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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머리보다 히잡이 나은 이유
지난 5월 박근혜 대통령이 국빈으로 이란을 방문했을 때 히잡의 일종인 ‘루사리’를 착용해 화제가 되었다. ‘기독교계가 대통령을 탄핵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왔지만 상대국의 문화를 존중하고 경제적 실리를 챙기기 위한 패션외교로 인정되어 너그럽게 넘어갔다. 우리는 히잡을 여성 억압의 도구로만 보는 서구식 관점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지만 사실 히잡에 대한 관용도는 나라마다 다르다. 프랑스에서는 무슬림 여성들에게 공공장소에서 히잡을 벗으라고 강제해 갈등을 키웠지만, 개인의 종교적 자유를 중시하는 영국에서는 무슬림 여성이 어디서든 히잡을 착용할 수 있다. 그 결과 중동의 부호가 소유한 헤롯 백화점뿐 아니라 런던의 고급 쇼핑가에는 히잡을 쓴 관광객들이 넘쳐난다.단정한 외모가 취업과 결혼을 위한 핵심적인 경쟁력이 되는 한국에서는 피부 관리와 메이크업이 평범한 여성들에게조차 당연한 일상적 의무로 다가온다. 머리 손질 안 하고 화장기 없는 맨 얼굴로 집 밖에 나가려면 게으른 여성으로 찍... -
세월호 흉터 속 돋는 새살
2016년 11월 늦가을 밤 서울 시내는 수능을 마치고 친구들과 함께 거리로 나온 수험생들로 활기가 넘쳤다. 촛불을 든 청소년들은 공정하지 않은 사회, 특히 또래인 정유라가 받은 특혜에 분개했다. 세월호 7시간의 진실, ‘대통령의 시크릿’을 파헤친 방송 프로그램도 화제였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 논란과 위안부 문제 졸속 합의를 지켜본 세월호 세대는 더 이상 정부와 어른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나 역시 ‘바쁘고 피곤한 워킹맘’이라는 핑계로 사회적 이슈에 눈감고 비겁하게 살아온 과거를 반성했다.‘내 아이는 여객선이 아닌 비행기를 태우면 된다’ ‘수학여행을 전면 금지하면 일단은 안전하겠지’ ‘학교 밖 체험활동은 안전한 실내에서 살살하면 좋겠다’는 교육현장의 근시안적인 세월호 대책은 지리적 상상력의 빈곤을 여실히 드러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존재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 자식만 좋은 대학에 가길 바라고 다른 집 애들은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학부모는... -
‘강남 사모님 공화국’
최순실 일가의 국정농단 의혹으로 대한민국 전체가 허탈감에 빠졌다. ‘김영란법’ 시행으로 교사는 제자가 주는 캔커피조차 부담스럽고 공무원들은 지인과의 일상적인 만남도 기피하는 상황이었다. 공적 영역을 뛰어넘는 초법적인 세계가 실재하고 있었음이 확인되면서 평범한 국민들의 분노와 상실감은 더욱 커져 간다. ‘한국은 샤머니즘이 지배하는 나라’라는 외신 보도가 이어지면서 국가 이미지는 추락하고 국제적으로 망신살이 뻗쳤다. 한식 세계화 사업을 위해 대기업으로부터 거액을 지원받은 미르재단의 설립 취지가 무색해졌다. 최순실의 권력이 독버섯처럼 확장되었던 음습한 공간들은 ‘잘나가는’ 강남 사모님의 일상생활 세계, 그들의 권력 공간과 묘하게 겹친다.언론에 등장하는 최순실의 주요 활동 무대는 강남 사모님의 마법이 시작되는 소비 공간이다. 카페, 레스토랑, 명품숍, 피부 마사지를 받는 사우나에서 호스트바까지. 일부 부유층 여성들끼리 정보를 교환하고 친밀한 관계를 맺는 사교의 장소이자 외... -
멸종위기에 처한 해외지역 연구자
‘동남아도 연구하나요?’ 20여년 전 해외지역 연구를 시작하면서 종종 들었던 말이다. 심지어 다문화교육을 강조하는 학자와 교수들조차 서구중심적 학문의 구조와 텍스트에 갇혀 동남아와 제3세계에 대한 편견을 가진 경우가 의외로 많다. ‘인터넷에 많은 자료가 있는데, 굳이 해외로 나가 연구해야 하느냐’는 이도 있다. 하지만 ‘진짜 현실을 만나고 알짜 정보를 얻으려면 반드시 현장에 가야 한다’는 원리를 나는 20년 전 베트남에서 석사논문을 쓰며 깨달았다.1997년 겨울 한국과 동남아를 강타한 경제위기는 가혹한 시련이었다. 이제 막 경제를 개방하고 관광 개발을 시작한 베트남이 사회주의 이상과 자존심을 버리고 시장 요구에 굴복하는 상황이 가슴 아팠다. 외환위기로 궁핍해진 살림살이에 내 마음은 동남아 현지인들처럼 가난하고 겸손해졌다. 베트남 정부와 국제기구의 입맛에 맞게 쓴 정책 보고서와는 정반대의 현실이 펼쳐지는 현장을 목격한 이상 거짓말로 논문을 쓸 수는 없었다. 그동안 모은 자료... -
‘꿩 먹고 알 먹고’ 저출산 대책법
오래된 속담 ‘꿩 먹고 알 먹고’에는 산에 가서도 아름다운 경치보다는 모든 생물을 먹거리로 보는 한국인의 강한 생존력과 알을 품고 있는 꿩을 덮쳐 쉽게 실속을 차리는 효율성에 대한 자랑스러움이 담겨 있다. 하지만 사냥꾼이 접근하는 걸 알고도 새끼를 지키려고 차마 도망가지 못해 생을 마감한 어미 꿩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보자. 이러한 상황이 반복되면 어미 꿩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아예 알을 낳지 않거나 새끼와 함께 안전한 공간에만 머물고 싶을 것이다. 세계 최저 수준 출산율과 아이를 둔 중·상류층 고학력 여성의 전업주부화는 자신과 새끼를 보호하려는 한국 여성들의 본능적 선택일 수 있다.잔인한 어미 꿩 사냥을 부끄러워하기보다는 부러워하는 문화 속에서 한국사회의 다양한 구조적 불평등이 잉태된다. 임신·출산·육아를 거치며 어미 꿩 같은 약자의 처지일 수밖에 없는 한국의 워킹맘들은 과로사 직전이다. 직장이라는 전쟁터에서 치열하게 일하는 남성들과 경쟁하면서도 아이를 제대로 챙겨주지... -
인도네시아 정전 해결사, 한전?
유난히 무더웠던 여름도 이제 막바지다. ‘적도의 목걸이’로 불리는 인도네시아는 열대기후가 연중 계속되는데, 올 초부터 시작된 수마트라의 이상고온 현상은 100년 만에 찾아온 기록적인 더위였다. 한반도 면적의 8.6배, 인구 2억5000만명의 대국이자 아세안의 중심국가인 인도네시아는 요즘 날씨뿐 아니라 경제도 뜨겁다. 중국 경제 성장의 엔진이 식어가 세계 경제가 휘청거리는 상황에서 베트남과 함께 아세안 경제를 주도하는 핵심 국가로 부상한 인도네시아. 부와 인구가 집중된 자바의 자카르타뿐 아니라 수마트라·술라웨시·칼리만탄의 중소도시에서도 신형 외제차가 많이 다니고, 고급 가전제품과 삼성 최신형 스마트폰도 잘 팔린다. 미국·유럽·중국·일본의 일류기업들이 적극 진출하는 가운데 삼성·CJ·롯데·LG·아모레퍼시픽 등 한국 대기업들도 현지의 중·상류층 소비자를 잡기 위해 노력 중이다.하지만 잘나가는 인도네시아에도 치명적인 약점은 있다. 시골뿐 아니라 지방 대도시에서도 수시로 일어나는 ... -
포켓몬 고의 고향은 한국?
올여름 세계 각지에서 증강현실 모바일게임 ‘포켓몬 고’의 열풍이 뜨겁다. 미국, 호주, 영국 등 1차 출시 국가에서 앱 다운로드 수 등에서 최고 기록을 경신하는 대박상품일 뿐 아니라 사람들의 삶과 문화도 급속하게 변화시키는 중이다. 특히 실외활동 부족으로 비만과 우울증에 시달리던 미국인들에게 포켓몬 고의 유행은 (보안과 안전문제 등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희소식이 아닐 수 없다. 어두운 실내에 갇혀 컴퓨터 화면과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던 게임보이들을 세상 밖으로 끌어내는 위력을 가진 포켓몬 고는 컴퓨터 게임에 대한 부정적 편견을 해소할 뿐 아니라 관련 기업에는 새로운 사업과 마케팅의 기회로 인식되고 있다. 지리학자의 관점에서 포켓몬 고는 단순한 게임을 넘어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연결시키는 혁신적 교육도구로 확장되고 생활공간까지 바꿀 가능성이 무궁무진해 보인다.그렇다면 가상현실과 실제 공간을 절묘하게 결합시킨 포켓몬 고의 실제 고향은 어디로 봐야 할까? 전 구글 부사장인 존 행키가... -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신문의 힘
새로운 곳을 방문하고 체험하는 것이 직업인 지리학자로서 낯선 나라를 꿰뚫어 보는 통찰력을 얻는 좋은 방법이 있다. 그 나라에 도착하자마자 그 나라의 대표적 신문을 사서 훑어보는 것이다. 그 나라의 언어를 몰라도 신문의 사진이나 광고의 시각적 이미지만으로도 대충 그 사회의 상황과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특히 나에게는 핀란드·노르웨이·스웨덴 등 북유럽 국가들의 신문이 인상적이었다. 얼굴에 주름이 가득하지만 활짝 웃는 은발의 노인들, 코에 피어싱을 한 청소년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는 북유럽 신문에서는 등장인물의 비중이 남녀노소 균형 잡혀 있었다. 국제면 기사도 미국·중국·독일 등 강대국뿐 아니라 아프리카나 중남미 등 개도국의 입장도 충실히 반영하고 있었다.내가 다른 이보다 조금 더 풍부한 지리적 상상력을 갖게 된 비결은 그동안 꾸준히 읽어온 영국 신문의 공이 크다. 런던에서 불안한 비정규직 연구원으로 고단하게 생활하던 시절 유일한 사치는 타임·가디언·인디펜던트 등... -
금욕·쾌락이 공존하는 라마단
라마단은 전 세계의 무슬림들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금식월이고, 매년 라마단 시기는 조금씩 바뀐다. 6월6일부터 7월5일까지 약 한 달간 계속되는 2016년 라마단 시즌은 하지를 끼고 있어 무슬림에게는 부담스럽다. 특히 백야현상이 나타날 정도로 낮이 긴 영국·스웨덴·아이슬란드 등 북반구 고위도 지역에 거주하는 무슬림들의 고충이 심하다. 반면 적도 부근 열대지역에 위치해 연중 일정한 시간에 해가 뜨고 지는 동남아에서는 라마단 시기가 바뀌더라도 하루 중 금식을 해야 하는 시간 자체가 크게 변하지 않아 금식이 상대적으로 덜 고통스럽다.최근 테러 위험 등을 우려해 라마단 기간에는 가급적 이슬람 지역을 여행하지 말라고 경고하지만, 행복밀집지역인 동남아의 라마단은 모두가 마음을 열고 함께 즐기는 풍성한 축제이기도 하다. 평소에는 아침 7시 이후에나 시작되는 호텔의 조식도 해가 뜨면 음식을 먹을 수 없는 무슬림 투숙객을 위해 새벽 3~4시경부터 푸짐하게 뷔페식으로 제공되고, 기업과 종교... -
위기를 기회로 만든 화교의 생존전략
말라카 반도 끝 바위투성이 작은 어촌 싱가포르는 영국 식민통치기에 발달한 무역항에 불과했다. 1959년 35세에 자치정부 총리에 오른 케임브리지 법대 출신의 엘리트 화교 리콴유는 대규모 컨테이너 항구를 건설하고 해외투자를 적극 유치해 서울과 비슷한 면적의 도시국가를 세계적인 물류 중심지, 동서양을 잇는 교통의 요충지로 만들었다. 1965년 말레이시아 연방에서 탈퇴한 싱가포르는 오일쇼크, 아시아 외환위기, 사스 창궐 등 생존을 위협하는 위기를 오히려 도약의 기회로 삼았고, 정부는 재정 안정·서민주택 보급·공직비리조사국 설치 등의 사회통합정책을 과감하게 밀어붙여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안전한 국가가 되었다.리콴유는 세계 화상회의를 주도하고 시장의 공정성과 투명성을 높이며 싱가포르를 전 세계 화교 네트워크 및 금융 중심지로 업그레이드시켰다. 꽃과 정원의 도시로도 유명한 싱가포르는 세계 정치·경제 환경의 변화에 유연하게 적응했고, 마치 애벌레가 나비로 변하는 것 같은 급격한 변신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