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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이름이 바뀐 이유
최근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이 수원 화‘성’과 정조의 이름 이‘성’을 딴 이른바 ‘2개의 성’ 특별전을 열고 있다. 그러면 지금까지 알려진 정조의 이름은 ‘이산’인데 어찌 된 것일까. 결론적으로 이산이나 이성이나 둘 다 맞다.원래 정조의 한자이름은 ‘李’이라 하고 ‘이산’이라 불렀다. ‘’자는 산(算)자의 고어(古語)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임금의 이름과는 발음도 같을 수 없다는 이유로 평안도 이산(理山)은 초산(楚山)으로, 충청도 이산(尼山)은 이성(尼城) 등으로 고쳤다. 그러나 1796년(정조 20년) 정조가 독음의 표준이 된 운서(<규장전운>)를 편찬하며 막판 인쇄 단계에서 ‘셩(성·)’자를 뽑아내고 기존 운서에 포함되지 않았던 ‘’자를 그 자리에 꽂아넣었다. 이후 정조의 이름은 ‘이셩(성)’으로 발음됐다. 조선의 중흥군주라는 정조가 왜 그렇게 비상식적인 일을 저질렀을까. 19세기 중인문사인 장지완(1806~?)의 <비연외초>(사진)는 “서성(... -
신라시대 3대 판결문
1988년 3월20일 경북 울진 죽변면 봉평 2리 마을 이장 권대선씨는 길 옆 개울에 처박혀 있던 명문비석을 확인하고는 관계당국에 신고했다. 비문 내용은 “524년(신라 법흥왕 11년) 모직지매금왕(법흥왕) 등 14명의 6부귀족이 회의를 열어 이야은성에 불을 내고 성을 에워싼 마을의 유력자들을 곤장 60대와 100대형에 처한다”는 판결문이었다. 울진 봉평비(국보 제242호)이다. 1989년 3월 경북 영일군 신광면 냉수 2리의 마을주민 이상운씨도 자기 밭에 박혀 있던 명문비석을 찾아냈다. 영일 냉수리비(국보 제274호)이다. ‘503년(지증왕 2년) 마을주민들이 재물(財)을 둘러싸고 다투자 지증왕 등이 재판 끝에 특정인(절거리)의 소유로 결정했다’는 판결문이었다.2009년 5월11일 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읍 중성리 주민 김헌도씨는 화분받침대용으로 옮겨온 돌에서 수백자의 글자를 확인했다. 포항 중성리비(국보 제318호·사진)이다. 전문가들은 고졸한 형태의 ‘신사(辛巳)’... -
‘만취승마’와 음주운전
“남양백 홍영통이 임금의 탄신일에 만취해서 집으로 돌아가다가 말에서 떨어져 죽었다.”(<태조실록> 1395년 10월11일) 조선 초 원로문신 홍영통(?~1395)이 태조의 탄신잔치에서 만취상태로 귀가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사망했다는 기사다. 홍영통의 출생연도는 모른다. 다만 1393년(태조 2년) 1325년생인 안종원(1325~1394)과 함께 ‘개국원로’로서 상을 받았으니 1320년대생(사망 당시 70대)일 가능성이 많다. 홍영통은 70대 고령에 만취승마까지 했다가 사고가 난 것이다. ‘순박하고 상식에 따라 처신했다’(<태조실록>)는 평을 듣는 홍영통의 허망한 죽음에 충격받은 태조는 사고 3일 뒤 원로 및 재상들에게 대나무로 만든 가마를 한 대씩 하사했다. 절대 음주상태로 말을 타지 말고 가마꾼이 모는 가마를 타라고 신신당부한 것이다. 일찍이 공자는 “고불고 고재고재(고不고 고哉! 고哉!)”(<논어> ‘옹야 23장’)라는 화두를 던졌다.... -
태정태세문단세…정순(익)헌철고순
‘태정태세문단세 예성연중인명선 광인효현숙경영 정순헌철고순.’ 어렸을 적 달달 외웠듯 조선의 임금은 총 27명이다. 그러나 이외에도 ‘국왕’의 대접을 받을 수 있는 한 사람이 있으니, 익종으로 추존된 효명세자(사진은 왕세자 책봉옥인)이다. 세자는 “귀티가 나고 용의 눈동자가 아름다웠다”(<순조실록>)고 한다. 효명세자의 저술이 역대 임금의 시문을 모은 <열성어제>에 포함됐고, 조선을 실제로 3년3개월간(1827년 2월~1830년 5월) ‘대리청정’했으니 ‘국왕대우’를 받아 마땅하다. 효명세자의 치세에 잠깐이나마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주춤했고, 260만명의 기민을 구휼했으며, 신진관료를 대거 선발하고, 상언과 격쟁제도를 활성화했다. 하지만 세자의 으뜸 업적은 따로 있다. 효명세자는 대리청정기에 소개된 정재(呈才·궁중연회에서 공연된 춤과 노래) 40종목 가운데 20종의 가사를 창작 또는 재창작한 것이다. “미인 달빛 아래 걸어나오니(빙정月下步) 비단 옷소매 ... -
양녕대군의 두 얼굴
“충녕(세종)에게 하늘도, 인심도 쏠린 것을 알고는 일부러 미친 척하면서….” 1879년(정조 13년) 정조의 글(‘지덕사기’)처럼 양녕대군 이제(李제·1394~1462)는 세종의 등극을 위해 일부러 미치광이로 살았다는 것이 여러 기록에서 보인다. <태종실록> 1418년(태종 18년) 6월6일자도 태종이 폐세자 양녕대군에게 “네(양녕대군)가 언젠가 나(태종)에게 ‘세자 자리를 사양하고 싶다’고 고한 적이 있지 않으냐”고 언급했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태종-세종-문종-단종-세조실록을 읽으면 양녕대군의 행태가 너무도 몰상식적이고, 또 그 때문에 너무나 많은 주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남편 있는 여성(어리)을 빼앗아 아이까지 낳고, 큰아버지이자 2대 임금인 정종을 모신 기생(초궁장)을 농락했으며, 매형의 애첩(칠점생)까지 넘보았다. 양반댁 규수(방유신의 손녀)와도 강제로 사통했다. 이 과정에서 세자의 외도를 도운 어린 내관(이귀수) 등이 참... -
인종의 절친 김인후의 통곡
하서 김인후(1510~1560)는 공자의 사당인 문묘에 배향된 ‘동방 18현’ 중 유일한 호남 출신 인물이다. 관직은 ‘옥과(곡성) 현감’으로 끝났지만 ‘영남에 퇴계(1501~1570)가 있다면 호남엔 하서가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조선 선비의 귀감이 된 분이다. 그런데 이 선비가 해마다 7월1일이면 뒷산에 올라 밤낮 통음하고 미친 듯 대성통곡하는 ‘두 얼굴의 사나이’로 바뀌었다. 무슨 곡절인가. 7월1일은 바로 제자이자 둘도 없는 ‘절친’이었던 인종(재위 1544~1545)의 기일이다. 5살 연상인 하서는 31살 때 26살인 세자(인종)의 스승이 된 이후 남다른 브로맨스를 과시했다. 싱싱한 배 3개를 선물로 주고, 당대 최고의 신간으로 중국에서 직수입한 <주자대전>을 한 질 하사했다. “내(인종)가 옥좌에 오르면 당신에게 성리학의 해석을 맡기겠다”는 무언의 다짐이었다. 세자는 어느 날 숙직실에 있던 김인후를 몰래 불러 비단 위에 대나무를 그린 ‘묵죽도’... -
김원봉과 노덕술
“내가 왜놈 (앞잡이)의 등쌀에 언제 죽을지 몰라.” 약산 김원봉 선생(1898~1958)과 친일경찰 노덕술(1899~1968)의 악연은 전설처럼 전해진다. 약산의 직접 증언은 아니라 어디까지가 팩트인지는 모르지만 약산의 동지들이 남긴 회고담 등을 모아보면 노덕술 같은 친일경찰이 ‘감히’ 의열단장이자 조선의용대장이며 임시정부 군무부장을 지낸 약산을 모욕한 것은 사실 같다. 1947년 3월22일 미군정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인 노덕술이 화장실에 앉아 있던 선생을 체포했고, 심지어는 선생의 따귀를 때렸다는 이야기까지 전한다.노덕술이 누구인가. 두 손 두 발을 결박해서 천장에 매달아 구타하고 코와 입에 물을 들이붓는 물고문을 자행하는 등 독립투사 3명을 고문치사한 악질경찰이었다. 선생은 그런 노덕술에게 수모를 당한 후 의열단 동지에게 “조국 해방을 위해 일본놈들과 싸울 때도 이런 수모를 당하지 않았다”고 통곡하며 “여기서는 왜놈 등쌀에 언제 죽을지 모르겠다”고 했단다. 약산은 ... -
원균과 쇄미록
“우수사는 이달 초 전라 좌·우 수군과 함께 나가서 적선 80척을 나포해서 700여명의 수급을 베었다. 초 10일에도 적선을 만나 80여척을 사로잡았다.” 1592년(선조 25년) 7월26일 오희문(1539~1613)의 일기인 <쇄미록>(사진)에 기록된 승전보이다. 전투를 주도한 우수사는 바로 경상 우수사인 원균(1540~1597)을 가리킨다. 전라 좌·우 수군의 지휘관은 이순신과 이억기이다. <쇄미록>에 따르면 승전보의 주인공은 원균이다. 이 밖에도 “원균이 지난달에 적선 10여 척을 불태웠다 하고…” “수군절도사 원균이 적선 24척을 불사르고 적병 7명의 수급을 베었다는 소식을 담은…”이라는 기록이 보인다. 원균이 결코 모함가이고 겁쟁이가 아니라는 것을 일러주고 있다. 이순신과 원균의 반목과 갈등은 극심했다. ‘전공다툼’ 때문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칠천량 전투의 패배(원균)와 명량대첩 등의 승전보(이순신)에서 극명하게 갈렸다. 또 하나의 차이는 &... -
조선판 ‘미투’ 사건
1438년(세종 20년) 8월1일 성균관 대성전에서 거행되는 공자 제사를 위해 목욕재계 중이던 성균관 유생 최한경이 ‘홀랑 벗은 몸’으로 동료 정신석과 함께 지나던 부인 일행에게 달려들었다. <세종실록>은 “유생들은 울부짖는 여종 2명을 쫓아냈고 반항하는 여인을 힘으로 억눌렀으며, 부인이 쓰고 있던 갓을 빼앗았다”고 기록했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부인 집 사내종이 성균관에 정식으로 이 사건을 고했다. 그러나 성균관의 자체조사에서 사내종의 진술이 오락가락했다. ‘홍여강이라는 사대부집 미혼의 여주인’에서 ‘주인집 유모의 딸’로, 끝내는 ‘사대부의 비첩’(여종 신분으로 양반집 첩이 된 여인)이라고 했다. 가해자들은 “성희롱만 했을 뿐”이라고 혐의사실을 일부 인정하는 선에서 진술했다. 그런데 <세종실록>은 흥미로운 사실을 기록했다. 홍여강의 아들(홍우명)의 첩인 소앙이 사헌부에 성균관 유생들을 성범죄 혐의로 고소했다는 것이다. 피해 여인이 관리들의 비행과 부정부... -
세종의 ‘소외계층’ 인권정책
“출산 휴가 100일로는 부족하다. 산전 휴가 1개월을 더 보태라.” “산모에게만 휴가를 주었더니 안되겠다. 남편에게도 30일간 휴가를 주어라.”(사진) 꼭 요즘 시대 복지정책 같지만 놀라지 마라. 이것은 600년 전 조선조 세종이 관노비와 관노비 남편에게 베푼 출산휴가다. 세종은 갓난아기와 산모를 위해 출산휴가를 내렸고, 덧붙여 ‘산후조리와 아기관리는 산모와 남편이 함께 감당해야 할 몫’이라며 남편의 출산휴가까지 내린 것이다. 세종의 한마디가 심금을 울린다. “노비는 천민이지만 역시 하늘이 낸 백성이기 때문”이라고 했다.소외계층을 향한 세종의 따사로운 시선은 죄수들에게까지 미친다. 세종은 “감옥은 죄인을 징계하고자 하는 것이지, 사람을 죽이는 곳이 아니다”라면서 재소자 인권을 위해 반드시 준수해야 할 ‘5대 강령’을 발표한다. “1)매년 4~8월 새로 냉수를 길어다 자주자주 옥 가운데 바꿔놓을 것, 2)5~7월10일 한차례 몸을 씻게 할 것, 3)매월 한차례 머리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