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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사 첫 ‘통사성격의 연대기’로 큰 가치
2003년 4월부터 연재를 시작한 ‘실록 민주화운동’ 기획 시리즈가 지난달 31일 96회를 마지막으로 2년에 걸친 대장정의 막을 내렸다. 이 시리즈는 1970~90년 기간중 한국의 민주화세력이 군부독재정권의 폭압에 맞서 치열하게 전개한 민주화투쟁을 주요 사건이나 인물 중심으로 정리한 언론 최초의 기획이었다. 경향신문은 시리즈를 마무리하며 기획의 의의와 성과를 되새기는 결산 좌담을 마련했다. 좌담에는 이번 시리즈의 주요 기획·집필자인 유시춘(소설가), 이우재(자유기고가), 김남일(소설가)씨 등 3명이 참여했으며, 본지 박노승 논설위원이 사회를 맡았다. -사회=이번 시리즈는 한국의 민주화운동이 초창기에 어떻게 싹이 터서 어떤 과정을 거쳐 전개됐으며, 그 성과는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데 초점을 맞춰 기획됐다. 민주화운동사 정리로는 우리나라 최초의 시도라고 할 수 있는데, 시리즈의 의미를 정리한다면. ▲유시춘=우리 민주화운동의 역사도 전태일 분신이나 3... -
96. 이태영과 가족법 개정운동
2005 년 3월2일 국회 본회의의 의결로, 남녀차별의 상징이었던 호주제가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다. 여성운동계가 반세기에 걸쳐 펼쳐온 가족법 개정 투쟁이 대미(大尾)를 장식하면서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오랜 역사를 통해 유지·강화된, 그리고 효율적인 식민통치를 위해 일제에 의해 법률로 더욱 고착된 대표적인 가부장제가 21세기 정보사회에 이르러서야 폐기된 것이다. 호주제가 폐지됨에 따라 이제 여성들은 ‘시집을 가는’ 것이 아니라 ‘결혼을 하게’ 됐으며, 대물림을 위해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강박의무로부터도 벗어났다. 한국은 적어도 법률상으로는 양성평등 사회로 전환한 셈이다. 이 길고 험난한 투쟁과정에서 우뚝한 존재가 있으니, 여성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최전방에 선 이태영이었다. 그는 어느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던 여성문제에 처음 눈을 뜬 여성 지식인이었으되 평생 민중적 가치관을 견지한 운동가였다. 배우지 못하고 가난에 허덕이며 멸시와 냉대 속에 불우하게 살아가는 여... -
95. 전노협 출범
1987년 대투쟁을 통해 대중적 기반을 비약적으로 넓힌 노동운동은 이후로도 양적·질적 발전을 계속해 나갔다. 양적인 면에서는 노조 결성이나 어용노조의 민주화 흐름이 지속돼 87년 말 4,103개이던 노조 수가 89년에는 7,883개로 늘어났고, 조직 노동자 규모도 89년 말 1백93만명을 넘어서 87년의 거의 두 배에 이르렀다. 이런 양적 성장의 토대 위에서 민주노조운동의 조직성과 통일성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이 자연스럽게 형성됐다. 서로 경험을 공유하고 힘을 합하지 않으면 개별 기업 단위의 조직으로는 스스로를 지키기도, 조직을 발전시키기도 힘들다는 것을 깨달은 때문이었다. 88년 상반기의 임금인상 및 단체협약 체결 투쟁, 현대엔진을 비롯한 선진적 노동조합에 대한 탄압을 저지하기 위한 공동투쟁과 맞물려 진행된 이런 흐름은 지역별·업종별·그룹별 노조협의체를 구성하는 방식으로 전개됐다. 일반 제조업 노조들은 87년 12월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마창노련)이 최초로 결성... -
94. 전교조 출범
우리의 근대적 학교 교육체제는 해방 이후 형성됐다. 일제시대에도 형식상의 근대교육은 있었으나 대중의 이익과는 동떨어진 소수 엘리트 양성에 그쳤고, 그나마 식민지배의 통치전략에 따라 이루어졌다. 미 군정기와 이승만 정권, 4·19 이후의 제2공화국, 5·16 군사정부와 제3공화국, 유신정권, 제5공화국을 지나는 동안 우리 교육은 미국의 외형과 체제를 그대로 이식받으면서 강력한 국가통제 아래 정치적 예속이 심화되는 과정을 밟았다. 1960년 4·19 혁명과 더불어 전국의 교사들이 교원노조 운동을 전개했다. 5월 결성대회 이후 전국의 지부가 왕성하게 조직돼 61년 초에는 조합원 4만명으로 노조 가입률이 50%를 넘어설 만큼 열띤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5·16 쿠데타로 자주적인 교사운동단체는 다른 사회운동단체와 마찬가지로 초토화되고 간부들은 대부분 용공 혐의로 투옥당한다. 민주화의 토대가 허약한 사회구조 속에서는 교육운동 또한 독자적으로 존립하기가 힘들다는... -
93. 남북 작가회담의 무산
1989년 3월27일, 시인 고은이 가래 섞인 듯 낮지만 지극히 선동적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늘, 우리는, 역사 앞에, 죄인입니다. 반세기 민족분단의 비극을 깨뜨려 보려는 우리의 순수한 노력을, 저들은, 무참히 짓밟고 말았습니다. 읽겠습니다.” 시인은 버스 창밖으로 몸을 내민 채 기자들 앞에 대고 ‘남북작가회의 예비회담 원천봉쇄를 규탄한다!’는 제목의 성명서를 읽어내려갔다. 서울 마포경찰서 안마당이었다. “8·15 직후 조국의 분단을 눈 앞에 두고 몸을 던져 절규하던 선열들의 목소리가 다시금 귓가에 쟁쟁히 되살아나는 듯한 오늘날 우리는 온 민족의 통일 염원을 두 어깨에 짊어지고 남북작가회의에 나가고자 하였다. 이는 민족자주, 민주, 통일의 대의에 입각하여 민간 주도의 남북교류를 실현함으로써 영구 분단을 거부하고 민중이 주체가 되는 진정한 평화통일에의 길을 열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이러한 충정은 정부당국에 의해 무참히 짓밟히고 ... -
92. ‘통일의 꽃’ 임수경
1989년도 각 대학 총학생회장 선거의 뜨거운 이슈는 단연 그해 평양에서 열리는 ‘세계청년학생축제’ 참여문제였다.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는 88년 12월28일 대한적십자사를 통해 북한의 학생위원회가 보낸 축전 참가 권유 서한을 받고 한달 뒤 공개적으로 수락 의사를 밝혔다. 정부가 이미 ‘7·7선언’에서 북한을 같은 민족공동체로 인정하고 경제·문화 전반에 걸쳐 교류협력하려는 의지를 밝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때 평양축전 참가를 허용할 듯하던 정부는 돌연 태도를 바꿔 6월6일 참가 불허 방침을 밝혔다. 이 축전은 2차대전 직후 항구적 세계 평화를 도모한다는 취지에서 영국 런던에서 열린 ‘국제청년학생회의’로부터 시작된 행사다. 체코·동독·루마니아 등 동구권 사회주의 나라와 핀란드·오스트리아 등 중립국들이 축전을 이미 개최했으며 85년 모스크바 축전에 이르러서는 157개국 2만여명이 참석한 국제적 행사로 성장했다. 제13차 축전은 7월1일부터 8일까지 평양에서 ... -
91. 문익환 목사 북한 방문
1989년 3월25일 오후 조선민항기 P-814편이 북한 관문 순안비행장에 안착하고 문이 열리자 남한의 목사 문익환이 모습을 드러냈다. 백발이 성성한 그는 평양 도착성명을 낭독했다. “내가 밟고 가는 눈 덮인 들판길 조심하여 헛밟지 말지어다. 오늘 걷는 나의 발자취가 뒤에 오는 이의 표식이 될 것임에.” 1948년 4월 피로써 피를 씻는 동족간 참극을 막고자 김구가 온갖 방해를 무릅쓰고 스스로 38선을 넘으면서 읊은 서산대사의 시를 다시 인용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이 성명은, ‘하늘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윤동주와 ‘모든 통일은 선’이라고 외친 장준하의 마음으로, 비등점에 도달한 남북한 민중의 열망을 실현해 보고자 ‘존경하는 김일성 주석’과 진정으로 기탄없는 대화를 하러 왔노라고 선언했다. 윤동주와 장준하는 일제와 분단독재에 의해 숨진 그의 벗이었다. “한편이 이기고 한편이 지는 일이 아니라 우리 모두 승리자가 되는 길을 찾아왔다”는... -
90. ‘전사 시인’ 김남주
이제 아무도 혁명을 말하지 않는다. 체 게바라가 하나의 문화코드, 티셔츠에 새겨지는 하나의 문화상품이 되었듯이, 혁명은 이제 거대한 전지구적 자본의 총공세 앞에 무릎을 꿇고 만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한 시인, 생 전체가 혁명이었던 한 시인을 여전히 기억한다. 김남주(1946~94). 그 스스로는 시인이기에 앞서 전사이기를 원했다. ‘자기 땅에서 유배당한 자’(프란츠 파농의 책 제목, 김남주 역)로서 혁명은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남조선민족해방전선에 가담했고, 재벌 회장 집의 높은 담장을 뛰어넘었고, 체포돼 15년 징역형을 받았고, 끝내는 혁명의 길에서 사망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그를 더도 덜도 아니고 꼭 이 땅에 이런 시인 하나쯤 있어야겠다는 바로 그 시인으로서 기억한다. 김남주는 전라남도 해남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십년 이십년 남의 집 부자집 머슴살이였다/ 나이 서른에 애꾸눈 각시 하나 얻었으되/... -
89. 작가회의와 민예총
1987년 6월항쟁과 연이은 7~9월 노동자 대투쟁은 우리 사회를 밑바닥부터 뒤흔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혁명이 아니었다. 앙시앙 레짐(구체제)은 꼴만 바꾸었지 여전히 잔존했고, 새로운 전망을 논하기에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했다. 12월의 대통령 선거는 그런 사실을 정확히 증명했다. 노태우는 스스로 ‘보통사람’임을 내세워 보수층을 결집해 나간 반면 민주진영은 김대중, 김영삼, 그리고 백기완을 각기 후보로 미는 분열 양상을 보였다. 결과는 참담했다. 노태우는 황새와 조개가 다투는 틈을 타 대통령에 당선됐다.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노태우와 극우보수 세력에게는 코앞으로 다가온 88서울올림픽이라는 기막힌 호재까지 있는 반면 민주 진영은 선거 패배의 후유증에서 쉽게 벗어날 기미를 보이지 못하고 있었다. 문화운동도 마찬가지였다. 어제까지 한솥밥을 먹던 식구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어쩌다 마주치게 돼도 얼굴을 돌렸고, 패배의 책임을 서로 떠넘겼다. 문화일꾼... -
88.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씨 사망
1987년 8월22일 오후 1시. 3,000여명의 노동자와 1,500여명의 전투경찰이 대치해 있는 거제도 옥포관광호텔 앞 4거리엔 일촉즉발의 긴장이 흘렀다. 간밤의 치열했던 싸움을 증명이라도 하듯 거리에는 돌과 병조각이 어지럽게 나뒹굴었고, 메케한 최루탄 가스가 코를 자극했다. 멀리 옥포만의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감청색 작업복과 국방색 군복의 묘한 대비가 위기감을 고조시키는 가운데 호텔 안에서는 대우조선 노사 대표가 단체교섭을 벌이고 있었다. 회사측의 무성의와 지연작전에 지친 노조 대표는 최초의 요구안에서 몇 걸음 물러나 ‘기본급 2만원 인상, 현장수당 2만원 인상, 가족수당 1만원 신설’ 안을 제시하며 한껏 몸을 낮췄다. 그러나 협상은 또 다시 결렬됐다. 분노한 노동자들은 일제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호텔 로비에서 농성 중이던 노동자 가족들도 “사장 나오라”고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이 호텔을 향해 돌진하자 경찰은 최루탄을 난사했고 헬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