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젠 안녕
그 개 이름은 나무였다. 영화배우처럼 멋진 갈색털과 군살 없이 당당한 몸매를 가진 개다. 그래서 가만히 들여다보면 가슴이 뭉클해질 만큼 맑은 눈을 가지고 있어서 문득 ‘영혼’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했다. 당연하지만 숲이나 들, 고랭지 채소밭의 가장자리, 하다못해 흔해 빠진 길 한복판에 그 개가 서 있거나 앉아 있는 걸 보면 그 모습이 너무도 아름답고 멋져 보였고 인간들은 자기도 모르게 사진을 찍게 된다. 그런 개였다. 나무는…. 그런 개가 심지어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이 다정하기까지 했다. 멀리서 손님이 굽이굽이 산 아래까지 낯선 길을 더듬어 달려오면 ‘까칠한’ 주인의 결점을 채우듯 개가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며 말없이 숙소 가는 길을 안내해 주는 일이 일상이었다. 심지어 나무가 거실문 앞에 말없이 앉아서 자신을 지켜줬다, 이내 자신들을 숲의 오솔길로 이끌어 산책을 시켜줬다, 산 정상까지 함께 올라갔다 내려왔다. 버스정류장까지 배웅해줬다, 마을 슈퍼에 함께 마실 다녀왔다... -
헤드윅이라면 모를까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가 500만명 돌파를 목전에 두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화들짝 놀랐다. 세상에, 프레디 머큐리라는 그토록 비범했던 뮤지션을 그토록 평범하게 주무른 영화가 <맘마미아> <라라랜드> <비긴 어게인> 같은 수작들을 이미 제쳤고 <레미제라블>(592만명) <미녀와 야수>(513만명)를 넘어서며 음악영화의 새로운 흥행 기록을 경신할 수도 있다니…. 내 예상과는 너무 다른 결과라 깜짝 놀라고 말았다. 정말 얼마 만이던가? 개봉일을 손꼽아 기다리고 그 날짜에 맞추어 예매하고 극장을 찾았던 때가…. <보헤미안 랩소디>는 내게 그런 영화였다. 그런데 이럴 수가, 이렇게 시시하고 볼품없을 수가…. 틀에 박힌 진부한 구성이나 음악 자체에 몰입하기 어렵게 만드는 어수선한 편집은 그렇다 치자. 설사 그게 퀸 음악에 대한 모독처럼 느껴졌다 해도, 문제는 캐스팅이었다. 나로 하여금 다음과 같이 계속... -
리사이클과 복고 열풍
역시 안 버리기 잘했다. 비좁은 옷장 안에서 거의 10년 가까이 선택받지 못한 채 ‘애물단지’인 양 홀대받던 옷들이 요즘 다시금 ‘새롭게 주목받는 복고’란 의미의 ‘뉴트로’ 혹은 ‘힙트로’라는 이름으로 주목받고 있다. 예컨대 촌스러울 정도로 로고가 크게 박힌 맨투맨 티셔츠며 빈티지 체크 스커트, 본의 아니게 바닥 청소하기 좋을 만큼 품이 넉넉한 ‘배기 팬츠’ 같은 아이템들. 한때 C 브랜드의 프레스 세일 중에 샀던 과장된 어깨선의 오버사이즈 모직 코트는 좀 아깝게 됐다. 아무리 유행이 돌아와도 다시 입을 것 같지 않은 그 육중한 무게감에 질려서 어느 유난히 추운 겨울에 우리 개들 이부자리로 내주었다.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그해 유난히 내 마음에 와 닿았던 H&M의 글로벌 캠페인 슬로건 “패션엔 규칙이 없다. 단 한 가지를 제외하고. 버려진 옷을 재활용하라”를 내 방식대로 해석하고 실천한 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심지어 디테일에 내 나름... -
프렌치 시크와 코리안 시크
프랑스인들만의 멋지고 세련된 느낌을 표현하는, 프렌치 시크(French Chic)라는 말이 있다. 그것이 패션에 강한 다른 장소, 예컨대 뉴욕 시크나 이탈리아 시크와 다른 점이 있다면 꾸민 듯 꾸미지 않은 ‘무심함’에 있다고 한다. 멋있으려 애쓰지 않는데 그냥 저절로 멋스러운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멋’이라고 해도 좋겠다. 혹은 ‘방치된 무심함’의 뉘앙스마저 철저히 계산하는 프랑스인들 특유의 지적 허세나 섬세한 태도에 있거나. 실제로 프랑스는 경제적으로 나라 전체를 이끄는 힘 자체가 패션에서 나온다고 해도 좋을 만한 ‘패션의 나라’지만 그걸 상쇄시키려는 듯 언제 어디서든 작정하고 ‘지성’을 강조하는 나라이기도 하다. 패션의 도시에서 살지만 패셔너블해 보이기보다 편안하면서도 지성적인 자기다움을 발산하는 걸 더 좋아하고 존중하는 프랑스인 특유의 삶의 태도. 그게 바로 프렌치 시크의 정수라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코리안 시크(Korean Chic)’라는 말도 있다. ... -
BTS, 우리 시대의 비틀스(BeaTleS)
‘트렌드’라고 하든 ‘현상’이라고 하든, 혹은 그냥 ‘인기’라고 하든 세상 천지에 지금의 BTS만 한 것이 있을까 싶다. 한국어로 노래하는 아직도 한창 앳되어 보이는 방탄소년단의 노래가 빌보드 차트 1위를 점령한 데 그치지 않고 2015년부터 발매된 일곱 장의 앨범 모두 사실상 전부 빌보드 200에 차트되어 있는 이 경이로운 수준의 지속적이고 강렬한 팬덤 현상에 대해 모두 입을 다물지 못하고 한마디씩 논평을 보태고 있다. 미술이나 철학을 전공한 학자들조차 ‘예술혁명’으로서의 BTS를 논하고, 혹은 상처받은 오늘날의 젊은 세대에게 니체나 비트겐슈타인보다 더 강렬한 메시지를 전하는 철학자로서의 BTS에 대해 말한다. 심지어 철학자나 교수들이 스스로 BTS의 열성팬 ‘아미’를 자청하는 현상이 얼마나 흥미진진하던지…. 하지만 나로서는 그들에 비해 BTS에 대해 결코 잘 안다고 할 수 없어서 그저 ‘오 그렇구나! 진정 굉장하구나! 놀랍다! 멋지다!’식의 순수한 감탄사 말고는 ... -
유튜브 시대, 씽씽!
인터넷 시대를 살면서 지금까지 두 번 놀랐다. 한 번은 20년 전의 네이버 지식인. 그리고 요즘의 유튜브. 어느덧 네이버 시대는 저물고 이제는 ‘유튜브 시대’라는 얘기는 심심찮게 들었지만 이제야 그걸 제대로 실감하는 중이다. 우연히 유튜브로 ‘씽씽’을 본 것이 일주일 전. 놀라워라. 한창 때의 글램록을 연상시키는 여장 남자 둘과 여성 보컬이 분명 타령조의 민요를 부르고 있었다. 내 눈과 귀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신세계를 만난 듯 좋아했다. 우리나라 민요가 이렇게 펑키하고 사이키델릭하게 들릴 수 있다니…. 우리 민요가 해학과 정제미마저 갖춘 ‘솔 음악’ 혹은 월드뮤직으로 업그레이드가 된 느낌이었다. 이름하여 민요록 밴드 씽씽(Ssing Ssing)이라 불리는 6인조 밴드였는데, 유튜브에 씽씽이라고 치면 제일 먼저 나오는 15분짜리 라이브 동영상의 조회수가 이미 200만을 훌쩍 넘었다.내친김에 인기 동영상 카테고리에 있는 ‘저스트 절크’라는 댄스팀 동영상도 봤다... -
자살불능자의 건강법
공교롭게도 내가 살면서 이른바 ‘소확행’의 절정을 경험한 날은 2003년 4월1일 홍콩 출신 중국 배우 장국영이 투신 자살한 날과 정확히 일치한다. 장국영이 내 가족이나 친구도 아닌데 장국영을 사랑했던 모든 이들이 하루종일 말할 수 없이 울적했고 또 겁나게 무기력했다. 뱃전에 파도가 부딪치는 것처럼 천국의 속삭임인 듯 느릿한 하와이안풍 기타 연주곡 ‘Maria Elena’가 멀리서부터 계속 들려왔고, 귓전에서는 맘보 춤을 추던 ‘아비’의 대사도 끊임없이 재생됐다.“세상에 발 없는 새가 있다더군. 늘 날아다니다 지치면 바람 속에서 쉰대. 평생 딱 한 번 땅에 내려앉는데 그건 바로 죽을 때지.” 죽음이 진정한 휴식인 양 유혹하는 <아비정전>의 명대사…. 그런데도 그날 밤 나는 친구들과 간장게장에 소주를 마시며 행복했고 게 등딱지에 밥을 비벼 먹으며 살아서 이런 것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 새삼 감탄했다. 그건 일종의 인생 경험이었다. 삶이 고되고 하찮게 ... -
근원수필적 인간
예전부터 그랬다. 직업상 조지 나카시마나 핀 율, 한스 웨그너 같은 나무 본연의 아름다움을 잘 살린 디자이너 가구에 대해 줄줄이 꿰고 있는 남자들을 주로 만났지만 나는 실상 그들보다는 나무 그 자체에 대해 잘 아는 남자가 더 좋았다. 자신의 직업과는 아무런 상관 없이 그저 식물을 좋아하고 사랑하기에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고, 기회 닿는 대로 더 깊이 더 많이 알고 싶어 하는 남자. 그 때문에 때때로 자기도 모르게 수다스러워지기도 하는 남자. 예컨대 격렬했던 오전 업무가 끝나고 동료들과 가벼운 산책 중에 모감주 나무 아래에 서서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남자. “옛날에 고려사를 보면 사신이 조공을 가지 않습니까? 우리가 가져간 물품들이 비단·한지 등인데 그럼 중국에서 거꾸로 답례로 오는 것 속에 모감주 몇 말이 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 아, 그건 화살나무입니다. 가시가 있지요? 이런 식의 방어 기제가 있는 것들은 대체로 다 잎이 맛있습니다. 동물들이 다 좋아하지요.”... -
고요하게 심심하게
2009년의 일이었다. 노르웨이 공영방송 NRK는 노르웨이의 서남부 해안도시 베르겐에서 수도 오슬로로 가는 기차 맨 앞에 카메라를 설치했다. 그러곤 무려 7시간 동안이나 기차가 보여주는 창밖의 풍경을 담아 아무 편집 없이 ‘베르겐 기차 여행(Bergen Line)’이란 제목으로 내보냈다. 덜컹거리는 바퀴 소리와 함께 끝없이 이어지는 눈 덮인 풍경만 무료하게 계속 나오는 방송이었다. 그러다 기차가 터널을 지나갈 때면 화면이 아예 깜깜했고 열차가 멈추었을 때는 그대로 정지 화면뿐이었고. 그런데 더 놀라운 건 시청률이다. 노르웨이 사람들은 그 무료하기 짝이 없는 프로그램을 ‘슬로 TV’라 명명하며 너무나 좋아했다. 실제로 시청률이 15%나 나왔다. 그러한 인기에 힘입어 거대한 크루즈 배가 노르웨이 피오르 해안을 항해하는 장면을 장장 134시간 동안 찍어서 내보낼 만큼 배포들이 커졌고. 물론 전 세계가 놀랐다. ‘시끄러운 바보상자’라고만 생각했던 TV가 그렇게 모험적으로 무료... -
스타벅스의 시대는 가고
당신은 지금 시애틀 공항에 와 있다. 목적지는 알래스카. 한국에서 출발하는 알래스카행 직항 노선이 없기 때문에 시애틀에서 10시간 정도 보내야만 하는 상황이다. 경유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그곳이 잠 들기 싫을 만큼 매력적인 항구도시 시애틀이라는 사실은 예기치 않게 받은 ‘리본 달린 일요일의 선물상자’ 같은 느낌이다. 안타까운 점은 나의 모든 살아 있는 감각으로 시애틀이라는 도시를 느껴볼 수 있는 시간이 겨우 반나절밖에 없다는 것. 그렇다면, 과연 그렇다면 당신은 어디서 무엇을 하겠는가?10년 전 이맘때 나는 그런 행복한 고민 속에서 시애틀을 대표하는 작은 항구에 가서 물고기 요리를 사 먹었고 관광객이 거의 없는 평범한 동네를 산책하며 ‘시애틀에서 산다는 건 어떤 느낌인지’ 아주 조금 음미해 보았다. 짧지만 ‘나만의 시애틀’을 가질 수 있는 특별한 반나절이었다.앗, 그런데 나만 좀 다른 선택을 했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다른 일행들이 선택한 장소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