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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경보기’를 잠시 끄며
비상경보기 소리가 둔탁하다. 너무 오래 쳐서 그런가? 아니면 너무 자주 쳐서 식상한가? 마침내 2년 넘게 격주로 울려 퍼진 비상경보기를 바꿀 때가 되었나 보다. 이제 새로운 경보기를 구해야 할 것이고, 삶의 위기를 더 예리하게 지각하는 사람도 필요할 것이다. 앞으로 어떤 사람이 자신만의 비상경보기를 울릴지 모르지만, 그도 나처럼 벤야민의 정신을 공유했으면 한다. 에서 벤야민은 말하지 않았던가. “소동에 의해서든 아니면 음악에 의해서든 또는 도움을 요청하는 외침에 의해서든 진리는 화들짝, 돌연 일격을 당한 듯 자기 침상에서 깨어나길 바란다. 진정한 작가의 내면에 갖춰져 있는 비상경보기의 숫자를 다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그리고 ‘집필한다’는 것은 그런 비상경보기를 켠다는 것에 다름 아닐 것이다.”연탄가스로 사경을 넘나들었던 사람에게는 하나의 비상경보기가 장착될 것이다. 어느 날 친구들과 여행을 떠났다. 일정이 너무나 피곤했었는지 숙소에 들어오자마자 모든 사람이 바로 곯... -
아직 살아있는 자들에게 남겨진 과제
사인이 분명하지 않으면 관 뚜껑은 덮지 않는 법이다. 이것은 남겨진 자가 유명을 달리한 사람에게 해야 할 마지막 의무다. 그러나 지금 관 뚜껑이 서둘러 닫히려 하고 있다. 국민의 안전보다는 자본의 이윤에 손을 들어주었던 정권이 관 뚜껑을 재빨리 닫으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이해가 되는 일이다. 지금 200만명에 가까운 조문객도 고인들의 명복을 빌면서 유족들을 애도하는 행렬에 합류하고 있다. 아직도 우리 이웃들의 마음이 이렇게도 곱고 선하기만 한 게 너무나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렇지만 불안한 생각이 영 가시지가 않는다. 조문의 행위는 관 뚜껑이 닫히고 장례를 치를 때나 하는 행위니까. 지금 우리가 관 뚜껑을 닫으며 조문하려는 것은, 죽은 자들의 사인이 명백해졌기 때문인가, 아니면 세월호 비극을 가능하게 했던 자본주의의 냉정한 논리와 그것을 비호하는 정권에 무기력을 느껴 세월호라는 비극적인 사건을 빨리 뇌리에서 잊으려는 무의식적인 자기보호 본능 때문일까.모든 죽은 자들에게는 일말의... -
우리는 모두 세월호에 타고 있는 것 아닐까?
김선우 시인에게서 문자메시지가 온 것은 4월18일 새벽이었다. 바닥을 헤아릴 수 없는 절망으로 가득한, 보는 사람마저 우울하게 만드는 내용이었다. 4월16일에 있었던 세월호 참사가 섬세하고 여린 그녀의 영혼을 갈래갈래 찢어버린 것이다. 주체할 수 없는 슬픔으로 그녀는 17일 내내 곡기마저 끊었던 것 같다. 수많은 어린 생명들을 포함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속절없이 우리 곁을 떠나갔으니, 어떻게 밥과 물이 입으로 들어오겠는가. 어떻게 붉고 노란 봄꽃과 푸르고 높은 하늘이 눈에 들어올 수 있다는 말인가. 해소할 길이 없는 슬픔과 어디로 향할지 모르는 분노, 그것이 그녀가 내게 문자메시지를 보낸 이유일 것이다. 무슨 말로 시인을 위로할 수 있겠는가.그녀와 통화를 마친 뒤, 한 달 전 광주광역시로 강연을 간 일이 떠올랐다. 당시 나는 오후 2시쯤인가, 김포공항을 출발하는 비행기를 탔다. 광주에는 봄을 재촉하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강연을 마치고 6시간 뒤쯤 광주공항으로 갔다... -
밀양에도 봄은 찾아오는가?
2000여년이나 되었을까. 중국 한(漢)나라 시절 왕소군(王昭君)이란 궁녀가 있었다고 한다. 당시 한나라는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그다지 강건하지 않았다. 주변 이민족들, 특히 흉노부족의 무력에 항상 전전긍긍하고 있을 정도였다. 왕소군이 흉노부족에 반강제적으로 시집을 간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땅도 물도 낯설기만 한 흉노 땅에서 그녀가 어떻게 행복할 수 있다는 말인가. 언젠가 중국으로 돌아가리라 꿈꾸지만, 그 언젠가는 도래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탄식과 절망으로 시들어가는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또다시 흉노 땅에도 봄은 찾아왔다. 그리고 어김없이 서러운 땅에서도 어여쁜 꽃들은 속절없이 피어난다.화려한 자태와 그윽한 향기를 뽐내는 꽃들은 왕소군의 쓸쓸한 마음을 더욱 도드라지게 할 뿐이다. 그녀의 마음은 다음과 같은 구절에 담겨 지금도 우리의 마음을 숙연하게 한다.“호지무화초(胡地無花草),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번역해보자. “어찌 대지에 화초... -
철책이 모두 제거된 동물원
평화로운 동물원이 한 곳 있었다. 이곳에는 사자나 독수리와 같은 육식동물을 가두어 둔 우리도 있고, 다람쥐나 사슴과 같은 초식동물을 보호하는 우리도 있었다. 어느 날 동물원에 변화가 찾아오게 되었다. 사자 등은 동물원을 구획짓는 수많은 우리들이 동물들이 가지고 있는 야생의 자유를 억압한다고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더 이상 사료로 주어진 죽은 고기를 먹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이들의 속내를 눈치채지 못한 순진한 몇몇 초식동물들은 사자나 호랑이의 의견에 동감을 표시하기도 했다. 그들도 우리에 갇혀 있는 것이 여간 갑갑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동물원 당국자는 결단을 내리게 된다. 동물원에 설치되어 있던 수많은 칸막이들을 일순간 모두 제거해버린 것이다. 하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동물원 당국자는 동물원 바깥에서 안전하게 있으니까 말이다. 그저 그는 동물원에 다시 찾아온 야생의 활기, 피냄새를 풍기며 구가되는 자유의 풍경을 흥미진진하게 관람하면 그뿐이다. 사실 ... -
‘보슬아치’라는 말을 누가 조장하는가?
‘보슬아치’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여성의 성기를 나타내는 단어와 벼슬아치라는 단어가 합성된 말이다. 이 말은 주로 여성이란 이유로 온갖 권력과 혜택을 누리는 일부 여성들을 폄하할 때 사용된다. 무서운 것은 이 말이 정당한 노력으로 그에 걸맞은 대가를 얻은 여성들에게도 무차별적으로 적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여성의 입장에서 보슬아치라는 말만큼 치욕스러운 말도 없을 것이다. 아무리 노력을 해서 무언가를 성취해도 남성들이 보슬아치라고 폄하한다면, 어느 여성인들 좌절하지 않겠는가. 능력이 있는 재일교포가 조센징이라는 이유로 폄하되고, 선량한 유대인이 나치에 의해 악마로 폄하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물론 사회 구성원들을 예외없이 약육강식의 검투사로 만들어버린 체제가 보슬아치라는 용어를 만든 가장 강력한 원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고질적인 남성우월주의와 아울러 자기 정당화의 심리가 묘하게 결합되어 있다. 일단 여성은 남성보다 열등하기 때문에 남성의 ... -
대학 신입생들의 새로운 시작을 축하하며
인문학에 대한 열풍이 가실 줄 모르고 있다. 그래서일까, 지금 왜 인문학에 대한 갈망이 그렇게 강해졌는지 물어보는 사람들이 매우 많다.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웃음을 머금고 대답하곤 한다. 20대 초반, 혹은 대학생이었을 때의 지성과 감성을 회복하려는 무의식적인 행동 아니겠느냐고. 한마디로 지금처럼 속물이지 않았을 때의 지성과 감성을 안타깝게 그리워하는 것, 달리 말한다면 계속 속물로 타락하는 것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면, 30대에서부터 50대까지의 내면을 지배하는 인문학 열풍은 전혀 이해될 수조차 없을 것이다.속물은 모든 것을 이해관계로 재단하고 거기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이다. 돌아보라! 회사 초년병에서부터 정치가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속물이 많은가. 이런 경향은 이해, 즉 이득과 손해를 유일한 가치 평가 기준으로 밀어붙이는 자본주의 체제에 의해 더 강화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이해에 밝은 사람이 현명한 사람이라고 인정되는 기묘한 편견이 삶의 진실이라도 되는양 ... -
소수성이 긍정되지 않는다면, 민주주의도 없다!
철학은 사랑이다. 철학의 영어 표현인 필로소피에 이미 사랑을 뜻하는 ‘필로’가 들어 있다는 것을 여기서 다시 상기시키고 싶지는 않다. 여기서는 단지 철학자는 무엇을 사랑하는지 이야기하고 싶을 뿐이다. 국가도, 자본도, 관습도, 체제도 아니다. 철학자가 사랑하는 것은 ‘덧없고 사소한 것’이나 ‘쓸모없는 실존’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철학자의 사랑이 싸구려 동정이라고는 오해하지는 말자. 철학자의 사랑은 ‘덧없고 사소한 것’을 영원하고 중요한 것으로 만들려는 의지, 혹은 ‘쓸모없는 실존’을 가장 쓸모 있는 실존으로 격상시키려는 분투이기 때문이다. 만일 철학자의 사랑이 그 결실을 맺는다면, 덧없고 사소한 것들이나 쓸모없는 실존들을 자기 부정이 아니라 당당한 자기 긍정에 이르게 될 것이다. 모든 진지한 철학자들이 죽을 때까지 가슴에 품고 있었던 꿈은 바로 이것이었다.아우슈비츠를 경험했던 아도르노라는 철학자에게는 이것은 단순한 꿈이라기보다는 너무나도 절실한 소망이었다. 철학자... -
민주주의를 감당하는 우리의 자세
누가 민주주의를 두려워하는가?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자들이다. 선거를 통해 일시적이나마 권력을 획득한 대표자들이나 자본 집중을 통해 권력을 휘두르는 자본가들이 아니라면, 누가 민주주의를 두려워하겠는가. 그렇다. 민주주의는 권력의 독점이 아니라 분산을 지향하는 정치 이념이다. 군주제도나 독재정치가 민주주의와 대립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군주나 독재자는 항상 권력을 국민들에게 나누어주기보다는 자신에게만 집중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어떤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성숙했는지를 보여주는 척도는 지배자와 피지배자라는 분업 논리가 와해되는 정도로 측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민주주의에서만 ‘지배자=피지배자’라는 현기증이 나는 역설적인 도식이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독점적 자본을 통해 권력을 휘두르는 자본가를 논외로 하더라도,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등 우리 시대 대표자들이 가장 저주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자기의 임기 중에 벌어지는, 혹은 벌어질 수 있는 바로 집회와 시위다. ... -
과감히 내닫는 아킬레스가 되자!
제논의 역설을 아는가. 바람처럼 빠른 아킬레스도 자기보다 앞서 출발한 거북이를 결코 추월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아킬레스는 거북이보다 100m 뒤에서 출발한다고 하자. 자! 경주가 시작되었다. 아킬레스가 100m를 달려 거북이가 있던 곳에 도착했을 때, 이미 거북이는 출발선에서부터 10m를 가고 있었다. 그 다음 아킬레스가 출발선에서부터 10m 지점에 이르렀을 때, 거북이는 이미 출발선에서부터 11m에 이르렀다. 그러니까 거북이는 아킬레스가 10m 달리는 동안 1m를 달렸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계속 추론하면, 아킬레스는 결코 거북이를 추월할 수 없게 된다. 그렇지만 누구나 알고 있지 않은가? 아킬레스는 거북이를 추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역설이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건 100m라는 구간, 10m라는 구간, 1m라는 구간, 10㎝라는 구간을 설정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정해진 구간을 전제하고 논의를 전개하는 순간, 아킬레스는 결코 거북이를 이길 수 없다는 역설이 발생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