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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둡고 깊은 눈
한지에 깊이 스며든 먹물이 검은 어둠을 만들었다. 그 까만 바탕이 얼굴 하나를 떠올려준다. 타원형으로 기운 얼굴이 달 같고 하얀 눈동자가 별처럼 빛난다. 구름을 헤치고 나온 달, 새까만 하늘에 박힌 별이다. 하늘의 무수한 별은 지상의 숱한 인간들과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옛사람들은 그래서 별자리를 헤아리며 살 자리, 죽을 자리를 찾았다. 그 별이 지상의 산 자들에게 구원같이 떠 있었던 것이다. 아래를 그윽하게 들여다보는 이 얼굴은 흡사 지상을 굽어보는 하늘의 시선이다. 이마와 볼, 반듯한 콧대와 턱이 반짝인다. 저 코는 인간의 것이 아니라 신성의 자취다. 그래서 신들의 코는 반듯한 직선이다.(김정욱전, 갤러리 스케이프, 2013·1·18) 무엇을 바라보는 슬픈 눈일까? 형언하기 힘든 감정이 마구 묻어난다. 단순화시킨 얼굴에 눈만이 치명적으로 뚫려 까만 어둠을 응시한다. 작가는 오직 그 눈을 통해 모든 것을 발설한다. 설명할 수 없는 감정, 기술될 수 없는 문장, 그릴 수 ... -
까만 어둠으로 물든 종이
최병소는 신문지의 표면을 볼펜과 연필로 까맣게 물들인다. 덮어버린다. 그것은 그리기이자 지우기다(대구시립미술관, 12·21~2013·2·17). 깊은 검음이 아름다웠다. 종이의 표면을 지독하게 새까맣게 칠해버린 것인데 그 결과물이 광물이나 재와 같다. 종이의 표면을 저렇게 깊고 단호한 어둠으로 만든 작가의 손놀림과 한없는 노동의 양, 시간을 헤아려보았다. 회화란 주어진 평면에 눈속임을 불러일으키는 장치일 텐데 그의 화면은 표현이나 환영이 아닌 그저 종이라는 물질을 이상한 존재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연금술사처럼 종이에 화학적 변화를 일으켜 색다른 물질로 환생시켰다. 아무것도 그리지 않고 표현한 것도 아니고 그래서 작가의 조형 의지나 의미란 것을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그런 기이한 화면이었지만 오히려 그 침묵의 화면이 더 큰 울림을 동반하고 있었다. 문득 내 자신이 형언하기 어려운 묘한 물질로 돌변한 종이, 신문지의 마른 살과 그 피부를 죄다 점유해버린 캄캄한 어둠 속으로 기어들어... -
한국인의 삶에 대한 기록
한 해가 맹렬한 추위 속으로 소멸되는 느낌이다. 모든 게 얼어붙고 눈에 덮여가는 연말이다. 전시장으로 가는 길들도 예외없이 차가운 냉기에 가라앉아 더없이 쓸쓸하다. 몇 장의 흑백사진 속에 응고된 지난 시간을 고독하게 마주하고 있다. 1980년대 한국 농촌의 풍경과 농민들의 모습이 입김처럼 되살아난다. 사진은 이미 있었던 그 순간을 그러나 지금은 부재한 장면을 기이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사라지고 지워진 풍경이자 여전히 살아서 내 눈앞에 어른거리는 유령 같은 장면이다. 사진은 결국 죽음을 안기고 사라진 순간을 덧없이 회상하게 해주는 한편 그 찰나의 시간을 영원히 봉인해 오랫동안 응시하게 한다. 결국 내가 보는 이 사진 속 풍경과 인물들은 이미 사라졌거나 미지의 것이 되었겠지만 남겨진 사진을 통해 불멸의 존재가 되어 떠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나는 지난 시간 속의 한순간을 목도하면서 여러 상념에 잠긴다. 권태균은 오랫동안 이 땅의 여러 장소를 소요했다. 그가 찾아다닌 곳은 시골의... -
‘낭만풍경’
육지가 끝난 가파른 지점에 바다들은 처연하게 드리워져 있다. 바다는 생의 끝자락을 보여준다. 도저히 어떻게 해버릴 수 없는 거대하고 막막한 벽을 안겨준다. 사람들은 이 현실적 삶의 공간이 끝난 자리에 서서 저 바다 너머 또 다른 생의 공간을 상상해 본다. 그래서 수평선은 항상 피안이다. 수평선 너머는 낙원이나 동경의 땅이자 미지의 공간으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현혹했다. 그래서 바다에는 ‘사이렌’이 산다. 사이렌의 노래가 가득해서 그 소리에 마냥 유혹당하는 것이다. 그렇게 바다는 무성한 소리로 산 자들을 유혹한다. 지금 이곳의 삶이 아닌 또 다른 삶이 있다고 속삭이는 것이다. 부지런히 외치는 것이다. 그래서 이곳에서의 삶에 너무 힘들어 하거나 피곤에 지친 이들은 바다로 달려간다. 끝까지 가보는 것이다. 그림 속 남자는 바위에 걸터앉아 막막한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미술의 생기, 11·30~2·24, 대구예술발전소) 김지원은 자신이 상상한 풍경에 ‘낭만 풍경’이란 제목을 달... -
달리는 기찻길
어린 시절 외갓집은 기차역에서 꽤나 걸어 들어가야 하는 곳이었다. 서울역에서 장항선을 타고 거의 종착역에 가까운 어느 한적한 역에 내려 산을 넘고 여러 마을을 지나갔다. 대숲과 우물가, 한적한 논가의 바람, 쓸쓸하고 처량하며 가난하던 그 동네가 선연하게 떠오르는데 지금 그곳의 외가는 아무도 살지 않는 버려진 집이 되어 방까지 차고 넘치는 잡풀 속에서 썩어갈 것이다.죽죽 펼쳐진 선로를 보면 여러 감회가 일어난다. 기차는 근대화의 상징이었다. 곡선의 자연에 직선의 길을 내고 모든 주름을 죄다 폈던 것이다. 시간과 속력으로 압축된 공간은 삶을 바꾸었다. 근대화는 그렇게 기차역을 중심으로 재편되었다.홍명섭은 유년 시절을 기차역 부근에서 보냈고 그 체험은 원초적인 기억이 되었을 것이다. 기차역에서 고독하고 우울한 유년기를 보내면서 그는 어디론가 질주하며 떠나는 기차를 보며 많은 상념에 젖었을 것이다. 그는 그때의 추억을 멋진 설치작업으로 승화했다. 예술가에게 체험이나 추억만... -
회전목마
놀이공원이나 유원지 한쪽에는 으레 회전목마가 자리하고 있다. 붉은색 지붕 아래에 알전구들이 불을 밝히고 알록달록 화려한 문양으로 장식된 목마가 위아래로 들썩이면서 돌아가는 모습은 어딘지 낭만적이다. 유년의 추억을 건드려주는가 하면 일상에서의 각박한 시간이 잠시 허물어지면서 그 틈으로 동화 같은 삶을 밀어넣고 싶은 것이다. 이제는 온갖 스릴 넘치는 기구들이 사람들의 비명을 독차지하고 있기에 회전목마를 찾는 이는 드물다. 그래도 가끔 덧없이 돌아가는 회전목마를 만날 때가 있으면 반갑다. 어쩌다 연인들이 회전목마를 타고 낄낄거리는 웃음소리를 조명 아래 흘려놓는 장면을 보노라면 연극 같은 인생에 추억 하나를 공유하고 싶다는 심정이 아프게 다가오기도 한다. 왜 회전목마는 쓸쓸하고 덧없는 삶을 연상시킬까? 이제는 허름하고 조악한 유원지의 구석에서나 볼 만한 회전목마를 어두운 전시장에서 만났다(최우람, 갤러리현대, 11월1~30일). 최우람은 동력장치를 활용해 움직이는 조각 작품을 만드는... -
한가한 물가 풍경
고려인들은 차와 술을 중요한 음식으로 인식했고 이를 즐겼다. 차 문화의 확산에 따라 청자로 만들어진 다기가 발달됐고 주기 역시 요구돼 주자가 발달했다. 차란 선종의 유행에 따라 참선에 요긴한 수단이었으니 당연히 다기의 표면에는 선계의 모습이 어른거려야 했을 것이다. 그러니 학과 구름이 자욱한 풍경이 삽입되었으리라. 술을 담는 술병(주자) 역시 술에 취해 표표히 세상을 떠돌고 싶다는 마음을 투영하기에 바람에 흔들리는 버드나무와 수면 위를 떠다니는 오리의 모습이 호출되었을 것 같다.고려시대에는 연못을 만들어 버드나무를 심고 오리를 키우며 이를 감상하는 취미가 널리 유행했다고 한다. 특히 문인들은 호젓한 정자에 친구를 초대해 술과 차를 곁들여 거문고를 타고 바둑과 시 짓기로 여가를 즐겼다고 한다.그릇의 표면에 그려진 그 풍경은 고려시대 사람들이 꿈꿨던 이상향에 다름 아니다. 청자의 색채 역시 유토피아. 피안을 보여주는 색이다. 모든 시대의 미술에는 당대인들이 꿈꾸는 이상적인 삶과 ... -
차이의 공존
생명체나 문화는 차이를 통해 생존한다. 차이가 없다는 것은 획일성이고 이는 결국 죽음이다. 죽음(뼈)이야말로 완벽한 동일성으로의 귀결이다. 예술은 무수한 차이를 만들어내면서 획일성에 대들고 개별성과 고유함의 증거이다. 미술은 단일성과 통일성을 목표로 하지 않고 개별성과 무수한 차이를 확인하는 장이다. 미술이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차이를 만들어 내는 소소하고 구체적인 활동들의 집합인 것이다. 결국 예술은 서로 다름을 확인하고 그 차이를 깨닫게 해주는 일이기도 하다. 정환선의 그림은 문화적 차이에 대해 이야기한다(나무화랑, 10·3~9). 테이블과 번들거리는 가죽의자, 그리고 책가도가 한자리에 있는 서재다. 작가는 동양화와 서양화 재료를 같은 화면에 동시에 구사하고 전통 민화와 현대적 기물이 공존하는 ‘이상한’ 그림을 그렸다. 서구적이고 현대적인 물건은 유화물감을 사용해 사실적으로 표현한 반면, 책가도는 동양화 물감으로 공들여 임모했다. 결과적으로 두 화법... -
칼노래
오랜만에 오윤(1946~86)의 판화를 다시 보았다(아라아트, 9·19~10·16). 그는 이미 오래전에 죽었지만 그가 남긴, 칼로 새긴 그림들은 유혼처럼 떠돌아 어디선가 이렇게 마주하고 있다. 나무의 표면에 칼질을 해서 또렷하게 새긴 이미지는 군더더기 없는 형상의 요체와 흑백의 단호한 대비 속에서 빛난다. 당대 현실에 대한 뜨거운 감정과 분노, 애정 등이 두루 다 녹아서 흐른다. 그 이미지는 기존 미술어법과 판이하다. 거기에는 어떠한 장식, 요령, 꼼수 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 자신이 절실하게 표현하고 싶은 것을 진정으로 형상화할 뿐이다.그의 모든 판화가 다 좋지만 유독 이 ‘칼노래’는 그 단호함에서 인상적이다. 칼춤을 추는 남자의 눈매가 오윤 그대로다. ‘칼노래’는 최제우가 19세기 한국 땅에 닥친 내외적 상황을 한칼에 자르는 것을 이미지화한 것이라고 한다. 그 모든 삿된 것들을 한칼로 베는 자이다.그런 존재가 바로 예술가라고 보았을까? 그는 우리 역사 속에서 ... -
이상한 붉은 산수
색채는 문화적이고 심리적이다. 중국인에게 붉은색은 행운을 불러들이는 색이다. 한국인에게 붉은색은 벽사의 의미를 지녔고 죽음과 연관된다. 그러나 한국전쟁과 분단 이후 붉은색은 ‘빨갱이’의 색이라 금기의 색이 됐다. 이세현은 온통 적색의 물감 하나만으로 풍경화를 그렸다(학고재, 8·29~10·14). 캔버스에 붉은색채가 여백 사이로 섬처럼 떠 있다. 화면 가득 펼쳐진 이 산수는 강렬한 시각적 화려함으로 터질 듯하다. 그런데 이상하고 괴이하다. 붉은색 산속에는 또 다른 풍경이 마구 출몰한다. 가로등 불빛에 드러난 산동네가 있고 논과 밭이 펼쳐지는가 하면 정자와 군함, 등대와 거북선, 그리고 핵폭탄이 터지는 장면이 숨어 있다. 풍경과 시설물만 가득하고 사람은 부재하다. 외형적으로는 무척 낭만적이고 유토피아를 떠올려주는 풍경이 기실 불길하기 그지없고 낯설어서 두려움을 안긴다. 전통적인 산수화에 서양의 풍경화가 접목됐고 먹색이 아니라 붉은색을 사용했으며 대상에 대한 묘사 방식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