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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쓰는 독립운동列傳]“이승만박사 독재에 가려진 업적도 연구”
“나가서 싸운 사람만 독립운동 한 게 아니에요.” 하와이대 한국학연구소 이덕희 연구원은 “하와이 초기 이민 한인들은 임금 19달러 중 3분의 1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냈다”면서 “멀리 떨어져 몸으로 싸울 수는 없었지만 누구보다도 독립에 대한 열정이 컸다”고 말했다. 이연구원은 “하와이에서 독립운동이란 그런 것이며, 한인 누구나 독립 자금을 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고 설명했다. 그는 “특히 ‘사진 신부’로 이민 온 여성들도 애국심으로 큰 역할을 했다”며 “1913년 설립된 대한부인회는 삯바느질과 양복수선을 하며 돈을 모아 활동비와 독립 자금을 마련했다”고 전했다. 1919년 3월15일 창립된 대한부인구제회도 ‘독립운동하다 다친 사람과 죽은 사람(가족)에게 구제비를 송금한다’, ‘조국 독립을 위해 일한 사람에게 송금한다’는 내용의 헌장을 정하고 독립운동에 나섰다. 이연구원은 “중국 중경 한인 독립군단에 2,000달러, 독립운동 중 부상당한 이들... -
[다시쓰는 독립운동列傳]Ⅵ 미주편-3. 방치된 하와이 유적
미주지역 독립운동의 요람이자 전초기지인 하와이에서 독립운동의 염원이 구체적으로 펼쳐진 곳은 호놀룰루 시내다. 하지만 호놀룰루 시내에서도 외곽의 사탕수수밭처럼 한인의 자취를 찾기 힘들었다. 국민회·동지회 등 한인 단체들이 활동했던 건물은 형태만 간신히 남아 있을 뿐, 그곳이 유적지임을 알리는 조그만 표지 하나 없었다. 하와이 내 유일한 독립운동 박물관조차 문을 닫은 상태였다. 하와이는 미주지역 독립정신의 산실로서의 면모를 잃어가고 있었다. 하와이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한 기관은 대한인국민회다. 국민회는 1909년 2월 호놀룰루 밀러 스트리트 1306번지에 사무실을 차리고 활동을 시작했다. 회원은 4,000여명으로 해외 한인단체 중 최대 규모였다. 국민회는 ‘국민의무금’을 모집,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여러차례 독립운동자금으로 보냈다. 무장 항일투쟁 전선에 내보낼 군인 양성 운동을 펼쳤다. 1914년 설립된 박용만의 대조선국민군단·사관학교는 그 운동의 연장선상에 놓여 ... -
Ⅳ-2. 박용만과 국민군단
국외에 독립운동 기지를 설치해 독립군을 양성하고 이들이 일본과 혈전을 벌이는 것이 독립의 지름길이라는 ‘독립전쟁론’은 일제하 독립운동의 주요 사상 중 하나였다. 많은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만주, 연해주, 간도 등지에 기지를 만들어 무장항쟁을 벌였다. 미주지역도 예외는 아니다. 민족의 실력을 키우려는 교육·문화 운동, 국제적 지지·후원을 이끌어내려 했던 외교주의 노선과 함께 독립전쟁론도 미주 독립운동사의 큰 줄기였다. 미주 한인사회에서 무장독립운동을 주장하며 사관학교를 만들어 독립군을 양성한 이는 박용만(1881~1928년)이다. 그는 외교노선을 주장한 이승만과 함께 하와이 독립운동의 양대 거목이었다. 박용만은 고종 18년(1881년) 강원 철원에서 태어났다. 그는 한말 국내에서 애국계몽운동을 벌이다 24세때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1905년 미국 네브래스카주 링컨 중학교에서 영어와 대학예비과목을 공부하고, 이듬해 9월 헤이스팅스 밀리터리 아... -
“최하층민들 한푼두푼 모은 애국심에 감명”
미국 하와이대 역사학과 최영호 명예교수(75)는 미국 내에서 한인 이민사와 독립운동사에 정통한 몇 안 되는 학자 중 하나다. 하와이를 찾는 연구자들과 취재진을 위해 현장 안내와 자문을 도맡아 할 정도다. 하와이 아후이마누 마을의 대조선국민군단과 사관학교 병영 부지, 박용만의 활동 사진 등을 발굴해 알린 것도 최교수다. 하와이로 이민온 ‘사진 신부’와 이승만의 독립운동 등에도 조예가 깊다. 최교수는 1970년 하와이대 역사학과 조교수로 부임한 뒤부터 이민사·독립운동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한다. 그는 “처음에는 하와이 이민사나 독립운동에 대해 크게 관심이 없었다”면서 “하지만 누군가 반드시 정리해야 할 일인데 관련 연구자가 거의 없어 내가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연구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최교수는 연구를 진행하면서 특히 초기 이민 한인들에게서 큰 감명을 받았다. 그는 “사탕수수 이민자들은 우리나라에서 최하층 사람들이었으며 어떻게 보면 조국으로부터... -
[다시쓰는 독립운동列傳]Ⅳ미주편-1. 하와이의 이방인
해외 항일운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미주 지역이다. 이중 하와이는 미주지역 한인 이민의 시발점이자 미주 독립운동의 전초기지였다. 한말과 일제강점기 자의반 타의반으로 이역만리로 떠난 초기 한인 이민들은 저임금과 고된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임금의 상당 부분을 독립운동자금에 보탰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과 이봉창·윤봉길 의사의 의거도 미주 한인들의 재정지원이 뒷받침됐기에 가능했다. 안창호·이승만 등 거물급 독립운동가들이 이곳에서 한인단체를 만들어 조국 독립을 위한 선교·교육·외교활동에 매진했다. 박용만은 무장투쟁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경향신문은 지난달 미주 항일운동의 전초기지였던 하와이를 찾아 선조들의 뜨거웠던 조국애와 독립열망의 발자취를 확인했다. 기자가 하와이 호놀룰루항을 찾았을 때 항구 곳곳은 정박한 대형 컨테이너선과 대형 유람선들로 차 있었다. 해변의 대명사격인 와이키키 해변에서 자동차로 10~20분 거리의 호놀룰루항 또한 손꼽히는 미항으로 주요... -
[다시쓰는 독립운동列傳]김경천 친필 ‘경천아일록’ 공개
최근 홍범도기념사업회가 김경천의 항일 활동을 담은 자료를 공개했다. ‘경천아일록’(擎天兒日錄)이라는 이름의 이 자료는 김경천의 육필수기가 확실시되어 주목된다. A4용지 77쪽 분량의 이 문건에는 김경천이 출생한 1888년에서 1925년까지의 행적이 육필로 적혀 있다. 문건은 크게 두가지 형태인데 러시아에서 항일투쟁을 벌였던 1923년까지는 회고록 형식으로, 1924년 1월1일부터 25년 12월31일까지는 일기체로 작성됐다. 회고록은 출생에서 일본 유학, 만주 망명, 시베리아에서의 활동 등을 시대순으로 기록하고 있다. 간간이 김경천이 무장투쟁을 벌인 연해주 지역의 지형도, 전투요도 등을 그려넣어 이해를 돕고 있다. 특히 일본 유학을 가게 된 배경, 일본 육사에 들어간 경위 등이 자세해 그의 독립운동 전사(前史)를 알 수 있게 한다. 1909년 10월 동경 근교에서 군사훈련 중 안중근의 이토 저격 사실을 알리는 호외를 접하고는 ‘아! 위대하다. ... -
[다시쓰는 독립운동列傳]“보훈·연금 혜택 전혀없어”
김 발레리 비탈리예비치(51)는 김경천의 2남3녀 중 막내딸 지희씨(76·러시아 이름 지나)의 아들이다. 김경천이 카자흐스탄에서 활동할 때 태어난 지희씨는 현재 김경천의 직계 후손 중 유일하게 생존해 있다. 그는 지난 8월 광복 60주년을 맞아 재외동포재단 초청으로 처음으로 한국에 왔다. 체육교사 출신인 그는 카자흐스탄이 독립한 후 교사로는 생활이 어려워 요즘 택시운전을 하고 있다. “어머니는 강제로 카자흐스탄에 이주해 재봉틀로 자식(1남 1녀)을 키웠습니다. 생활은 매우 어려웠습니다. 지금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지만 어머니 시절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죠. 강제 이주후 정부에서 적은 돈을 주기도 했는데 주다 안주다 했을 뿐 아니라 금액도 일정하지 않았습니다.” 김 발레리의 어머니 지희씨는 김경천의 직계 2세 중 혼자 생존해 있지만 우리 정부로부터도 보훈이나 연금 등 아무런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 보훈연금이 아들, 그것도 장자에게만 이어지는 ... -
[다시쓰는 독립운동列傳]Ⅲ러시아편-5. 시베리아 항일영웅 김경천
“힘들게 살았지만 독립운동을 하신 외할아버지를 ‘마음속 영웅’으로 간직하며 항상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난달 광복 60돌 8·15를 앞두고 처음 한국을 찾은 김 발레리 비탈리예비치는 외할아버지의 나라가 결코 낯설지 않다고 했다. 카자흐스탄 태생인 김 발레리는 시베리아의 항일영웅 김경천(金擎天·1888~1942)의 외손자. 그는 “지금도 외할아버지는 많은 러시아 한인들에게 ‘김장군’이라는 이름으로 기억되고 있다”며 “고국에서는 할아버지를 아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김경천은 낯설다. 그러나 1920년대만 하더라도 그는 러시아 한인은 물론 국내 동포들에게도 독립운동의 영웅이자 ‘전설’이었다. ‘전설’이 ‘역사’로 기록된 것은 1990년대에야 가능했다. 한·러간 수교가 되고 유족의 증언들이 확보된 1998년에야 우리 정부는 그의 항일투쟁을 공인하는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김경천은 함남 북청에... -
재러동포 ‘마당발’ 손자며느리 최선옥씨
한달 반 만에 서울에서 다시 만난 최선옥씨(72)는 활기가 넘쳤다. 재외동포재단의 초청으로 4년 만에 한국을 찾은 때문이기도 하지만 “광복 60주년이라는 민족의 대축제에 초청을 받았다는 데에 감개무량하다”면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이 특별한 날을 고향땅에서 동포, 친척들과 보낼 수 있게 돼 기쁘다”며 “우리 순국선조들이 얼마나 위대한지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존경심이 솟아 오른다”고 말했다. 최씨에게 이번 방한은 재러동포들이 처음 한국땅을 밟은 1989년 이후 8번째. 영광스럽게도 ‘대한민국장’을 받은 의병장 허위를 시할아버지로 둔 때문인지 이미 한국에선 유명인사가 돼 있다. 보훈처, 재외동포재단 등은 주요 행사가 있을 때마다 다른 후손들에 비해 한국어 구사 능력이 월등한 그를 모셔오기 바쁘다. 최씨는 모스크바에서 ‘마담 뚜’로 통한다. 재러고려인협회 초대 회장이던 남편 허진씨가 1997년 타계하자 그 일을 최씨가 하고 있다. 그를 통하면 모스크... -
Ⅲ. 러시아편-4. 왕산 허 위
왕산 허위(1854~1908)는 구한말 정미의병 당시 ‘서울진공작전’을 주도한 의병 대장이다. 일제의 사전 봉쇄로 이 작전이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가 진격하려 했던 서울 동대문~청량리 구간은 1966년 이후 그의 호를 따라 ‘왕산로’로 불리고 있다. 왕산 옥사 후 구미 임은동 허씨 일족은 고향에서 일본 헌병과 순사의 등쌀을 견디지 못해 1915년 만주로 야반도주하다시피 망명길에 올랐다. 이들은 현재 국내·러시아·중앙아시아 등지로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다. 지난 6월 바로 그 왕산의 손자 며느리 최선옥씨를 그의 모스크바 자택에서 만났다. 최씨는 왕산의 셋째 아들 허준의 며느리요, 허준의 둘째 아들인 허진의 처다.그는 모스크바에 있는 독립유공자 후손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던 남편 허진이 8년전 갑작스럽게 뇌졸중으로 세상을 뜬 후 대모 역할을 맡고 있다. 최씨의 아파트 내부는 한국 전통식으로 리모델링돼 있었다. 한지를 바른 벽지와 한국 전통가옥에 쓰이는 문풍지, 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