, 수평선은 하늘과 바다를 깨끗한 직선으로 가르고 있었다. 푸른 하늘과 더 푸른 바다, 그리고 그 경계의 수평선. 이 단순한 풍경이 눈에 보이는 전부였다. 복작대는 홍대 일대에서 생활하다가 탁 트인 단순한 시야에 맑은 공기와 물이 펼쳐지니 안도 어린 쾌감이 다가왔다.최소한의 요소로만 디자인한‘바르셀로나 파빌리온’에 가보니사진으로 본 것과는 사뭇 달랐다스페인 바르셀로나 몬주익 언덕 아래 위치한 미스 반 데어 로에(Mies van der Rohe)의 파빌리온에서도 바다의 수평선 비슷한 시원함이 펼쳐졌다. 바르셀로나가 그리 번잡한 도시는 아니었지만 더운 태양과 출장지의 몇몇 고민들 속에서 파빌리온에 들어서니, 탁 트인 단순한 시야에 시원하게 뻗은 직선, 직사각형 연못의 물, 벽과 기둥의 청량한 질감에 마음이 깨끗하게 뚫리는 것 같았다. 바르셀로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