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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울어가는 지상파 드라마들의 악수
지상파 TV방송은 언론이면서 오락매체이며, 이를 대표하는 프로그램이 뉴스와 드라마이다. 그런데 이제 이 두 가지 축이 모두 심하게 불안한 양상이다. 최근 지상파 TV의 급격한 몰락을 한두 요인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모바일 등 새로운 매체의 급부상, 케이블 채널과 종편으로 확고해진 다채널 환경 등의 매체 환경 변화가 그 한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이 못지않게 최근 5년 지상파 방송들이 보도와 탐사의 발전을 가로막고 이로 인한 위기에 꼼수나 다름 없는 퇴행적 악수를 계속 두고 있는 것 또한 이유일 것이다.지상파 드라마들은 시청률이 높아도 존재감이 약한 드라마로 불린다. 드라마 중에서 여전히 최고 시청률을 유지하고 있는 일일극이 5년 전 막장드라마 논란을 마지막으로 이제 그런 논의에서조차 사라져버린 것은 주목할 만하다. 아침극은 이런 지 오래 됐고, 주말극 중에서도 8시 드라마가 종종 이렇다.그런데 이런 현상이 이제 드라마의 선두 경향을 이끌어왔던 주중 10시대 드라마에서... -
삶의 갑작스러운 밀도
딱 2년 전 이맘때였을 것이다. 다큐멘터리 연극을 준비하느라 변두리 나이트클럽을 가야 할 일이 있었다. 인터뷰 요청을 거절하는 K의 공연을 보기 위해서였다. K는 그가 태어난 지 100일이 되던 날, 아버지가 조작 간첩으로 몰려 체포됐다. 그의 아버지가 19년을 감옥살이하는 동안, 아들은 아버지와 어떤 연관도 갖고 싶지 않아 노래를 불렀고 아버지는 아들이 보고 싶어 감옥에서 노래를 불렀다. 우리 사회가 ‘빨갱이’ 올가미를 그 아버지에게만 뒤집어씌웠겠는가. 아버지와 관련된 인터뷰를 거절하는 K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무작정 그를 만나고 싶었다. 나이트클럽에 혼자 갔다간 엉뚱한 ‘부킹의 세계’만 취재하다 올까봐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녹음기 하나 들고 동반해 달라고 부탁했다. 3호선 버터플라이가 아니라 ‘홍대 앞 나비’ 같은 성기완에게.자초지종을 듣고 함께 나선 그는 곱창전골 원형씨도 부르고 볼 빨간 준호씨도 부르더니 토박이 사장님처럼 양주도 시켰다.... -
언어도 인권이다
1979년 어느 날, 영국 런던의 국회의사당 앞 광장에서 학생들과 함께 40대 초반의 여성이 탁자에 수북이 쌓아 올린 종이를 갈가리 찢어대는 특이한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지나가던 경찰관은 그들에게 해산하라고 경고하면서 100개의 단어로 구성된 수도경찰법을 읽어 내려갔다. 1839년에 만들어진 이 법은 난해한 법률 용어와 지나치게 복잡한 문장으로 악명이 높았다. 모여든 기자들에게 이 중년 여성은 그 문장들을 쉬운 영어로 번역해주다가 조롱하듯 경찰에게 물었다. “그 복잡하고 어려운 표현은 우리가 여기서 다른 곳으로 가야 한다는 뜻인가요?” 경찰은 말을 잇지 못했다.이들이 찢고 있던 종이는 몹시 어렵게 쓰인 공문서들이었다. 이 시위를 주도한 40대 초반의 여성 크리시 메이어는 정부의 서식과 공문 등에 쉬운 영어를 사용하라고 촉구하려 거리에 나선 터였다. 정부에 제출해야 하는 온갖 서식에는 서민들이 그 뜻을 알기 어려운 라틴어나 전문 용어가 수두룩했다. 메이어는 가난하게 살... -
코미디 소재의 마르지 않는 샘물, 군대
오랜만에 ‘빵 터졌다’. 정말 눈물이 찔끔 나오도록 원 없이 웃었다. 공군 사병들이, 넓디넓은 활주로에서 눈을 치우며 “제설 제설 눈이 내려서/ 제설 제설 넉가래로 밀어”라는 가사로, 뮤지컬 영화 <레 미제라블>의 노예노동의 노래를 부르는 첫 장면부터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제목도 멋지게 <레 밀리터리블>이다. 장발장의 애인 코제트는 폭설 때문에 어렵사리 면회를 왔는데, 제설 작업장에서 삽질해야 하는 장발장 때문에 안타까운 사랑 노래를 부른다. 와, 눈물 난다! 제설 작업을 감독하는 악독한 자베르는, 장발장에게 면회를 허락하지만 한 시간 안에 돌아올 것을 명하고, ‘허벌나게’ 뛰어가서 코제트 얼굴을 딱 10분 보고 돌아서려는 장발장에게 코제트는 “저 눈이 나보다 더 중요하니?”라며 슬픈 이별 노래를 부르고, 관용 없는 자베르는 장발장을 잡으러 면회소에 찾아온다. 정말 ‘미저러블’하다. 공군 군악대가 제작해 유튜브에 올려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tvn... -
쉽게 변하지 않는, 인간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비슷한 사람과 사랑에 빠지고 또 비슷한 이유로 상처받는다. 실수라 간주하며 이를 악물지만 같은 실수를 반복하기 일쑤다. “이번 한 번은 넘어가지만 두 번의 실수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말을 그토록 자주 하고 또 듣게 되는 것은 같은 실수를 두 번 반복하는 사람이 그만큼 많기 때문일 것이다. 한 인간의 성격이 언제 결정되는지 나는 모른다. 여하튼 어느 시기에 한 사람의 내면이 시멘트처럼 굳어져 성격이라는 것이 형성되면, 성격의 결함은 그 시멘트가 굳기 전에 찍힌 발자국처럼 좀체 지워지지(교정되지) 않는다.‘성격이 곧 운명이다’라는 말이 출처 없이 자주 인용되곤 한다. (아카넷, 2005)에 따르면 이 말은 스토바이오스의 제4권에 헤라클레이토스가 한 말로 인용돼 있다. 원문은 이렇다. “인간에게는 성품(ethos)이 곧 수호신(daimon)이다.” 한 개인의 운명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다는 것이 당대의 통념이었으나 이와 달리 헤라클레이토스는 한 사람이... -
2021년 ‘인구 감소 쓰나미’ 그 후
연초부터 유명 여배우가 카드 광고에 등장해 “여러분, 부자 되세요”라는 덕담을 건넸기 때문이었을까? 지난 2002년은 부자가 되고자 하는 이들은 사방에 넘쳐났다. 하지만 아버지가 되기를 원하는 이들은 줄어들고 있었다. 한·일 월드컵부터 16대 대통령 선거까지 한국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하지만 그 열기가 미래에 대한 낙관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실제로 그해 출생인구는 49만명이었다. 외환위기 전후로 출생인구는 60만명대로 주저앉았고 2001년에는 55만명으로 급속히 감소하더니, 2002년부터는 줄곧 40만명대 중·후반을 유지했다. 집값이 폭등했던 2005년의 43만명이 이 시기 최저 기록이었다.흥미로운 점은, 이 시기에 태어난 이들의 부모 상당수가 1970년대생이었다는 사실이다. 1970년과 71년에 각각 100만명 넘게 태어나 제2차 베이비붐의 정점을 찍었던 이들이 아이러니하게도 저출산의 포문을 연 셈이다. 고도성장기에 태어나 대중문화의 세례를 받으며 성장한 이른바... -
용서와 맹세
포어맨씨, 칼럼을 시카고에서 쓰게 되었네요. 이 기회에 함께해주신 시간,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아, 이 편지 점자로 번역해 드릴게요.)포어맨씨, 제 기획은 좀 아이러니하고 무거운 공연이었죠? 그런데 당신의 유머 덕분에 관객들이 함께 호응해주어 공연을 잘 마친 것 같습니다. 당신이 어둠 속에서 마틴 루터 킹의 연설문을 점자로 조용히 읽어주셨는데, 저는 그때가 가장 좋았던 것 같아요. 카툰과 게임 음악을 좋아해서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재즈 오르간 연주자가 되었다고 하실 때는 상상이 잘 안됐죠. 보이지 않는데 야구경기를 좋아하셨다니…. 2062년 미래의 유토피아를 사는 젯슨즈(The Jetsons) 가족은 또 어떻게 재미나게 살고 있던가요. 미래를 비관하는 제게 무지개를 좋아하신다는 당신은 어떤 해법의 열쇠를 쥔 듯 비밀스러워 보였습니다.저는 여기 와서 한 달간 머무는 동안 우연히 마틴 루터 킹의 기념 휴일도 맞이했고 오바마 대통령 취임식도 보았습니다. 이번 취임식에는 ... -
냉혹한 현실, 헛된 꿈의 불가피성
입바른 소리 잘하는 시청자들은 비현실적인 신데렐라 이야기로 대중에게 거짓 위안을 준다고 비판하지만 아마 작가들은 이렇게 대꾸할 것이다. 누가 몰라? 나도 거짓 위안 말고 리얼리스틱한 작품 쓰고 싶다고. 판타지 없이 구질구질한 현실만 그려내면 시청률이 곤두박질치는데, 대중이 안 보는 드라마를 누가 만들 수 있겠어? 드라마 창작자들은 잘 알고 있다. 구질구질한 현실 묘사와 아름다운 판타지의 적절한 혼합을 시청자들이 좋아한다는 사실을. 수많은 드라마들이 뻔한 신데렐라 이야기를 뻔하지 않게 비틀어보려 노력하는 것도 바로 이런 고충 때문일 것이다. 지난 주말에 끝난 <청담동 앨리스>는, 냉혹한 현실과 판타지의 줄타기 자체를 드라마의 핵심 주제로 부각시키는 방법으로, 영리한 정면돌파를 선택했다.대부분의 드라마들은 초반에 고통스러운 현실을 깔아놓은 후, 후반에 비현실적인 성공스토리를 배치한다. <청담동 앨리스>의 선택은 반대였다. 초반부는 신데렐라 이야기의 뻔한 공식... -
세상에서 가장 오묘한 상품
이 상품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맘대로 당장 쓸 수도 없다. 아니, 억지로 쓰려면 쓸 수야 있겠지만 기분 좋은 일은 결코 아니다. 그런데도 꼬박꼬박 돈을 지불하며 이 상품을 사고, 하나만으로는 안되겠는지 여러 개를 구입하기도 한다. 보험 이야기다. 나는 인간이 만들어낸 상품 가운데 보험이 가장 오묘하고 신기하다고 탄복한다. 눈앞에 실체도 없고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의 위험에 대비해야겠다고 돈을 쓰니. 이런 까닭에 보험을 꺼리는 사람이 꽤나 많다. 그러나 바라지 않는다 하여 위험이 당신만을 피해 가지는 않는다.난 원래 근시가 심한 편이었다. 그래도 사업을 시작했던 30대 초반까지는 농구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창업한 지 얼마 뒤 고교 시절 친구가 찾아와 내 인생을 설계해준다고 들이대서 망설였는데, 1995년 당시로서는 감동할 만큼 좋은 종이에 멋진 그래프를 그려 왔기에 덜컥 그 종신보험에 가입했다. 내내 생돈 날리는 기분이었다. 외환위기 때 몇 번 해지하려다가 바빠서 기회... -
얼굴에서 음성·문자로… 우리 관계의 ‘진화’
불쑥 찾아뵈어서 죄송하다는 말은 이제 거의 할 일이 없어졌다. 특별히 불가피한 상황이 아니라면 미리 전화를 하지 않고 누군가를 찾아가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그 대신 이제 우리는 불쑥 전화 드려 죄송하다는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럴 필요가 없도록 하기 위해 문자 메시지를 먼저 보내기도 한다. 안녕하세요, 아무개입니다. 편하실 때 잠시 통화하고 싶습니다. 언제 전화 드리면 좋을까요. 어제만 해도 나는 이런 문자를 두세 사람에게 보냈고 또 두세 사람에게 받았다. 얼굴에서 음성으로, 음성에서 글자로, 우리는 축소돼 왔다. 이것은 진화일까?원래 당신은 하나의 ‘얼굴’이었다. 적어도 전화가 발명되기 전에는 그랬다. 걸어가서 기다리지 않으면 당신을 만날 수 없었다. 당신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당신의 맞은편에 앉아 당신의 얼굴을 바라본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시선을 감당해내는 일이다. 그리고 표정이 머금고 있는 의미를 해독하는 일이다. 나와 당신이 친밀한 사이가 아니라면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