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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 유전자’ 제12장의 교훈
“착한 놈이 일등 한다(Nice guys finish first).” 리처드 도킨스의 명저 <이기적 유전자>의 제12장 제목이다. 1976년 초판에는 없던 장인데, 1989년 개정판에 추가되었다고 한다. 작년에 글을 쓰면서 인용할 부분이 있어 뒤적거리다가, 12장 전체를 다시 읽게 되었다. 새삼 감탄했다. ‘죄수의 딜레마’의 의미와 그 극복 전략을 어떤 경제학자보다도 더 잘 설명해놓았기 때문이다.죄수의 딜레마는 경제학개론 교과서에도 소개되어 있는 ‘게임 이론’의 기초다. 요약하면, 검찰이 두 명의 피의자를 조사하면서 ①별개의 취조실에 격리시켜 놓고, ②‘너만 자백하면 너만 풀어 줄게’라고 제안하는 경우를 묘사한 것이다. 결과는? 둘 다 묵비권을 행사하면 며칠 구류 살고 나올 뿐인데, 둘 다 자백하고 둘 다 몇 년씩 감옥에서 썩게 된다. 왜 이런 비합리적인 선택을 하는 걸까? 게임의 구조에 그 답이 있다. ①격리되어 있기 때문에 ‘묵비권을 행사하자’라는 협력의... -
이재용 부회장이 버려야 할 것들
“성공은 자만을 낳고, 자만은 실패를 낳는다.” 세계 최고의 반도체 기업인 인텔의 최고경영자(CEO)였던 앤디 그로브의 책 <승자의 법칙>(원제 <Only the Paranoid Survive>)에 나오는 말이다. 나는 이 문구가 오늘날 삼성이 처한 위기의 원인을 가장 적확하게 표현하고 있다고 본다. 삼성이 놀라운 성공을 이룬 것은 맞지만, 과거의 성공 방식에 집착하면서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지 못했고, 결국 실패의 길로 들어섰기 때문이다.‘회장의 영도, 미래전략실의 기획, 전문경영인의 실행.’ 삼성 스스로 설명하는 ‘성공의 삼각축’이다. 빠른 추격자 시절에는 확실히 강점이 있는 조직 모델이다. 특히 미래전략실의 역할이 핵심이다. 미래전략실이 모든 정보를 보고받아 치밀한 기획안을 마련한 다음, 회장의 지시라는 권위를 입히고, 각 계열사에서 일사불란하게 집행하는 시스템이 이른바 ‘관리의 삼성’이라는 신화를 만든 것이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10여년간의 ... -
삼성을 마주한 특검의 고민
특검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예정 시점을 두 차례나 연기하면서 장고를 거듭한 결정이다. 이유는 두 가지리라. 우선, 삼성이 휘두르는 전가의 보도, 즉 ‘삼성이 흔들리면 나라가 어렵다’는 협박 내지 애국심 마케팅 앞에서 주저하지 않을 만큼 강심장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나 돌이켜 보라. 2005년 X파일 사건 때, 2007년 김용철 변호사 양심고백 사건 때, 그리고 2015년 엘리엇 사태 때도 우리 사회는 삼성에 ‘또 한 번의 기회’를 주었지만, 달라지지 않았다. 이번이라고 다를 건가? 특검이 언명한 대로 법과 원칙에 충실해야 한다. 단기적으로는 고통스럽겠지만, 그것이 진정 삼성을 위한 길이다. ‘글로벌 기업’ 삼성의 지배구조 문제를 애국심 운운하는 ‘우리만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 자체가 시대착오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다른 한편, 순수 법리적인 측면에서 특검이 고민했던 것은 나도 이해가 된다. 정리해보자.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에서 ... -
87년과 97년의 갈림길에서
한국경제는 1960년대 이래 30여년 동안 성장과 분배의 선순환을 기록했다. 반면 1990년대 후반 이후에는 성장동력 소진과 양극화 심화의 악순환에 빠져 있다. 이러한 성공과 실패의 원인은 무엇인가? 이 질문은 2008년 이후 세계사적 전환기를 맞아 생존전략을 재구성해야 하는 한국경제에 대한 고민의 출발점이 될 터이다. 역설적이게도 과거의 성공이 작금의 실패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성공의 결과물인 87년 체제가 이제는 위기의 원인이자 개혁의 대상이 되었다는 뜻이다.5년 단임 대통령 중심제로 요약되는 현행 헌법질서, 즉 87년 체제는 고도성장기의 유산이다. 1987년 당시 경제는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이라 불릴 만큼 빠르게 성장했고 재벌은 돈을 벌었다. 노동조합과 시민사회의 요구를 부분적으로나마 수용할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 그것이 낙수효과를 현실화하고, ‘정부·재벌’과 ‘노동·시민사회’ 간의 암묵적 담합구조를 유지할 수 있는 물적 토대가 되었다. 요컨대 87년... -
삼성 지주회사 전환의 전제조건
최근 삼성전자가 주주가치 제고 방안을 발표했다. 엘리엇의 네 가지 요구사항에 대한 삼성의 첫 공식 반응이다. 이로써 내년 3월 정기주총을 대비한 양측의 수읽기 싸움의 첫 번째 카드들이 드러났다. 이후 국내외 주주들을 대상으로 한 홍보 전쟁이 진행될 것이며, 엘리엇의 맥시멈 공격 카드와 삼성의 미니멈 방어 카드 사이에서 모종의 타협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다시 주총 표 대결이 벌어질 것이다.삼성의 발표 내용은 내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삼성이 그나마 답을 내놓을 수 있는 것은 배당 확대 등 주주환원 정책뿐이었는데, 30조원의 특별배당 요구에는 한참 못 미치지만, 나름 성의표시는 했다. 나머지 세 가지에 대해 삼성이 어떻게 얼버무릴 것인가가 나의 관전 포인트였다. 나스닥 상장 요구에 거부 의사를 밝힌 것은 그러려니 하지만, 사외이사 세 자리 요구에 대한 삼성의 대답은 요령부득이다. “글로벌 기업 경험을 가진 이사 한 명 추천과 사외이사들로 구성된 거버넌스위원회 신설”이 다였다. ... -
재벌도 공범이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강의실을 오가며 마주치는 학생들이 살갑게 인사를 한다. 그러나 나의 대꾸는 매우 퉁명스럽다. “안녕하지 못해. 요즘 안녕한 대한민국 국민이 어디 있어?” 트럼프 당선 이후부터는 “전 세계가 안녕하지 못해”로 나의 퉁명한 대꾸는 한걸음 더 비약했다.나라 안팎으로 정치가 불확실성의 진앙이 되고 있다. 불확실한 환경에서 나타나는 가장 확실한 현상은 모든 경제주체들이 판단을 멈춘다는 것이다. 특히 기업이 그렇다. 내일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어찌 5년, 10년 후를 내다보는 전략적 경영판단을 내릴 수 있겠는가. 그래서 “억울하다. 정권 실세가 겁박하는데 돈 내지 않고 배길 수 있겠냐?”고 볼멘소리를 하는 기업들이 나오고, “어쨌든 경제는 돌아가야 한다. 경제부총리 인사청문회라도 먼저 하자”는 주장도 나온다. 그럴듯하지만, 과연 그런가? 정녕 기업은 정경유착의 피해자일 뿐이고, 경제를 정치로부터 분리할 수 있는가?정경유착을 경제학적으로 정의하면, ‘규제... -
진화하는 엘리엇, 퇴보하는 삼성
엘리엇이 이번에는 삼성전자를 겨냥했다. 엘리엇의 10월5일자 공개서한을 읽어본 느낌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진화’(evolution)다. 작년 이후 엘리엇은 한국사회와 한국기업에 대해 많은 것을 학습했고, 그 결과 자신의 전략을 스마트하게 진화시켰다.합병 부결 정족수에 2.86%포인트 미달하는 박빙의 승부를 펼쳐 삼성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지만, 사실 작년의 엘리엇은 무척 서툴렀다. 삼성물산은 독립기업이 아니라 그룹의 핵심회사다. 삼성물산 주주에게 유리한 제안이라도 그룹 전체의 이해관계자로부터 꼭 환영받는 것은 아니라는, 한국 재벌의 지배구조 특성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예컨대, 국민연금을 비롯한 국내외 기관투자가들은 삼성물산의 주주이지만, 동시에 삼성전자의 주주이면서 그룹의 미래에 더 큰 이해관계를 갖기 때문에, 엘리엇에 동조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나아가 삼성이 한국사회에서 갖는 힘을 과소평가했다. 애국심 마케팅을 통해 국내 언론과 지식인들을 자기검열로 몰... -
전경련, 해체해야
최근 IMF에서 나온 보고서들을 보면, 한국은 더 이상 모범생이 아닌 지진아다. 지난 8월12일 발표된 ‘한국과의 연례협의’(Article Ⅳ Consultation) 보고서는, 외교적 언사에도 불구하고, “이대로 가면 한국경제 망한다”는 행간의 뜻을 굳이 감추려 하지 않았다. 특히 한국 기업의 경쟁력 약화 및 부실 심화에 대해 여과 없이 지적했다. 한편, 8월29일 발표된 ‘세계금융안정보고서’의 부속보고서는 한국의 기업지배구조가 여타 신흥국에 비해서도 후진적임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분석대상 20개국 중에서 투자자 보호(8위)와 재산권 보호(9위) 등 2개 항목에서만 중간 순위였고, 소액주주 보호(20위), 공시 수준(15위), 회계감사 기준(16위), 규제의 법제도적 효율성(17위) 등 나머지 4개 항목은 최하위권이다. 과거에 비해 크게 후퇴했고, 중국·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태국·필리핀 등의 아시아 신흥국에도 밀렸다. 한국 기업이 비즈니스와 지배구조의 양 측면에서 위... -
구조조정의 정치경제학
한진해운 사태, 우리 사회의 지적 역량이 어떤 수준인지 그 밑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법정관리 신청 이후의 물류 혼란에 대비한 비상계획이 없었다는 것도 어이없는 일이지만, 이를 바라보는 이른바 식자층의 얄팍한 모습에 더 큰 좌절감을 느낀다. 불과 며칠 전까지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는 안된다고 떠들던 사람들이 정부의 자금지원을 촉구하거나 심지어 법정관리 자체가 잘못된 결정이었다고 비난했다. 언론(과 거기에 한줄 코멘트를 다는 지식인들)이 특히 그러했다.솔직히, 한진해운의 법정관리행은 외통수였다. 무엇이 최선이었지는 알 수 없지만, 다른 선택은 불가능했다는 뜻이다. 우선, 대우조선해양과 관련한 서별관회의 자료 및 회계법인 실사보고서가 공개되면서 정치적 비난이 쏟아졌고, 결국 청문회가 열리게 되었다. 관료와 국책은행의 손발이 묶였다. 한편, 동병상련의 현대상선에는 현대증권 매각대금이 들어오면서 실낱같은 숨통이 트였는데, 그게 한진해운에는 독이 되었다. 한진그룹과 조양호 회장은 ... -
교수·변호사·회계사 망국론
국제신용평가사 S&P가 우리나라의 국가신용등급을 AA로 올렸다. 한국보다 신용등급이 더 높은 나라는 독일, 캐나다, 호주, 미국 등 4개국뿐이다. 호들갑 떨 이유는 없다. 신용등급은 부도위험(default risk)을 나타내는 지표로, 재정건전성이 양호하고 경상수지가 흑자를 지속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 정부가 대내외 채무를 불이행할 위험이 낮다는 걸 의미할 뿐이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높은 신용등급이 경제의 활력을 보증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1997년처럼 한순간에 무너지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죽는 줄도 모른 채 서서히 죽어가는 ‘온탕 속의 개구리’일 수는 있다. 전자보다 후자가 더 우려스럽다. ‘다이내믹 코리아(Dynamic Korea)’가 어느 순간에 변화를 위한 시도조차 할 수 없는 나라가 된 것이다.왜 그렇게 되었는가?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오늘은 교수·변호사·회계사 등 이른바 전문 직업인들에 대해 한마디 하겠다. 이들은 직접 결정을 내리고 실행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