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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뿌리가 굵어지는 시간
아이를 학교에 내려 놓고 돌아오던 수요일 아침이었다. 첫 사거리에 들어서기 전 길가 쪽으로 차선을 바꿨다. 다음 사거리에 있는 고등학교로 등교하는 차들이 1차선으로 밀려들겠다 싶어 내 딴에는 빨리 지나가겠다 요령을 피웠다. 신호에 막혀 멀뚱히 길가를 보는데, 프랜차이즈 레스토랑 벽면 바닥에서 빨간 자루가 꿈틀거렸다. 고개를 들어 유심히 살펴보는데 젊은 남성의 몸이 자루 밖으로 불쑥 올라왔다. 그의 상반신은 알몸이었다. 빨간 자루는 슬리핑백이었다. 사내는 깔끔한 건물 담벼락 아래 슬리핑백에서 지난밤을 보낸 듯했다. 슬리핑백이 아무리 보온이 된다 하여도 맨살로 들어간 무모함에 놀랐고, 한뎃잠을 자야 하는 그의 가난에 당혹했다. 아무리 건물 밖이라 하여도 홈리스가 유숙하도록 놔두는 건물주의 관대함에 어리둥절하기도 했다. 나도 그 전날 밤 처음 히터를 켰다. 홈리스 셸터에는 그가 들어갈 침대가 남아있지 않았을 것이다.보이지 않던 가난을 목격한 순간이 착잡하여 그를 계속 훔쳐 ... -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 있고 천사는 낯선 곳에서 만난다
1년 전, 파리 지하철역에서 천사의 무리를 만났다. 비행기를 타고 대양을 건너 영국 요크로 갔고, 다시 기차를 타고 국경을 넘어 파리로 이어진 엿새간의 출장길이었다. 대담을 연재하는 중이었고, 4회분이 더 남았기에 가방에 보이차와 소화제, 청심환을 넣고 홀짝이고 털어넣고 오물거리며 매달리던 시간이었다.파리에서 마지막 인터뷰를 하던 날의 늦은 아침, 장소 변경을 알리는 e메일이 왔다. 공항 가기 편한 곳으로 숙소를 옮기던 날이라 오후가 되어서야 메일을 읽었다. 서둘러 지하철역으로 나갔다. 북역에서 몽파르나스에 있는 바뱅역까지는 갈아타지 않아도 된다고 구글지도가 알려줬기에 자신있게 들어섰고, 티켓을 사는 줄도 길지 않았다. 문제는 표 파는 기계였다. 영어가 없다! 약속 시간은 다가오고, 전 세계 티켓 무인발급기가 다르면 또 얼마나 다를까 싶어 대충 버튼을 누르니 다음 화면으로 넘어갔다. 숫자가 나왔다. 구간을 고르라는 주문 같았다. 하지만 역 이름만 알았지 구간 시스템을 ... -
성차별보다 민주주의? ‘억압의 틀 깨기’에 선후가 있나
지난 일요일 샌프란시스코 북부 해안가 젠센터에서 마지막 아침수업을 마치고, 다시 남쪽으로 내려갔다. 일요일마다 새벽 5시에 집을 나서 수강해온 다섯 번의 생태 강의였다. 한 시간 반을 달려 해를 맞았고, 골짜기에 내려앉은 해무를 어깨에 묻히며 연결된 생명들의 부지런하고 꾸준한 일상을 몸으로 감각하던 시간이었다. 그날은 집으로 돌아오는 걸음을 늦췄다. 빈 도심의 언덕길을 올랐다. 한 달 반 전에도 들렀던 건물의 건너편 언덕에 있는 작은 공원이었다. 그때는 이렇게 가까운 곳에 내 마음속 체기로 얹힌 위안부 소녀상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저 15분에 4달러나 하는 주차비에 허둥대며 일을 마치고 떠나온 곳이었다. 도심의 수증기를 죄다 말려버린 태양은 최초의 위안부 피해 증언자 강덕경 할머니의 오른쪽 어깨를 덥히고 있었다. 그 태양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필리핀 소녀는 엄지발가락에 힘을 실어 단상의 경계 너머 세상으로 진일보하려 한다. 치마저고리를 입은 조선의 소녀와 양 갈... -
환경을 생각하면…설거지는 세 바가지 물이면 충분했다
한때 미국서 울음 잦은 아이 잠재우려 수돗물 흥청 쓴적도 있다 세월이 흘러 몸도 그릇도 흐르는 물에 씻은 지 오래다 그 이유는 틱낫한 스님·브라운 스님의 ‘감화’에 영향인 듯하다‘지구에 덜 해로운 인간’된 지금의 내 모습에 입꼬리가 올라간다 글까지 썼으니 빼도 박도 못하고 ‘바가지 물 설거지’ 해야한다나는 빡빡한 수도꼭지가 좋다. 살짝만 들어 올려도 물이 쏟아지면 내 몸의 근육도 파블로프의 개처럼 반응하여 열릴까 움찔한다. 첫 조카가 태어나고 그 아이가 기저귀를 뗄 즈음, 언니가 반토막 낸 생수병을 아이 허리춤에 갖다 댔다. 온 식구가 아이 앞에 쪼그려 앉아 ‘쉬’ 소리를 냈다. 엄마인 올케언니, 할머니인 내 엄마, 고모인 나, 이렇게 세 명이 붙어 아랫배에 힘주어 ‘쉬’ 소리를 내도 이탈리아 꼬마분수처럼 아이 몸에서 물이 나왔다. 물소리는 그렇게 마음을 풀어준다.수도꼭지에서 콸콸 쏟아지는 물에 움찔하며 수압을 줄이는 멍에를 쓴 지 13년이 되었다... -
‘자연에 마음 열기’ 차별의 시대 인디언이 전해준 지혜
미국 선주민에 대한 글을 쓰겠다 작정하고 일주일을 끙끙대던 아침, 반갑게도 10년 전 일이 떠올랐다. 그제야 작년에 만난 선주민과의 대화를 쓰겠다면서 그들의 삶을 찢고 오려 내 생각의 콜라주에 맞춰 끼우려 했다는 것을 깨우쳤다. 10년 전에도 그랬다. 주먹만 하게 여문 오렌지가 초록색을 막 벗으려 하던 9월, 새크라멘토에 있는 루돌프 슈타이너 대학에서 발도르프 교사 양성 과정을 듣고 있었다. 유치원부터 초등학교까지 살펴보는 과정이었는데, 구구단을 발도르프 방식으로 배우는 수업이었다. 우리는 둥글게 서 있었고, 교수가 가운데에 서서 오자미를 던지며 “3, 3은?”이라고 물으면 한 사람씩 돌아가며 답하고 오자미를 되던지는 방식이었다. 놀이 같긴 한데 긴장감이 일었다. 바짝 긴장하며 내 차례를 헤아렸고, ‘4, 8은 32, 서티 투(thirty two)’ 등을 연습하며 앞질러 답을 준비했다. 그러다 7단 즈음에야 구구단의 이치를 터득했다. 구구단을 외운 지 30년 만이었다. 미리 ... -
‘최저임금 인상’ 현상은 복잡한데, 논쟁은 단순하게 끌려가고 있다
한국에서 벌어지는 논쟁이 발뒤꿈치를 쪼아댄다. ‘너는 왜 그동안 최저임금 인상을 주장했냐’고 닦달한다. 물론 아무도 내게 묻지 않았다. 내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모색을 하는지 주목하는 이는 한 줌 밀가루에 꼬일 개미 숫자보다 적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가장 약한 자들을 보살피면 혜택은 그보다 나은 모두에게 돌아간다”는 아리야라트네 박사의 말을 듣고 멍했던 4년 전의 나를 품고 산다. 이런 고백을 여러 번 내놓고 해왔기에 이 사안에 대해 설명할 것을 ‘셀프 강요’받았다.3년 전이었다. 우리 동네 목련이 속살을 벌리고 해맞이를 할 때, 새벽 비행기를 타고 어스름에 내린 보스턴에는 눈더미가 봉분처럼 쌓여있었다. 어둠이 자리 잡을 즈음, ‘지구를 생각하는’ 프랜차이즈 멕시칸 음식점을 찾았다. 저녁인데도 부리토를 말아주는 바에는 청년들 대신 아이가 셋은 있음직한 내 또래 여성들이 서 있었다. 나머지 직원들도 모두 유색인이었다. 내가 사는 캘리포니아의 도시 외곽 지점... -
당신의 자리에도 야생의 터가 우거지기를, 그리하여 품을 수 있기를
잿빛 펠리컨이 수면 위에서 펄럭인다. 갈매기 역시 하얀 몸을 휘저으며 부서지는 파도와 색을 맞췄다. 그중 한 마리가 작은 몸통을 쫓아 사납게 울었다. 자맥질을 가르치는 아비인가 싶었다. 찢어지는 울음으로 재촉했다. 자식을 키우는 포유류 어미로서 나는 몸집 큰 갈매기의 성마름이 거슬렸다. 그럼에도 해안가 벼랑 따라 안쪽으로 향하던 걸음을 늦추지는 않았다. 바다코끼리가 있다는 표지판에 홀려 마른 풀숲 사이 오솔길을 걷던 길이다. 벼랑 중턱, 길은 나무 울타리에 가로막혔고, 바닷물이 닿을락 말락 하는 먼 해안가에는 기다란 물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어느 거인이 벼랑 꼭대기에서 막 던져버린 마대 자루인 듯 꼼짝하지 않았다. 잠수함이 내질러 놓은 포탄처럼 육중하게 착륙한 덩어리였다. 둔탁한 바다코끼리. 거무튀튀한 몸뚱이가 해무 사이로 내려앉은 얄팍한 햇볕에 기대어 몸을 말린다. 꿉꿉한 여름, 온종일 빨랫줄에 널려 있어도 무겁게 늘어지고야 마는 솜이불처럼 가벼워질 줄 모르는 몸이었다. 나 역... -
이성이 살아있고 감성이 흐르는 곳…약점을 자랑할 용기가 생겼다
카멜협곡 밑바닥에 있는 타사하라 선원에는 어둠이 일찍 차올랐다. 달은 더 높이 있었다.센터를 에두른 산이 더 검은 실루엣으로 도량을 품게 하려는 듯 마당 가운데로 달빛을 쪼였다. 다소곳이 줄 서 있는 대중 속 금빛 머리칼 위로 연노랗게 맺혔다여름 사막의 마른공기는 스무 평 남짓한 법당에서 맥을 추스르지 못했다. 문지방을 넘자 바투 서 있던 100여명의 숨결에 눅진해졌고, 그만큼의 나머지 사람들이 틈을 메워 불경을 합송하자 맨살 위로 방울졌다. 서까래도 땀을 흘렸다.미국식 단기 출가, 템플 스테이, 선원 관광…. 뭐라 이름 붙일 재간은 없지만, 캘리포니아 카멜밸리에 있는 수행처로 떠났던 2014년 휴가의 마지막 밤을 잊지 못한다. 달이 뜨고 올려진 보름 법회(full moon ceremony), 영어로 이어지는 염불 속에서 돌아가신 이들을 기리는 내용이 들리고 나서야 음력 7월 보름, 백중(百中)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여름휴가 이야기를 하려 한다.... -
‘너나 나나’ 우리는 인간…소외·차별 당하는 모두가 난민 아닐까
만년설이 있다는 산으로 가고 있다. 마르고 마른 미국 서부의 여름을 가르며 달리는 길 위에서 내 몸 안의 수분도 가물어지고 있다. 오가는 데만 일주일이 걸리는 길이다. 그리하여 나는 이번주 <글로벌 아빠 찾아 삼만리>를 보지 못하였다. 꼭 챙겨 보는 EBS 다큐멘터리인데, 다음주에 몰아서 볼 생각을 하니 성에 차지 않았다. 마치 간장게장을 허겁지겁 입안에 밀어넣어야 하는 상황이라고나 할까. <글로벌 아빠 찾아 삼만리>의 주인공은 한국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 아빠를 만나러 오는 아내와 아이들이다. 내 눈길을 끄는 장면은 그리움을 달래며 일하는 아빠도, 남편이 보내온 돈을 고스란히 저축하며 생활비를 버는 애틋한 엄마도, 세상 귀여운 그들의 아이들도 아니다. 인천공항부터 길을 물으며 아빠에게 가는 아이와 엄마를 대하는 한국인들이다. 편집 효과일 수도 있겠지만 버스에서, 지하철에서, 길에서 그들을 맞는 한국인들은 하나같이 자기 일처럼 마음을 쓴다. 아빠... -
성소수자·이민자·여성…이들이 안전해야 내가 안전하다
정확히 10년 전이다. 미술관 주차장에서 우연히 몰리나를 만났고, 그녀의 바뀐 헤어스타일에 사로잡혔다. 아주 짧은 커트였다. 내가 스물네살이던 1990년대 중반, 영국 모던 록 밴드 크렌베리스의 보컬 돌로레스 오리어던에게 마음을 뺏긴 뒤부터 꿈꿔오던 헤어스타일이다. 몰리나에게 물었다. “나도 당신처럼 머리카락을 자르면 어떨까?” 몰리나는 핸드백에서 포스트잇을 꺼내더니 전화번호를 적기 시작했다. 즉각적인 행동에 당황스러웠고, 나의 어설픈 영어가 과한 의미를 전달했나 싶어 멈칫거렸다. 몰리나는 내 남편의 프로젝트 파트너의 아내였고 앞으로도 계속 볼 사이였다. 그저 나도 그런 스타일을 좋아한다고 표현하고 싶었을 뿐 자를 생각까지는 없었다. 미국 거주 6년차였지만, 미국인이 운영하는 미용실에 가본 적도 없었다. 비싸다고 들었던지라 엄두를 못 냈을뿐더러, 한인 미용실도 아쉬움을 곧잘 달래줬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견갑골을 덮는 긴 머리는 한번 질끈 묶으면 머리카락이 얼마나 자랐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