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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사람의 시대
‘착하다’는 무슨 뜻일까? 국어사전은 ‘언행이나 마음씨가 곱고 바르며 상냥하다’라고 정의하지만, 이것만으로 완벽한가? 고운 말 쓰고 법과 규범을 잘 지키며 살면 착하게 사는 것일까? 아니, 그 전에 왜 착하게 살아야 하는가? “범과 곰이 한 동굴에서 살았는데, 늘 환웅에게 사람 되기를 빌었다. 환웅이 쑥 한 줌과 마늘 스무 개를 주면서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곧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곰은 이 말을 잘 지켜 사람의 몸을 얻었으나 범은 그러지 못했다. 웅녀(熊女)는 날마다 단수(壇樹) 아래에서 아기 배기를 축원했다. 환웅이 잠시 변하여 그와 혼인했더니 이내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다. 그 아기의 이름을 단군왕검(檀君王儉)이라 했다.”(<삼국유사> 기이편)근대의 민족 기원 담론에 따르면, 한민족의 공동 시조는 단군이다. 개천절 노래도 “이 나라 한아바님은 단군”이라고 거듭 강조한다. 부계 ‘혈통’만 따져 왔음에도, 단군... -
대학의 시대
“대학(大學)의 도는 밝은 덕을 밝히고 백성을 가까이하며 지극한 선(善)에 이르는 데에 있다.” 유교에서 ‘대학’은 문자 그대로 큰 학문, 즉 천하를 다스리는 학문으로서 치자(治者)의 학이었다. 미래의 치자인 귀족 자제들을 모아 가르치는 교육기관의 역사는 매우 길다. 우리의 경우 고구려 때 ‘치자의 학’을 가르친 기관의 이름도 태학(太學)이었다. 하지만 고구려의 태학이나 신라의 국학 등에서 현대 대학이 기원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현대의 대학(university) 제도는 12세기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결성된 ‘학자들의 동업조합’에서 기원한다. 학문은 인간이 자신을 성찰하고, 자신이 속한 세계의 총체 및 그 구성 요소들의 본질과 운동 원리를 이해하며, 자신과 세계 사이의 관계를 끊임없이 재설정하는 실천 활동이다. 학문하는 인간 역시 인종, 민족, 국가, 종교, 젠더, 계층, 직업 등의 여러 범주가 중층적·복합적으로 얽힌 관계망 위에 존재하는 구체적인 인간이다. 다만... -
이기적인 전문가 시대
“묵은 양반이라 함은 낭비하여 선조의 재산을 탕패(蕩敗)하고 게을러서 가업을 경영하지 못하여 나라에 대하여 유익한 국민 되지 못하고 가정에 대하여 직책을 다하는 가족 되지 못하고 아무 사업하는 것 없이 공연히 내가 양반이다 하는 묵은 생각만 품고 앉아서 예전에 문벌이 낮은 사람이 잘되어 가는 것을 보면 ‘상놈이 되지 못하게 제아무리 하면 상놈이 아닌가’ 하는 완고하고 어두운 옛 생각만 하고 새로이 사회의 상당한 지위에 서는 사람을 쓸데없이 업신여기며 서로 친하고자 하지도 않으며 진정한 사회의 융화를 방해하는 위인이라.”(매일신보, 1917년 1월25일) 바뀐 세상에서 ‘잘되어 가는’ 문벌 낮은 사람들을 천시(賤視), 질시(嫉視)하는 ‘묵은 양반’들을 나무라는 조선총독부 기관지의 글이다. ‘새로이 사회의 상당한 지위에 선’ 문벌 낮은 사람들이란 과연 어떤 부류였을까?1894년 갑오개혁으로 신분제도가 철폐되자, 신분 대신 직업이 당사자의 사회적 지위를 정하는 일... -
법치의 시대
조선 태종 4년 10월, 의정부에서 <대명률>을 이두로 번역, 반포하고 각 관리들에게 강습시키라고 건의하자 왕이 그대로 따랐다. <경국대전>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고, 국초에 만든 <경제육전>이 너무 소략해서 적용하지 못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당장 죄인을 장형(杖刑)에 처하는 경우에도, 몽둥이의 크기와 때리는 강도에 대한 규정이 없었다. 이 문제에 대해 의정부는 이렇게 썼다. “무릇 태(笞) 하나 장(杖) 하나라도 반드시 율문(律文)에 따라 시행해야 합니다. 만약 율문을 살피지 않고 망령된 뜻으로 죄를 가볍게 하거나 무겁게 하는 자는 그 죄로써 죄줄 것입니다. 또 형(刑)은 사람의 죽고 사는 일과 직결되므로 언도하는 자가 삼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 근래 형물(刑物)의 크고 작은 것을 제멋대로 제작하므로 태와 장으로 인하여 죽는 자가 자못 많습니다. 금후로 가쇄(枷鎖·목과 발목에 씌우는 형구), 태, 장, 추(杻·일종... -
주식회사를 떠받치는 자본주의
‘고객님’이라는 해괴한 단어가 생기기 전에는, 음식점이나 상점 종업원들이 중장년 남성을 부를 때 흔히 ‘사장님’이라는 말을 썼다. 하고많은 직업 중에 왜 꼭 사장일까? 집에 전화기가 있으면 큰 부자로 대우받던 시절에는 많은 사람이 다방을 개인 연락사무소로 이용했다. 종업원이 “김 사장님 전화 받으세요”라고 소리치면 다방 안에 있던 사람 반이 일어났다는 우스개가 전한다. 고도 경제성장이 시작된 1960년대 중반 이후 회사는 우후죽순 격으로 늘어났고, 사장도 그만큼 많아졌다. 중장년 남성을 ‘사장님’으로 부르는 관행은, 모르는 상대를 높여 주던 전래의 미풍양속과 회사가 속출하던 시대 상황이 결합해서 생겼을 터이다. 물론 사장보다 훨씬 많아진 사람은 ‘사원’이다. 오늘날 직업을 가진 한국인의 반 가까이는 ‘사원’이다. 회사원, 월급쟁이, 직장인은 모두 같은 뜻으로 사용된다. 사무직 노동자와 생산직 노동자, 유통업 노동자와 서비스업 노동자는 서로 다른 직업인이지만, 그래도 모... -
식민잔재 ‘청산의 시대’
광복의 감격과 흥분이 가라앉을 무렵, 한국인 대다수는 “우리는 어떤 민족인가?”라는 질문에 새 대답을 찾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까지 그들이 알던 ‘조선민족’은 스스로 근대 국가를 유지할 능력도, 근대 문명을 향유할 능력도 갖지 못한 저열한 민족이었다. 그때까지 그들은 일본민족의 지도하에 특유의 나약하고 비루하며 나태하고 불결한 민족성을 척결하는 것이 ‘조선민족’의 과제라고 배웠다. 그때까지 그들은 문명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조선민족’이라는 자의식을 소멸시키고 일본민족의 일원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담론에 포위되어 있었다. 이런 자의식을 떨쳐내지 못한 상태에서는 열강의 신탁통치를 배격하고 즉각 독립을 주장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었다. 설령 즉각 독립을 이룬다손 쳐도, ‘조선민족’에게 그 독립을 유지할 능력이 있는가? 스스로 인정하지 못하는 자격을 남에게 요구할 수는 없었다. 지식인들이 먼저 ‘민족의 정체성’을 재구성하려고 했다. 신탁통치 문제가 최대의 관심사였던 1... -
혐한의 시대
1929년 9월 조선총독부는 경복궁에서 조선박람회를 개최했다. 굳이 3·1운동 10주년을 맞아 이 행사를 기획한 데에는 ‘조선에 관한 모든 것’을 보여줌으로써 조선인의 ‘자각’을 유도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 달 남짓한 기간 동안 진행된 이 박람회를 관람한 인원은 일본인과 조선인을 합쳐 100만명이 훨씬 넘었다. 당시 한국인들이 발간한 한 잡지는 한 촌로(村老)의 소감을 이렇게 소개했다. “거 참 흉악한 놈들일세, 조선 사람의 흉거리란 흉거리는 다 모아 놓았네 그려.” 이 촌로의 말대로, 조선박람회는 ‘조선의 모든 것’이 아니라 ‘조선의 모든 흉거리’를 전시한 행사였다. 조선총독부는 이 박람회를 이용해 열등한 조선인이 일본으로부터 독립하려는 것은 미몽(迷夢)에 불과하며, 일본인의 계도 아래 문명화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라는 생각을 조선인들의 의식 깊은 곳에 새겨 놓으려 했다. 천도교계에서 발간하던 잡지 ‘별건곤’은 이에 맞서 ‘조선의 자랑’... -
우파와 좌파의 시대
정치세력을 좌파와 우파로 나누는 관행은 1789년 프랑스 혁명 때 생겼다. 혁명 과정에서 소집된 국민의회는 의장석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왕당파, 왼쪽에 공화파의 자리를 배치했다. 공화파가 왕당파를 타도한 뒤 구성한 1792년의 국민공회에서는 오른쪽에 온건 개혁세력인 지롱드가, 왼쪽에 급진 개혁세력인 자코뱅이 앉았다. 이후 우파는 대체로 온건한 개혁세력, 좌파는 급진적인 개혁세력을 지칭하는 말로 통용되었다. 물론 루이 16세가 단두대에서 목숨을 잃은 뒤에도 왕당파가 완전히 소멸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들은 그저 시대착오적 구세력일 뿐, 우파도 좌파도 아니었다. 시민혁명 시대에 뒤이어 계급혁명 시대가 도래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사회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주창하며 좌파를 자처(自處)했다. 하지만 공산주의자 내부에도 좌파와 우파가 있으며, 부르주아 진영도 좌파와 우파로 갈린다고 보았다. 좌파와 우파는 이념이나 계급이 아니라 태도와 관련된 개념이었다.우리나라에서 우파니 좌... -
독재의 시대
1897년 10월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연호를 광무(光武)로 하는 새 제국(帝國)을 선포한 고종은 2년 뒤인 1899년 8월17일, 제국의 헌법에 해당하는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를 공포했다. 명칭을 국제(國制)라고 한 것은, 입법기관이 따로 없는 상태에서 황제 ‘마음대로’ 제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총 9개 조항으로 이루어진 국제의 제1조는 ‘대한국은 세계 만국의 공인되온 바 자주 독립하온 제국(帝國)이니라’였고, 제2조는 ‘대한제국의 정치는 이전으로 보면 500년 전래하시고 이후로 보면 항만년(恒萬年) 불변하오실 전제정치이니라’였다. 나머지 7개 조항은 모두 황제의 권리만 제시했다. 황제의 의무나 다른 사람의 권리를 규정한 조항은 없었다. 황제는 법률을 제정 또는 개정할 권리, 즉 입법권을 가지니 이를 자정율례(自定律例)라 했고, 행정 전권을 장악하니 이를 자치행리(自治行理)라 했으며, 아무런 제약 없이 인사권을 행사하니 이를 자선신공(自選臣工)이라 했고... -
사악한 욕망 ‘빨갱이’ 사냥시대
우리말 밝다와 붉다는 모두 ‘불’에서 파생한 말이다. 불은 자체로 빛이자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분 짓는 핵심 물질이었다. 붉은색은 태양의 색이자 피의 색이기도 하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붉은색에 광명, 희망, 생명, 권위 등의 의미를 부여했다. 아시아에서든 유럽에서든 붉은색 옷은 왕과 귀족들만 입을 수 있었다. 우리나라 조선시대에도 붉은색 관복은 정3품 당상관 이상에게만 허용되었다. 이에 따라 붉은색에는 고귀함이라는 의미도 따라붙었다. 1789년 프랑스혁명 당시 파리의 군중은 청·백·적 삼색의 표지를 모자에 붙이고 자유·평등·박애를 외쳤다. 이 혁명의 이상을 표현하기 위해 만든 것이 현재 프랑스의 국기로서, 청색은 자유, 백색은 평등, 적색은 박애를 의미한다. 이후 민주공화정으로 체제를 바꾸는 데 성공한 많은 나라가 삼색을 국기에 채용했다. 나라마다 조금씩 다르기는 하나 삼색기의 붉은색은 대체로 박애·정열·애국 등을 표상한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직후, 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