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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와의 접촉은 ‘금기’인 사회, 익숙한 설정에도 신선한 분위기
여자와 여자의 세상스즈키 이즈미 지음 | 최혜수 옮김문학과 지성사 | 430쪽 | 1만8000원스즈키 이즈미의 단편 ‘여자와 여자의 세상’은 직관적인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여자들의 세상을 배경으로 한다. ‘여자들의 세상’에서 사는 고등학생 아사코는 어느 날 창밖을 보고 깜짝 놀란다. 집 앞에 남자아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남자는 거의 사라진, 전설적인 존재다. 남자는 특정 구역에 모여 있는데, 학교에서 견학을 가야만 볼 수 있다. 아사코는 친구 집에서 금지된 비디오로 남자를 본 적도 있다. 남자가 나오는 영화는 이 세계에서 전부 불법 비디오다(이 단편은 아직 비디오로 영화를 보던 1977년에 나왔다).남자아이를 본 아사코는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 아이는 매일 밤 집 앞을 어슬렁거리고, 아사코는 그 애와 은밀한 소통을 나누며 가까워지게 된다. ‘세계에서 남자(혹은 여자)가 사라진다면’이라는 가정은 이야기의 세계에서 드물지 않다. 장르라고 해도 좋... -
내가 ‘나’일 수 있는 곳은 저 너머에…그래, 이제 어느 쪽이 ‘진짜 집’이지?
문 너머의 세계들섀넌 맥과이어 지음 | 이수현 옮김하빌리스 | 244쪽 | 1만4000원“스미의 심장엔 난센스가 깃들어 있었어. 그래서 스미에게 열린 문은 난센스를 숨기지 않고 자랑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세상으로 데려갔지. 그게 스미의 진짜 사연이란다. 자유롭게 살 수 있는 곳을 찾았다는 것. 너희도 그래. 너희 모두가 그래.”섀넌 맥과이어의 <문 너머의 세계들>에 나오는 인물들은 마법에 대해 안다. 하지만 이 소설의 주요 배경이 되는 기숙 학교는 마법 학교가 아니다. 이 학교는 마법의 세계에 갔다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쫓겨난 아이들을 위한 곳이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현실 세계에서 태어나 쭉 살다가 어느 날 ‘문’을 발견하고 그 너머의 세계, 즉 마법 세계로 들어간 경험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다. 아이들은 모두 저마다 자신에게 딱 맞는 마법 세계로 빨려 들어가 그곳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가 갑자기 이유를 알거나 알지 못한 채 쫓... -
서늘한 10월, 트렌치코트를 입은 형사가 생각나지 않나요
형사 슈투더프리드리히 글라우저 지음|박원영 옮김레드박스|312쪽|1만2000원가을은 미스터리가 잘 어울리는 계절이다. 날씨부터 요상하지 않은가. 흐렸다 하면 금방 맑아지고, 추웠다 더웠다, 비도 아무 때나 내린다. 낙엽이 날리는 거리에서 트렌치코트를 입은 형사가 해결해야 하는 사건을 생각하느라 잠시 주변을 잊고 서 있는 모습을 떠올려보라. 비도 추적추적 내린다. 가을이 아니면 불가능한 장면이다.<형사 슈투더>는 1936년에 출간된 형사소설이다. 배경은 스위스의 작은 마을. 형사는 살인 사건의 범인을 쫓는다. 피해자의 죽음에는 여러 의문점이 있고, 형사는 마을 사람들을 탐문하면서 어두운 진실에 점점 가까워진다. 이런 이야기 구조는 너무 흔해서 추리소설의 팬이 아니라도 아주 익숙하게 느껴질 것이다. 가끔은 이렇게 뻔할 정도로 익숙한 패턴을 가진 클래식한 추리소설이 읽고 싶어질 때가 있다.슈투더는 클래식한 소설의 주인공답게 아주 클래식... -
정부의 작은 지원사업 ‘큰 효과’
메타버스의 유령곽재식 외 지음&(앤드) | 264쪽 | 1만4000원<메타버스의 유령>은 메타버스를 주제로 한 SF소설집으로 네 명의 작가가 참여했다. 곽재식의 ‘메타 갑’은 <메타버스의 유령>에 첫 번째 순서로 실린 단편이다. 4차원 그래픽 엔진 회사에 다니는 ‘김 박사’는 어느 날 ‘차세대그래픽진흥원’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는다. 전화의 내용은 박람회에서 선보일 프로그램 중 하나로 메타버스로 은행을 이용하는 미래의 모습을 살짝 보여줄 수 있는 프로젝트를 맡아달라는 부탁이다.차세대그래픽진흥원은 정부의 지원사업을 맡아 주관하는 기관이다. 김 박사의 회사는 진흥원에서 주관하는 지원사업에 선정되어야 정부 지원금을 받을 수 있다. 액수가 큰 지원금을 받지 못하면 회사는 운영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나는 IT 업계를 전혀 모르는 사람인데도 왠지 익숙한 기시감이 든다. 문화예술계에서도 그와 비슷한 일이 벌어지기 때문일 것이다.정부... -
인간이 동물에게 얼마나 잔인한가…무섭도록 선명하게 다가온다
사랑에 빠진 레이철팻 머피 지음·유소영 옮김허블 | 544쪽 | 1만8000원요즘 듣고 있는 희곡 수업에서 동물권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있었다. 그 시간의 과제는 ‘동물의 입장에서 독백 쓰기’였다. 나는 과제를 해보려고 시도하긴 했지만, 결국은 억지로 조금 끄적이다가 말았다. 식물하고만 친하게 지내던 인간이 진흙 덩어리처럼 생긴 외계 생물과 사랑에 빠지는 연애 소설도 썼던 내가 왜 동물의 입장이 되어 글을 쓰는 과제 앞에서는 그렇게 막막해졌던 걸까?실은 위화감이 날 굳어지게 했다. 인간은 동물의 머릿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 거의 무지하다. 동물은 인간처럼 말하지도 않는다. 동물을 의인화해서 어떤 말을 하도록 시킨다는 것이 나는 영 내키지 않았다. 의인화야말로 가장 인간중심적으로 동물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이 아닐까?그런 고민 중에 <사랑에 빠진 레이철>을 읽었다. 이 소설은 내가 품었던 협소한 생각을 SF의 방식으로... -
편견 깨는 반전 가득찬 이야기 뒤에 남긴 ‘희망’
가여운 것들엘러스데어 그레이 지음·이운경 옮김황금가지 | 476쪽 | 1만8000원서점에서 <가여운 것들>을 발견하고 ‘프랑켄슈타인의 포스트모던적 재해석’이라는 출판사의 마케팅 문구를 봤을 때 나는 이 책이 젊은 여성 작가가 야심을 가지고 쓴 SF일 거라고 지레짐작했다. 인공지능(AI) 버전 프랑켄슈타인이 나올 거라고 순간 확신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책을 사서 집에 와보니 내 짐작은 틀렸다. <가여운 것들>의 저자는 1934년생 남성 작가였다. AI나 로봇 같은 건 아예 나오지도 않았다. 편협한 예상이 빗나갔다는 걸 알게 된 나는 기분이 나빠져서 색안경을 끼고 팔짱까지 낀 채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1800년대 초반에 여성 작가가 발표했던 명작을 1934년생 남성 작가가 다시 썼다, 이거지? 어디, 어떻게 재해석을 해놨나 보자!’솔직히 말해서 아니꼬운 눈으로 소설을 읽어 내려갔지만, 이내 생각보다 재밌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 -
인간의 무료함이 빚어낸 생각·마음 그리고 소설
인간 의자에도가와 란포 지음·안민희 옮김북노마드 | 112쪽 | 1만원한 달 전쯤 한 책방에서 에도가와 란포의 단편선을 한 권 샀다.북노마드에서 나온 <인간 의자>였다. 얇은 책에 세 개의 짧은 소설이 실려 있어서 부담 없이 작가의 세계를 알아보기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첫 번째 순서로 실린 표제작 ‘인간 의자’는 서간문 형식 단편소설이다.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요시코’는 매일 오전마다 작업을 하는 책상에 앉아 팬들이 보낸 편지를 읽는다. 대부분은 평범한 팬레터이지만, 문제의 편지는 이상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요는 편지를 보낸 사람이 요시코에게 자신이 저지른 죄를 고백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동안 악마 같은 생활을 해왔는데 이제는 참회하고 싶어졌다고 한다.당신이 이와 같은 편지를 받았다면 계속 읽겠는가, 아니면 읽기를 그만두겠는가? 뭔가 불길하고 징그러운 느낌이 들어서 편지를 쓰레기통에 버리거나, 읽지 않은 채 경찰서로 ... -
남들과 좀 다른 존재일지 모르지만, 당신과 함께라면 괜찮다
바바야가의 밤린오타니 아키라 지음·이규원 옮김북스피어 | 204쪽 | 1만3800원키워드를 몇 가지 입력하기만 하면 그럴싸한 이미지를 만들어 주는 인공지능 기술이 한동안 화제였다. 만약 소설 분야에서도 그게 가능하다는 전제하에, 인공지능에게 <핑거스미스>를 일본풍으로 다시 써달라고 주문한다면 <바바야가의 밤> 같은 원고가 나오지 않을까?싸움을 좋아하는 여자(신도 요리코)가 야쿠자 조직에 납치당해 보스의 딸(나이키 쇼코)을 경호하게 된다. 보스의 딸은 대학에 다니는 아가씨인데, 학교 수업이 끝나면 신부 수업의 일환으로 꽃꽂이, 베이킹, 영어, 활쏘기 등을 배우러 다닌다. 아가씨와 보디가드는 처음에는 서로를 낯설어하고 경계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상대방에게 애정이 생긴다. 그러다 아가씨의 아버지인 보스와 보스가 억지로 맺어준 악질의 약혼자로 인해 아가씨와 보디가드는 위기에 처한다. ‘보디가드’를 ‘하녀’로 바꾸기만 하면 정말 <핑거스... -
누군가와 연애를 할지 대충 알 듯…뻔한 이야기에도 일렁이는 맘
이별에 보내는 편지브리지드 캐머러 지음·이은선 옮김 창비 | 456쪽 | 1만6000원봄은 로맨스의 계절이다. 사방에서 꽃이 피어나 거리가 밝아지고 바람이 부드러워지면 괜히 새로 산 옷을 입고 외출하거나 좋은 사람과 손을 잡고 데이트하고 싶어진다. 새 학기가 한 달 반 정도 지난 지금은 곳곳에서 캠퍼스 로맨스가 피어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도 해본다. 하지만 사실은 안다. 요즘 젊은이들이 낭만적인 연애에만 푹 빠져 지낼 만큼 한가하지 않다는 걸. 연애보다는 당장 코앞에 닥친 중간고사나 이번 달 식비가 시급한 문제일 거다. 그러나 사랑하고 싶은 마음까지 사람들의 마음에서 사라진 건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직장인 커뮤니티에는 매일 연애하고 싶다는 글이 올라온다. 어느 학교에서는 어느 반의 학생 둘이 사귀는가 안 사귀는가가 가장 뜨거운 화제라고 한다. 학생들 사이에서 뜨거운 화제일 뿐만 아니라, 선생님들 사이에서도 그게 가장 큰 화제다(그 학교에서 일하는... -
‘기계 속 유령들’ 손에 세계의 운명이 달렸다…이게 뭔 소리인가 싶지만, 여전히 사랑
신들은 죽임당하지 않을 것이다켄 리우 지음·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400쪽 | 1만6000원켄 리우의 첫 번째 단편집 <종이 동물원>을 읽었을 때는 그의 단편들이 누구나 무난하게 좋아할 법한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테드 창의 직계 후손 같다고 할까? 이렇게 말하면 시큰둥해 보이겠지만, 나는 켄 리우의 단편들이 정말 좋았다. 그런데 이번에 나온 두 번째 단편집을 읽어보니 켄 리우는 의외로 대중적인 방향보다 SF 마니아층을 위한 소설을 쓰는 쪽으로 가고 있는 것 같다.따뜻한 사랑이 강조되었던 첫 번째 단편집과 달리 두 번째 단편집으로 묶인 작품들은 꽤 날이 서 있다. 그만큼 세계가 더 엉망이 되어 버렸기 때문일까? 두 번째 단편집은 전쟁과 경제 대공황, 환경파괴 등에 대한 불안과 경고로 가득 차 있다. 그가 바라보는 지구는 눈을 가린 말처럼 멸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이번 단편집에 수록된 ‘포스트휴먼 연작’은 작가 스스로 그런 질문을 던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