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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세상 도처가 눈물겨운 고향, 돌아가야 할 집이었다
지난 6개월 반 동안 산을 넘고 물을 건넜다. 매주 2~3일 정도는 서울과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의 길 위에 있었다. 줄잡아 2만5000㎞는 돌아다녔으니 모터사이클을 타고 지구 반 바퀴 이상을 달렸다.제대로 야영을 하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돌이켜보면 지난 겨울의 폭설과 한파마저 정신 번쩍 들게 하는 길동무였다. 두 달 전에 진단 받은 늑막염의 통증마저 좋은 길동무가 되었다. 폐 속에서 700㎖의 흉수를 빼내고 난생 처음으로 아침마다 15알의 독한 약을 먹으며 두어 시간 뒤 붉은 오줌을 누는 것 또한 적어도 앞으로 6개월 동안 내 삶의 일부가 되었다.그동안 집과 집을 이으면 그것이 길이라 생각했던 것들을 수정해야 했다. 길이 곧 집이었던 것이다. 발길 닿은 곳이 길이자 집이었고, 하룻밤 머무는 그곳이 어디나 이미 도착해야할 집이었다. 때로는 뚜렷한 목적이나 목표도 없이 어슬렁거렸다. 난생 처음 말을 배우고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처럼 카메라 한 대와 볼펜 한 ... -
(26) 땅끝 해남의 시인들…김남주·고정희 그리고 김태정
아주 어릴 때부터 세상의 끝까지 가보고 싶었다. 걸어서 못 가면 모터사이클을 타고서라도 지구 한 바퀴를 돌아보며 이 세상의 끝까지 가보고 싶었다. 환멸을 넘어, 연민을 넘어 바람의 끝에서 다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날마다 백척간두진일보 (百尺竿頭進一步)의 자세로 살고 싶었다.그러나 너무 늦었다. 모두 헛꿈이었으며 언제나 제자리였다. 얼마만큼 왔나 돌아보면 그 자리 그대로였다. 멀리 지리산까지 빈손으로 와 14년 동안 살아봤지만 돌이켜보면 목줄 매인 흑염소처럼 매애 매애애 울며 산기슭을 뱅뱅 돌기만 했다. 이따금 밧줄이 고무줄처럼 조금 늘어졌다 줄어들었을 뿐 환멸과 권태는 그대로이고, 지극한 연민의 마을 초입에도 가보지 못했다. 애당초 그릇이 작아서인지, 열망의 절대부족 때문인지, 매사에 인내심으로 포장한 우유부단함 때문인지, 날마다 참회가 모자라는 후안무치의 맨얼굴로 차마 거울을 바로 보지 못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며 살았지만, 그마저 한 발 한 발 내디딘... -
(25) 세계 최대의 북 ‘천고’ 만든 이석제씨
살다보면 느닷없이 마른하늘에 천둥 벼락이 칠 때가 있다. 더 늦기 전에 사생결단의 때가 왔음을 스스로 깨달아야 하는데 늘 우유부단하다보니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라”는 경고로 천둥이 치고 하늘북(天鼓)이 우는 것이다. 몸의 위기, 마음의 위기가 아주 가까이 다가서고, 버나드 쇼의 묘비명처럼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는 말을 뼛속 깊이 새기기 전에 삶은 때로 분명하고도 명쾌해야 할 때가 있다.하지만 역천(逆天)의 기운 속에서 날마다 이명처럼 천고가 울어도 아직 그 뜻을 몰라 우물쭈물하고만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좀 더 분명한 하늘북소리를 듣고 싶었다. 충북 영동군 심천면 고당리 난계국악박물관 옆에 지난해 가을 첫 모습을 드러낸 세계 최대의 북 ‘천고’를 보러갔다. 이 북은 울림통 길이 6m, 폭 6.5m, 울림판 지름 5.5m, 무게 7t이 될 정도로 세계에서 가장 큰 북이다. 이 북을 만드는데 15t 트럭 4대 분량의 150년 이상 된 소나무 원목과 어미 소 4... -
(24)‘지리산 행복학교’ 그 이후
다시 봄이 왔다. 지난 겨울의 혹독한 추위와 기나긴 꽃샘 추위로 매화와 산수유꽃이 피더니 어느새 물앵두꽃이 벚꽃보다 일주일 정도 앞서 피어나기 시작했다. 하동의 특산물인 녹차 잎이 사상 처음의 동해(凍害)로 누렇게 마르는 등 시절이 하수상하지만, 그래도 봄은 봄이니 전국 곳곳에서 상춘객들이 몰려와 화개장터가 시끌벅적하다. 다음 주가 되면 화개동천(花開洞天)의 쌍계사 벚꽃 십리길이 환하게 열릴 것이고, 하동에서 구례까지 섬진강변 19번 국도와 861번 지방도가 ‘천상의 꽃살문’을 활짝 열어놓을 것이다.언젠가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너무 많이 맡은 꽃향기가 뇌 속까지 들어와 생각들이 온통 꽃무늬로 어른거리고, 내가 그대인지 그대가 나인지 너무 많이 본 꽃들이 몸속에까지 들어와 동맥과 정맥 속에 흐르고 있다.’ 봄날은 이렇게 가만히 앉아 있어도 온갖 향기가 코끝을 간질이니 몸과 마음이 자꾸 달뜨게 되는 것이다. 문득 언젠가 보았던 의 ‘장사화상이 봄기운을 느끼다(長沙春意)’가... -
(23) 낙동강과 한강의 발원지 황지연못과 검룡소를 찾아서
매년 3월22일은 유엔이 정한 ‘세계 물의 날’이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 문득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한다. 어릴 적 어머니가 장독대 위에 올리던 정화수(井華水)를 생각한다. 아직 이른 새벽 마을 사람들이 일어나기 전에 하내리의 찬샘에서 길어온 맑은 물 한 사발을 생각한다. 그 물은 신성한 생명의 물이었고, 고단한 육체와 정신의 온전한 활명수(活命水)였다. 돌이켜보면, 어머니의 정화수를 까맣게 잊고 살아온 날들은 ‘어미 아비도 몰라보는 후레자식’의 삶이었다.‘물의 날’에도 4대강 죽이기공사는 여전히 ‘용맹정진’ 중이다. 폐수정화처리장 등의 ‘살리기공사’는 보이지 않고 강의 내장이 온통 다 파헤쳐지고, 온몸은 토막토막이 난 채로 만신창이가 되고 있다. 4대강은 더 이상 생명의 젖줄이 아니라 단절의 시대, 불통의 시대를 대변하는 은유가 되었다. 신라시대 원효 스님은 해골바가지 속의 썩은 물을 마시고 깨달았다고 한다. 하지만 4대강이라는 거대한 해골바가지 속의 물을 보... -
(22) 보성공연예술촌 오성완·이당금 부부
한때 ‘미치지 않으면 미칠 수 없다(不狂不及)’는 말이 유행했다. ‘만약 네가 미치지 않는다면 결코 도달할 수 없으리라’는 뜻의 약여불광(若汝不狂) 종불급지(終不及之)를 줄인 말이다. 어떤 이는 “그 어디에도 출전을 찾아보기 어렵고, 한자를 모르는, 말도 안 되는 조어”라고 비판한다. 하지만 말이란 또 그렇게 시대적 배경 속에서 새로 태어나 회자되면서 생명력을 가지는 것이다.그런데 문제는 이 말의 본래 의도보다는 다국적 커피전문점 스타벅스의 최고경영자 하워드 슐츠의 명언인 것처럼 알려지면서, 자본주의시대의 출세 지향적 측면만을 부각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조선시대 지식인의 올곧은 내면세계와 결기는 고사하고 과정이야 어떻든 오직 ‘돈’으로 그 결과가 판가름나는 작금의 사태를 대변하는 뜻으로 축소된 것이다. 추사 김정희나 다산 정약용처럼 이치와 도리에 따라 천하만민을 위한 애민사상으로 학문을 탐구하고 펼치는 ‘광기에 가까운 열정’이 그들을 진정한 지식인의 반열에 오르... -
(21) 나의 로망 나의 삶, 모터사이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은 숨 쉬는 것과 더불어 걷는 것이다. 날마다 직립보행의 자세를 증명하며 누군가를 만나거나 무언가를 하기 위해 어디론가 걸어갈 수 있다는 것은 분명 행복한 일이다. 그 다음이 자전거를 타는 것. 꽃샘추위에 움츠리다 기지개를 켜며 대자연의 일부로서 더불어 살아 있음을 구체적으로 확인하는 깨달음의 시간이다.내가 생각하는 이 세상의 ‘탈것’들 중에 가장 매력적인 것은 모터사이클(바이크)이다. 일본식 영어인 ‘오토바이(이륜자동차)’라는 말이 널리 쓰이지만 안타깝게도 이는 오래전부터 ‘폭주족’과 ‘위험천만한 과부제조기’의 합성어인 ‘병든 말(言)’이 되었다. 해마다 3·1절이 되면 텔레비전 등의 매체들은 독립운동의 정신보다 ‘청소년 폭주족과 경찰들의 전쟁’을 더 강조하는 듯하다. 분명 이륜차 문화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해결보다는 사회적 약자인 일부 청소년과 생계형 택배기사들에게 반복해서 돌을 던지기만 한다. 기름값 폭등으로 서민들이 스... -
(20)봄이 오지 않는 낙동강
봄이 오고 있다. 조금 늦었지만 섬진강변 매화꽃들이 피어나고 강물 속으로 ‘봄의 전령’인 황어떼가 거슬러 오르고 있다. 화개장터 남도대교 아래 얕은 물살에는 성급한 낚시꾼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4대강 사업에서 조금 비켜난 섬진강에는 바야흐로 봄기운이 무르익기 시작했다. 그러나 섬진강변에 살며 예년처럼 나 혼자 가슴 설레며 봄을 맞이하기에는 너무나 미안하고, 슬프고, 불편하고, 참담했다. 대체 이 무슨 심사인가.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 ‘봄은 왔으나 봄 같지 않다’는 말이 절절하게 다가온다. 널리 회자되는 이 말은 원래 당나라 시인 동방규가 중국의 4대 미인(서시·왕소군·초선·양귀비) 중 하나인 ‘비운의 절세미인’ 왕소군의 처지를 읊은 시에서 비롯됐다. 왕소군이 국경을 지나 흉노로 붙들려 갈 때 슬픔이 물밀듯 밀려와 가슴에 품은 비파로 변방을 나서는 노래 ‘출새곡(出塞曲)’을 연주하자 하늘을 날던 기러기들이 잠시 날갯짓을 잊어 땅에 떨어졌다고 한다. 후대에 미녀를 지... -
(19) ‘늦깎이 화백’ 한숙자 할머니
‘아파야 철이 든다’는 말이 실감난다. 이전에는 조금 아프더라도 ‘고통은 몸의 일부’려니 생각하며 생의 한철 통증을 견디는 것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은 병원 문턱에도 가보지 않은 건강한 자의 교만이었다. 그러다 문득 ‘고통이 몸의 전부’가 되고 보니 공포가 밀려오고 보이는 세상이 달라졌다. 일단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존경스러워졌다. 이전에는 타락하거나 비굴해 보이던 이들마저 단지 더 오래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존재가치가 달라진 것이다.내 나이 스물에는 스물아홉 이후의 생이 없었고, 서른에는 또 서른아홉 이후가 없었다. 차라리 자살을 할지언정 구차하게 살지 않겠다는 오기이자 객기였다. 그러나 어느새 마흔아홉 살이 되었고, 지천명(知天命)의 문턱에서 왼쪽 폐에 구멍이 나고 늑막염으로 오른쪽 폐에 물이 차기 시작했다. 다행히 암은 아니어서 등 뒤에 주사기 호스를 꽂고 700㎖ 물을 빼내는 것으로 일단락됐다. 9개월 정도 꾸준히 약을 먹으면 완치될 수 있다고 하니... -
(18) ‘웃음 치료 전도사’ 시골 보건소장 김향숙
동해안과 영남지역의 폭설로 오던 봄이 한참이나 돌아선 듯하다. 하필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부터는 비가 와도 기상관측 사상 처음일 만큼으로 내리고, 눈이 와도 100년 만의 폭설이다. 옛날 같으면 이것만으로도 군주의 부덕을 문제 삼고, 군주는 ‘스스로 부덕의 소치를 장우’할 만한 일이다. 4대강 사업 등 대규모 국책사업들이 마치 기상이변 같으니 오히려 기가 차다 못해 불감증에 걸린 탓일까. 모두들 입술을 꽉 깨물고 있다.그렇다고 오던 봄이 돌아설 것인가. 마침내 섬진강 첫 매화는 피었다. 지난해보다 1주일 늦었지만 광양시 진월면 문암마을에 딱 한 송이가 핀 것이다. 이제 이 한 송이가 수천 수만의 꽃봉오리들을 일깨울 것이다. 아직은 날이 차지만 기운생동의 봄기운을 만났으니 ‘나 또한 그 기운을 전해야 할 터인데’ 하고 생각을 하다 문득 남해에 가고 싶었다. 남해 독일마을의 오춘자·빌리 할아버지를 만났을 때 유독 눈길을 끌던 사람, 매화처럼 환한 여인을 만나고 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