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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길, 세종로
도시는 권력이 설계하고 구현한 특별한 공간이다. 인간은 문명 발생의 여명기부터 자기 공동체가 이룬 경제적 문화적 성과를 증명하는 물질들과 그를 통제, 지배하는 권력을 한 곳에 집중하고 저장하는 행위를 거듭해왔다. 이리하여 도시, 특히 으뜸가는 도시인 수도(首都)는 그 외형만으로 국가 공동체의 문명적 성취와 정치적 지향을 표상하는 구조물들의 집적체가 되었다.한 국가의 실질적, 상징적 중심이 수도라면, 수도의 중심은 최고 권력자의 거소(居所)다. 고대 로마 이래 유럽 도시들에서는 신전과 정청(政廳), 법원 등으로 둘러싸인 포럼(Forum), 즉 광장이 도심부의 기본 형상이었다. 광장은 그 도시가 단일한 신을 섬기는 종교적 공동체이자, 단일한 법체계와 행정 질서로 통합된 정치적 공동체임을 표현하는 공간이었다. 반면 유교 국가의 수도 조영 원칙을 제시한 <주례>는, 왕궁 정문에서 도시의 정문으로 뻗은 대로에 권력의 의지와 지향을 직관적으로 표현하도록 했다. 유교적 이상 국... -
19대 대선이 18대 대선과 다른 이유
2012년 대선과 다가오는 2017년 대선은 비슷한 점보다 다른 점이 더 많을 것이다. 2012년 대선은 첨예한 진영 대결이었다. 새누리당은 정권재창출을, 민주당은 정권교체를 목표로 했다. 선봉장은 박정희의 딸 박근혜와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었으니, 지지자들로서는 강렬한 감정이입이 가능했다. 지키느냐 뺏느냐, 그것이 문제였다. 국민들도 양편으로 선명하게 갈라졌고, 선거 당일 할아버지와 손주는 서로 어느 세대가 더 많이 투표하는지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랬기 때문에 나는 그 선거에서 중도 전략을 별로 믿지 않았다. 한편에서 다른 편으로 전향할 사람은 어차피 별로 없었다. 거기에 전통적으로 투표율이 낮았던 청년세대와 진보층의 투표율이 계속해서 올라가는 양상이었다. 어정쩡한 중도보다는 선명한 의제가 더 나은 전략이었다고 나는 지금도 믿는다.2017년 대선은 이와는 전혀 다른 양상이 될 것이다. 이번에는 정권교체가 아니라 새 시대의 비전이 중심이 될 것이다. 진영 대결이 아니라 국민통... -
4%를 위한 변명
수백만명이 연이어 나온 촛불집회에 참석했던 지인을 만났다. 지인은 필자에게 96%의 여론이 잘못을 지적하고 있음에도 박근혜 대통령의 잘못을 결코 인정하지 않는 대한민국 4%를 우연히 만난 경험을 이야기했다. 마치 아주 신기한 무엇을 만난 것처럼 소수의 고집스러움을 조롱하듯 이야기했다. 비슷한 이야기들은 지난 두 달여간 소셜미디어 등에서도 쉽게 볼 수 있었다. 여론조사에서 대통령을 비판하는 여론이 96%에 달한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며, 나머지 4%의 고집스러운 단단함을 조롱하고 우리가 압도적 다수라는 자신감을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일화들이다.그런 이야기들을 접할 때마다 필자는 본능적으로 불편함을 느끼곤 했다. 압도적인 여론과 수백만명의 뜨거운 촛불로 나타난 시민들의 위대한 참여와 저항의 경이로움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다수 여론의 지지만으로 스스로의 옳음을 과도하게 확신하거나, 소수 여론을 조롱하는 현상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닌지 고민이 들었다. 여론조사 결과... -
운명의 날
오늘은 대한민국 운명의 날이다. 대통령 탄핵안이 국회 표결에 부쳐진다. 만약 이 안이 가결되고 장차 헌법재판소를 통과하면 박근혜 대통령은 최초의 탄핵 대통령이라는 불명예를 안게 된다. 실로 오랜만에 우리나라에서 정의가 승리하는 장면을 국민이 목격하게 된다. 세월호 유족들은 먼저 간 자식을 생각하며 눈물 흘릴 것이다. 토요일 촛불집회에서는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 되는 민주주의의 실현을 실감하게 될 것이다.그 뒤 정국이 어디로 흘러갈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이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형국이 될 수밖에 없다. 조기 대선이 현실화하면서 여러 후보가 대선의 급류에 휩쓸려 들어가는 것은 불문가지다. 개헌 주장도 더러 나오겠지만 현 국면에서는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에 불과하다. 지금은 오직 탄핵과 정권교체뿐이다. 박 대통령을 포함하여 개헌파 중에는 속셈이 의심스러운 사람들이 많으므로 양두구육이 아닌지 잘 봐야 한다. 경기 전날 갑자기 경기규칙을 바... -
소소한 우려, 비자발적 협력
“나는 몰랐는데, SNS에 정권 비판하는 글 자주 쓴다며? 아무래도 나가 줘야겠어. 당신 때문에 우리 연구소가 연구재단 지원 사업에서 불이익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사람이 있어. 그런 전례도 있고.” 이게 내가 받은 해고 통보였다. 이 말을 한 분은 내가 인격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존경하는 분이었고, 현실에 대한 인식 면에서도 나와 큰 차이가 없었다. 그분은 단지 나로 인해 연구소의 다른 연구자들이 불이익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누군가에게 전달받았고, 그 우려에 따라 아마도 내키지 않았을 결정을 한 뒤 어렵사리 통보했을 뿐이다. 나는 이 통보에 어떤 항변도 할 수 없었다. 오히려 얼마든지 다른 핑계를 댈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솔직하고 분명하게 상황을 전달해 준 데에 마음으로 감사했다. 이성적인 것이든 감성적인 것이든, 우려는 애당초 항의나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도대체 누가 자신 있게 “나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불이익을 당할 일은 없을 테니 걱정 말라”... -
박근혜 이후를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가 기어코 당선되는 것을 보면서 나는 착잡한 심정이었다. ‘국민들은 어떤 식으로든 박정희가 만들어놓은 체제의 매듭을 짓고 싶어 하는구나’라는 생각이었다. 문재인에 만족하지 못했지만 박근혜만은 절대 안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던 나는 참담한 심정이었지만 유권자들의 선택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우리가 가진 제도이고 규칙이므로. 박정희를 존경했기 때문에 박근혜를 좋아했던 유권자들에게 그것은 일종의 보은(報恩)이었을 것이다. 박정희 덕분에 북한의 위협을 이겨냈고 이만큼 먹고살게 됐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그의 딸을 꽃가마에 태우는 것이야말로 박정희 시대의 수미상관한 매듭이었다. 나는 다른 종류의 매듭이 될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에 몸을 떨어야 했다. 박정희 시대에는 작동했지만 점차 효용을 잃어 이제는 거의 작동하지 않게 된 시스템을 마침내 그의 딸이 철저히 절단을 냄으로써 매듭짓게 될 것이라는 예감. 결국 우리는 그 파국적 종언을 목도하고 있다.어찌 보면 이 ... -
입법부 강화로 민주주의를 다시 세우자
며칠 전 지인이 갑자기 물었다. 최순실·박근혜 게이트 때문에 각 당의 유력 대선후보들이 내년 대선에 어떤 공약을 새로 내놓을 것 같은가라는 질문이었다. 사실 이에 대한 답변은 별로 어렵지 않았다. 지금까지 비슷한 사건들이 벌어졌을 때 정치인들이 내놓은 대안들이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내년이 되면 청와대 제2부속실 폐지나 청와대 이전, 대통령의 사적관계에 대한 철저한 정리 등이 정당과 정치인들의 새로운 약속으로 제시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무엇을 없애거나 더 도덕적이겠다는 선언을 한다고 문제의 본질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박 대통령은 세월호 사고 이후 해경을 해체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해경은 실제로는 해체되지 않았고 오히려 관료조직은 더 커졌으며 한편에서는 최근 중국 어선들의 불법조업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해경의 역할과 중요성에 대한 고민도 필요해졌다. 따라서 최순실·박근혜 게이트 이후 정치개혁의 대안은 청와대 부속실을 폐지하는 수준이 아... -
백성이 근본이다
바야흐로 국민대각성의 시대다. 쇠고기 촛불 이후 영 꺼진 줄 알았던 촛불이 다시 활활 타오르고 있다. 연일 봇물 터지는 보도에 국민은 아연실색, 분노하고 있다. 내가 살고 있는 보수의 아성 대구도 그렇다.지난 백년 우리나라에 정의가 승리할 절호의 기회가 몇 차례 찾아왔으나 우리는 한번도 그 기회를 잡지 못했다. 기회주의자, 권력파들이 노상 승리하고 정의와 양심을 사랑하는 민주파는 패배하고 좌절해왔다. 그래서 ‘정의고 양심이고 소용없다’ ‘권력과 돈이 최고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 이런 못된 풍조가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기회주의자들이 득세하고 정의는 패배해 왔다. 우리가 선진국이 못되는 이유는 소득이 낮아서가 아니고 바로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자들이 득세하는 구조에 있다. 첫번째 기회가 해방 직후였다. 우리 국민이 얼마나 감격과 환희에 가슴 벅차하며 새 나라를 열망했던가. 그러나 많은 애국세력들이 신탁통치 찬반으로 나뉘어 분열하는 사이 권력욕으로 똘똘... -
현대의 샤먼
비디오 예술의 선구자 백남준은 1932년 서울 창신동에서 백낙승의 아들로 태어났다. 서울 육의전의 으뜸인 선전(비단상점)의 거상이었던 그의 할아버지 백윤수는 1916년에 대창무역주식회사를 설립해 선전의 여맥을 이었다. 일제강점기 조선인 기업 대다수가 단명했던 것과는 달리, 백씨 일가의 가족기업이었던 대창무역주식회사는 지속적으로 성장했다. 1930년대 말에 사망한 큰형 백낙원의 뒤를 이어 회사의 경영권을 장악한 백낙승은 아시아태평양전쟁 중 일본군에 비행기를 헌납하는 등 적극적인 친일 행보를 통해 사업을 한층 확장했다.해방 후에는 이승만에게 매달 50만원씩 생활비와 활동비를 대주는 것 외에 수시로 거금을 보냈다. 정부 수립 후에도 이 ‘후원금’을 끊지 않아, “달러에 벌벌 떨던 이 박사가 일본 기계를 들여와 태창방직을 확장하도록 허가해 준 것은 이 인연 때문”이었다고 한다(이승만의 비서였던 윤석오의 회고). 이승만과 돈독한 관계를 맺은 덕에 백낙승의 사업은 날로 번창하여 한국 최... -
“이게 나라다!”라고 답할 수 있겠는가
대한민국이 멈췄다. 국민들은 아무 일도 할 수가 없다. 일을 해봐야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자괴감 때문이다. 지금까지 드러난 것만 가지고도 박근혜 대통령과 그 측근들이 저지른 일은 국가의 기본을 철저하게 무너뜨린 것이다. 이러한 허탈감과 분노에는 여야, 진보와 보수, 세대, 지역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 이 모든 것에 앞서서 기본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전부 무너졌기 때문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아름다운 헌법의 문구를 순진하게 믿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적어도 비선 실세가 이 정도까지 국정을 농단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믿음, 수십 년을 성실하게 일한 관료가 입신양명까지는 몰라도 실세 눈 밖에 났다고 하루아침에 쫓겨나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 기업이 피땀 흘려 번 돈을 통치자금으로 뜯길망정 적어도 실세 모녀의 사금고로 흘러가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 자식 뒷바라지를 남들만큼 못해줘서 명문대에 보내지 못한 것이 가슴에 한으로 남을망정 적어도 대학이 규정을 뜯어고치고 지도교수를 바꿔치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