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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에필로그
■ 유신의 모더니즘, 그리고 오늘이 연재는 ‘박정희부터 선데이서울까지’ 즉 1970년대의 정치·사회·문화사를 새로운 각도에서 이해하고, 박정희의 유산이 여전히 남아 흘러넘치는 이 땅의 오늘을 헤쳐나갈 지혜의 일단을 함께 도모하고자 한다는 취지에서 시작됐다. 이 글들을 통해 얼마나 멀리, 저 전형화된 1970년대에 대한 서사와 이해로부터 벗어나는 데 도움이 됐는지 잘 모르겠다. 우리는 그 시대의 사회나 문화를 오늘의 모순에 닿은 물결의 저류로서 이해하며 새롭게 읽으려 애썼다. 특히 박정희 정권의 통치성, 대중문화의 성장과 민중의 저항, 유신의 생체정치와 성정치, 1970년대적 지성의 새로운 양식 등을 탐구하려 했다. 그러나 지면의 제약과 능력의 부족으로 그 시절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또 다른 항목들인 미디어, 성, 스포츠, 코미디, 스펙터클, 마약 같은 항목은 다룰 여유가 없었다. 추후 다른 기회를 통해 이에 대해 더 이야기를 나누게 되기를 기대한다. ■ 세상에서... -
(26) ‘저항의 시혼’ 김남주 20주기
지난 2월12일 경향신문 5층 강당에서 김남주 20주기 심포지엄이 열렸다. 문학평론가 염무웅은 기조발제 ‘역사에 바쳐진 시혼’에서 “군사독재와 외세 지배에 대한 불굴의 저항, ‘광주 코뮌’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짧지만 강렬한 해방의 경험, 그리고 이 경험의 민중적 확산을 통한 역사의 반전-이러한 광주항쟁의 정신을 온몸으로 전 생애에 걸쳐 살았던 인물로서 김남주를 빠뜨릴 수 없다는 것은 너무도 명백하다”고 말했다.전남대 함성지 사건과 남조선민족해방전선(이하 남민전) 사건으로 오래 투옥된 김남주는 1988년 전주교도소에서 나온 직후 “착취와 억압이 있는 곳에 시인은 항시 있어야 하고 저 또한 있을 생각입니다”라는 결의를 다졌듯 1994년 세상을 뜰 때까지 스스로 ‘전사’로 불리길 원했다.하지만 그가 세상을 등졌던 1994년조차 김남주의 뜻과는 달랐다. 김남주는 혁명적 조직을 원했으나 변해버린 현실과 그의 외침 간의 거리는 멀었다. 1988년 영어의 몸에서 자유로워진... -
(25) 기능올림픽
방송과 언론이 소치올림픽으로 들썩이는 것을 보니 다시 올림픽 시즌이다. 올림픽의 가장 강렬한 기억은 아마 ‘쌍팔년도 올림픽’일 것이다. 담배부터 고속도로, 심지어 탱크에까지 88이란 이름이 붙었고 금메달을 목에 건 자랑스러운 ‘대한의 자식들’이 텔레비전을 화려하게 수놓았다. 올림픽을 치르면서 한국은 구질구질한 1970년대와 작별하고 싶어 안달이 났었다. 주지하듯이 올림픽은 국가 간 경쟁의 글로벌 이벤트이다. 국가와 민족 단위로 편제된 국제질서는 1등부터 꼴찌까지 전 지구를 단일한 수직 계열화로 묶어냈고 올림픽은 그 질서의 상상적 재현 메커니즘이 되었다. 비슷한 것으로 월드컵이 있다. 양대 글로벌 이벤트에서 4등을 한 한국, 과연 선진국일런가.여기 선진국을 향한 또 다른 올림픽이 있다. 정식 명칭은 국제직업훈련경기대회쯤 되겠지만 기능올림픽이라는 별칭이 더 유명한 이 대회는 단연 한국의 독무대이다. 1967년부터 참가하기 시작해 1977년 최초로 종합우승을 한 이래 9연패... -
(24) ‘퍼스트레이디’ 육영수
현재 한국 대통령은 여성이다. ‘박근혜’라는 미혼의 자연인은 젠더로서의 ‘여성성’이 다가(多價)적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이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한국 가부장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그리고 여성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궁금하다. 아직 그가 ‘여성’으로서 발하는 (젠더적) 영향력은 거의 없는 듯하다. 한복이 새 패션코드가 됐다는 소식도 없다. 박근혜 후보가 지난 대선에서 51.6%의 득표율로 당선된 데에는, 국정원과 군의 성실한 몇몇 공무원들의 ‘개인적’ 여론조작 활동 외에도 50~70대 여성들의 몰표가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한다. 그들은 못된 며느리(?)를 연상시키는 이정희가 미워서, 또는 ‘엄마아빠 없이 자란 근혜가 불쌍해서’ 같은, 도저히 합리적인 정치적 선택의 근거로는 보기 어려운 이유를 대며 거의 ‘조직적으로’ 몰표를 던졌다 한다. 이정희 후보는 대선 후보 토론에서 ‘재수 없는’ 말빨과 총기(?) 넘치는 눈빛으로 박근혜 후보를 철저히 짓밟았지만, 그럴수록 ... -
(23) 연탄 파동과 에너지 정책
한국에서 연탄의 전성기는 박정희 통치기와 대략 맞먹는다. 연탄이 공장 및 산업 시설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10년대, 일반 가정에서도 쓰이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부터지만, 1950년대까지만 해도 연료의 주종은 신탄이었다. 1960년 당시만 해도 에너지 소비 중 나무와 숯의 비중이 63%를 웃돌았던 반면 석탄의 역할은 27%에 불과했다. 석탄 소비가 본격화하고, ‘연료로 사용하기 위해 석탄을 주원료로 하여 원주형으로 압축 성형한 구멍탄’, 즉 연탄이 가정용 연료로 각광받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부터다.아마 지금 40대 이상이라면 누구나 연탄에 대한 추억을 갖고 있을 것이다. 찬바람이 돌면 연탄부터 들이던 기억, 리어카나 지게로 나르던 기억, 연탄 가느라 한밤중에 오들거리며 방을 빠져나가던 누군가에 대한 기억. 겨울철이면 매일이다시피 연탄가스 중독 기사가 떴고 1년에도 여러 번 탄광 매몰 뉴스가 전해졌으며 박정희가 죽고 몇 달 후에는 사북에서 대규모 쟁의 소식이 들... -
(22) 유신 종말의 단초가 된 부마항쟁
■ 서울에서 온 가위1970년대 말 이화여대에서 조롱의 뜻으로 가위를 보냈더라는 소문이 1974년 이래 교내 시위가 끊긴 탓에 ‘유신대학’이라는 오명을 쓰고 있던 부산대에 떠돌았다. 부산대 학생들은 가위의 수신자를 자처하며 자괴감을 되씹었지만 이는 이 학교만의 일이 아니었다. 의원직에서 제명당한 김영삼의 지역구에 위치한 동아대도, 전직 대통령 경호실장 박종규가 장악한 경남대도 이 소문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거시기’를 잘라내고 싶을 정도로 이 지역 대학생들은 자신의 무기력에 자괴감을 느꼈고 자존심이 상해 있었다. 동시에 공분의 표출 방식을 생각하게 만들었던 것이 가위에 관한 소문이었다. 이 대학생들의 자괴감은 한순간에 부마항쟁으로 폭발한다. 1979년 10월16일 부산대에서 시작된 부마항쟁은 학생 중심의 민주항쟁 성격과 도시 하층민에 의한 도시 봉기의 성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어느 하나가 절대적이지 않았기에 두 성격은 부마항쟁의 짧은 기간에 혼재되어 있었... -
(21) 새마을운동과 뉴타운
2008년 4월 제18대 총선에서 서울의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한나라당은 무려 83%의 선거구를 휩쓸었는데 이는 보수 집권 여당의 승리로는 사상 최대였다. 이 놀라운 총선 결과의 원인은 무엇일까? 노무현 정권에 대한 대중의 반감이 크게 작용했을 테지만 직접적 이유는 ‘뉴타운 개발’이었다. 서울시장 이명박의 작품이었던 뉴타운 개발은 오직 경제적 욕망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뉴타운, 순 한글로 새마을이다.이 욕망의 열차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출발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아담과 이브가 첫 승객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 열차가 한국 농촌마을에 도착한 시점은 대략 1970년대 언저리가 될 것이다. 1970년대 한국 농촌에는 새마을 열풍이 몰아쳤다. 새마을, 영어로 하자면 뉴타운이다.새마을운동은 국가 주도의 농민동원 프로젝트로는 사상 최대 효과를 냈다고 보지만, 성공과 실패를 간단하게 정리하기는 애매하다. 공식적으로 새마을운동의 목표는 농촌 ... -
(20) 유신의 교육과 대중지성
유신의 모더니즘과 광속도 개발은 ‘새마을노래’가 읊는 것처럼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 “소득 증대 힘써서 부자 마을 만드”는 데서만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시기를 좀 넓게 잡아 1960~1980년대 개발연대에서의 가장 의미 깊은 개발과 그 큰 과실은 ‘인간 개발’이었다. 이 점은 정말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 시대에 우리는 말 그대로 세계 최고 수준의 ‘인적 자원’과 교육 인프라, 문화적인 수준과 지적인 깊이를 단숨에 갖추게 되었다.누적되어온 ‘포텐’(잠재력)이 터졌다고 해야 할까? 대중은 적어도 이 면에서는 지극히 자발적이고 적극적이며 한마음으로 ‘개발’에 동참했다(물론 딸들을 상급학교에 보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 못나고 가난한 가부장들이 여전히 많긴 했다). 물론 그 과정은 쉽지 않았다. 이는 온갖 제도적 불합리와 방해나 모순을 뚫고 진정 아래로부터의 힘으로 이뤄진 과정이었다. 배는 곯아도 공부는 해야 한다는 그 열의와 욕망은, 물론 ... -
(19)발굴의 시대 - 왜, 경주였나
지난 11월 취임 8개월 만에 변영섭 문화재청장이 교체됐다. 이유는 숭례문 부실 복구 등 문화재 보수사업 관리 부실이었다. 12월 박근혜 대통령은 경주 석굴암을 방문해 문화재 관리를 둘러싼 여러 우려에 대해 관계자들과 대화를 나눴다. 이 같은 문화재 보존에 대한 정부나 대통령의 관심은 유신 시기를 전후한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유신 시기 문화재의 발굴, 보존, 개발에 대한 정부의 지속적인 개입이 정권 붕괴 직전까지 이어졌다. 박정희 대통령은 10·26이 일어나기 이틀 전인 1979년 10월24일 경주 보문단지를 마지막으로 방문했다. 그는 건물 색조까지 하나하나 살피며 여러 사항을 지적했다고 한다. 오늘날 경주의 원형은 1968년 불국사 복원으로 시작돼 1971년 종합개발로 이어졌다. 정부의 대대적인 지원과 지시로 조성된 것이다. 박정희 정권은 왜 경주라는 장소에 주목했을까?1960년대 전반 박정희는 한국사를 타파해야 할 인습으로 봤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근대화가 ... -
(18) 다른 나라, 다른 지도자들 속에서
1960년대에 일어난 쿠데타 숫자는 세계적으로 119회를 헤아린다. 1961년 한국의 5·16 쿠데타는 그 숱한 사건 중 하나였다. 1970년대에 암살당한 국가 원수는 세계적으로 11명. 1979년 10월26일 박정희의 죽음은 그 가운데 하나다. 박정희와 그 시대는 한국적인, 유일무이한 사건이지만, 또한 동시대 세계사의 흐름 속에 위치해 있는 사건이기도 하다. 아마 박정희는 1960년대의 쿠데타와 1970년대의 암살이라는 기록을 동시에 보유한 지도자 중 가장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일 것이다. 2013년, 적어도 지금 연대를 기준으로, 한국의 5·16 쿠데타는 세계적으로도 성공적인 쿠데타였던 듯 보인다. ■ 낫세르·수카르노 등 롤 모델 삼은 ‘소장 박정희’1961년, 당시 45세였던 소장 박정희가 ‘혁명’을 일으켰을 때라면 상황은 달랐다. 박정희에게는 여러 명의 롤 모델이 있었다. 당시 이집트의 대통령이었던 나세르가 대표적일 테고,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며 싱가포르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