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버블 파이터’ 악역이 필요하다
경제에 미치는 심리의 중요성을 간파한 대표적 학자는 2013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로버트 실러 미국 예일대 교수다. 경제학에 심리학을 접목한 그가 쓴 <내러티브 경제학>은 경제를 움직이는 입소문의 힘을 분석한 저서다. 이 책은 미국에서 1929년 주식시장이 최고점에 이르기 직전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저녁 자리에서 누군가 갑자기 큰 부자가 됐다는 환상적인 얘기를 들었다. 무수한 이들이 투기에 빠져 어떤 회사인지도 모르고 전 재산을 쏟아부었고, 실제로 큰돈을 벌었다. 누군가 지어낸 것처럼 들리지만 이런 이야기도 자주 듣다보면 무시하기 어렵다.”부동산과 증시, 가상통화 등 현재 한국의 자산시장이 그가 묘사한 모습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실제 한 금융권 관계자는 이렇게 전했다. “한 직원이 예전에 가상통화 ‘오로라’에 투자했다고 하면서 든 이유가 뭔지 아세요? 이름이 예쁘다는 거였어요.”한국 자산시장이 버블(거품)이 아니라고 자신 있게 주장할 수 있는 ... -
‘이준석 돌풍’, 민주당이라면…
국민의힘 전당대회 전날(10일)인 지금까지도 나는 이준석 돌풍이 정치 발전을 몰고 올 것이라는 확신이 들지 않는다. 제1야당의 유력 대표 후보가 젠더라는 시대 가치를 뒤집고 혐오를 유발하는데, 후기자본주의가 저무는 때 능력주의를 외치는데 어디에 미래가 있고, 도대체 어디에 대의가 있단 말인가. 낡은 정도가 아니라 틀렸고, 오히려 퇴행이다. 그럼에도 심상치 않다는 직감이 든 것은 지난 3일 이준석 후보가 대구에서 “탄핵은 정당했다”고 연설한 뒤부터다. 박근혜 키즈가 보수의 심장부에서 탄핵이 옳았다고 호소했다. 당 핵심 지지층은 과거를 버리는 한이 있어도 미래와 가겠다며 이 돌풍에 올라탔다. 전략적 지지가 ‘대놓고’ 지지로 바뀐 순간이다. 여론이 적극적으로 반응한다면 내 소신과 달라도 폄훼보다 이유를 살피는 게 정치 기자의 자세라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이준석 돌풍’은 10년 전 ‘안철수 현상’을 소환한다. ‘안철수 현상’은 기성 정치가 싫었던 2030세대, 박근혜(친박... -
학문의 ‘쓸모’를 증명하라고?
지난 한 해 동안 국내에서 출간된 책의 종수는 대략 8만종이다. ‘1억 인구’의 이웃 일본도 8만종 정도이니, 꽤 큰 숫자다. 하지만 그 많은 책들 중 고개를 끄덕일 만한 국내 저자의 것을 꼽으라면 쉽지 않다. 매주 언론사에 전달되는 200~300권 중에서 국내 저자의 의미 있는 책은 참 드물게 만난다. 지난 한 해 4~5종 정도나 될까. 그나마 노작이라 할 것들은 고전 번역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출판에서까지 ‘애국심’을 발휘할 것은 아니지만, 찜찜함은 남는다.“학계(연구)가 연구재단에서 연구비를 받아서 진행이 된다. 그러다 보니 논문을 많이 쓰는 게 중요하다. 그걸 연구소가 모아 단행본을 내는 식이다. 지난 20년 이렇게 해왔는데 차분하게 연구할 시간도 없고 그럴 이유도 없다.” 지난가을부터 만난 몇몇 선생님들이 공통적으로 걱정한 게 있었다. IMF 환란 이후 20여년이 지났음에도 전모를 제대로 규명한 책 한 권이 없다는 앞의 경제학자의 탄식처럼 학문 현실에 대한 걱정이었다... -
대선주자들에 ‘미래 먹거리’를 묻는다
“아들이 서른 살에 가까워가는데 졸업을 못한 채 아직 대학생이에요. 주변에 취업한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고 합니다. 알바 자리도 없다 하고요. 가상통화에 몰두하거나 빚내 주식에 투자하는 20대가 많다고 걱정들 하는데 저는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차기 대선도 경제 대통령이 화두겠지요. 하지만 지금 대선주자들 공약을 보면 현금주기 공약밖에 눈에 안 띄네요. 한국 경제의 성장동력, 젊은이들을 위한 미래 먹거리는 대체 뭔가요.”서울 소재 대학에 다니는 아들을 둔 A씨의 말이다. 청년층 일자리 문제의 심각성은 통계로도 확인된다. 전문가들은 잠재적 구직자를 포함한 체감실업률 기준으로 청년층(15~29세) 4명 중 1명꼴로 실질적 실업상태에 있다고 본다. 현대경제연구원은 지난 3월 내놓은 보고서에서 국내 니트족이 지난해 43만6000명으로 전년보다 약 8만5000명(24.2%)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니트족은 교육을 받지 않고, 일자리도 없으며, 직업훈련에도 참가하지 않는 청년들을 말한다.... -
송영길의 벽, 송영길의 문
김종인 국민의힘 전 비상대책위원장이 윤석열 전 검찰총장을 부추기며 언급한 ‘별의 순간’은 슈테판 츠바이크의 <광기와 우연의 역사>에 나온다. 더불어민주당에 대입하면 ‘당의 미래를 결정하는 별처럼 빛나는 역사적 순간’이라 할 수 있겠다. 송영길 민주당 신임 대표는 지난 2일 ‘별의 순간’을 품었다. ‘별의 순간’은 강렬하지만 허무하다. 송 대표에겐 내년 3월 대선이 첫 길목이다. 오래 반짝일 것인가, 이내 사라질 것인가. 지난 두 번의 대선에 답이 있다. 2002년 대선에서 새천년민주당은 후보단일화협의회(후단협) 악몽에 시달렸다. 그해 3월 민주당 대선 주자로 확정된 노무현 후보는 ‘YS 시계’ 발언과 지방선거에서 부산, 울산, 경남을 다 뺏기면 후보직을 내놓겠다고 한 뒤 전패하자 지지율이 급락했다. 후보 교체론이 나왔다. 한화갑 대표는 “후보를 재검토하자”고 했다. 민주당은 노 후보에게 대선 예산 집행권을 주지 않았다. 16대 대선 다음날, 노무현 당선자는 정권 재... -
정치가 부패한다는 것은
도연명은 일찍이 벼슬자리를 들락날락했다. 관직에 나섰다 도망치기를 전부 다섯 차례. 전원시인의 표상답지 않은 과거였다. 애초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중국 위·진 시대 험한 벼슬길과는 너무도 맞지 않는 마음 약한 ‘초식남’이었다. 미관말직이지만 마지막 관직을 박차고 나가며 쓴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지금이 옳고 지난날은 틀렸음을 깨달았다”고 고백한다. 불안과 공포를 훌훌 털고 자연으로 돌아가는 홀가분함과 달뜬 마음이 가득하다.벼슬길과는 이토록 맞지 않으면서 왜 그리 미련을 못 버렸을까. 그라고 명성에 대한 야심이 없었을까만 실상은 더 짠하다. “내 집이 가난해 농사만으로는 자급하기 부족했기”(‘귀거래사’ 서문) 때문이었다. 먹고사는 일 앞에선 벼슬길의 공포도 왜소하다.벼슬, 즉 공직은 과거부터 공명의 대상 이전에 ‘호구지책’이었다. 물론 공직의 힘에 취해 단순한 ‘호구’ 이상을 탐하기도 했다. 공직은 배웠다는 이들의 전쟁터였다.조선시대 당파는 사림(士林)들 ... -
‘이재용 사면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미국이 일본 반도체산업의 콧대를 꺾은 건 1986년 체결된 미·일 반도체 협정을 통해서다.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인텔과 마이크론, 모토로라를 앞세워 반도체산업을 호령했던 미국은 NEC, 도시바, 히타치를 앞세운 일본의 저가 공세에 밀려 치명타를 입었다. 결국 미국은 덤핑 혐의에 따른 보복 관세로 일본을 꺾었다. 일본이 굴욕적으로 서명한 반도체 협정에는 미국에 생산원가를 공개하고, 일본 내 미국 반도체 업체의 점유율을 20%까지 높이겠다는 약속이 담겼다. 미국은 한때 한국도 같은 방법으로 옭아매려 했다. 1992년 미국 마이크론이 삼성전자와 현대, 금성 등 한국 반도체 3사를 덤핑 혐의로 제소한 것이다. 다행히 한국 반도체산업을 키우는 것이 일본을 견제하고, 미국의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미국 정부의 판단으로 국내 기업들은 화를 면했다.반도체산업 부흥을 중국 봉쇄 차원에서 추진하고 있는 미국이 수십년 전 행보를 반복할 것이라 예단하고 싶진 않다. 다만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 -
봄의 정치
‘봄의 정치’는 지인 고영민 시인의 표제작이다. 시는 이렇게 시작된다. “봄이 오는 걸 보면 세상이 나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봄이 온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이 나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4월 재·보궐 선거 끝자락에 불현듯 ‘봄의 정치’를 묻고 싶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때 구상했던 이 시는 2년 전 출간됐다. 그와 오랜만에 통화했다. “봄이란 말만 들어도 따뜻해지잖아. 물론 현실 정치는 봄이 아니지. 그래도 조금씩 따뜻해지면서 봄을 향해 나아가는 거지.” 정치가 암흑기였던 그때, 그는 시민들의 분노를 미래라 읽었고 봄이라 불렀다. 불과 얼마 지나지 않은 지금, 4월 재·보선은 ‘봄의 정치’로 가는 길을 잃었다. 아니, 퇴행했다는 표현이 더 맞겠다.서울시장 보궐선거는 박원순 전 시장의 성범죄가 촉발했다. 그러나 여권은 권력 자산을 총동원해 박 전 시장 옹호에 나섰다. ‘박원순의 향기’라는 말에선 그의 공을 그의 가해 행위를 지우는 데 이용하려는 결기가 읽힌다. 한... -
‘미나리’에 환호하는 만큼
어릴 적 시골 할머니집 바로 앞엔 논인지, 밭인지 모를 조그만 땅이 있었다. 한 5~6평 남짓 됐으려나. 밭처럼 보였지만 물이 그득했고, 퍼런 풀들이 빽빽이 덮고 있었다. 어른들은 “거머리 천지”라며 얼씬도 못하게 했다. 그게 ‘미나리꽝’으로 불린다는 건 한참 나중에야 알았다. ‘미나리’는 내 기억 속에서도 참 토속적인 기억에 속한다.이 촌스러운 이름이 미국 아카데미 영화 역사에 남게 됐다. 6개 부문 수상 후보가 되면서 이번 아카데미 화제의 중심에 있기도 하다. 이 드라마틱한 반전에 국내는 꽤나 흥분한 듯하다. 미국인들로선 뜻도 몰랐을 제목의 영화가 세계 영화산업의 정점과도 같은 무대를 향해 전진하는 모습에 경탄과 호기심 어린 눈길이 쏟아진다. 1년여 전 영화 <기생충>의 경이를 떠올리기도 한다. 올 4월도 ‘아카데미의 봄’이 될 것 같은 기대감이 가득하다.사실 영화 <미나리>는 독특하다. 미국 사회 속 ‘이방인’의 이야기다. 한국어 대사가 절반... -
말로만 “불로소득 척결”을 외쳐온 결과
‘LH 사태’에 연루된 직원들이 노렸던 것은 일확천금 불로소득이었다. 보통 사람은 접근하기 힘든 내부정보를 이용한 투기라는 점에서 자산가들의 아파트 투기보다 시민들이 느끼는 분노와 상대적 박탈감은 더 크다. 정부는 “부동산 투기를 통해서는 더는 돈을 벌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겠다”며 기회 있을 때마다 불로소득 척결을 외쳤지만 공공기관에서조차 제대로 말발이 먹히지 않았다.불로소득은 노동소득에 의존하는 평범한 사람들을 좌절케 한다는 점에서 자본주의의 대표적 병폐로 꼽힌다. 비단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한국만큼 부동산으로 불로소득을 얻기 쉬운 나라도 없을 것이다. 수십년 동안 권력이나 자본, 정보를 움켜쥔 세력이 부동산 시장을 투기장으로 만들며 축재 수단으로 삼아왔고, 부동산 불패 신화가 굳어졌다. 건물주가 꿈이라는 어린이들의 말에서 보듯 미래세대까지 불로소득의 유혹이 스며들었다. 사실 손쉽게 돈을 벌려고 은밀한 정보에 목말라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공정과 정의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