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할 사람
이민재, 라고 했다.1996년생이고, 정용과 진만이 나온 대학교의 사이버보안학과를 나왔다고 했다. 아, 아직 졸업은 아니고요, 내년 2월에 졸업 예정이에요. 이민재는 들고 온 캐리어에서 추리닝을 꺼내며 그렇게 말했다. 제대하고 복학할 무렵에 코로나 터져가지고 학교도 한 번 못 갔는걸요, 뭘. 졸업이라고 해서 별다를 것도 없고요.대학 동기 상구의 부탁으로 정용이 이민재를 처음 만난 것은 12월 둘째 주의 일이었다.“사실 걔가 내 여자친구 남동생이야. 굳이 이쪽 광역시로 나와서 살겠다고 하는데 당장 보증금 마련도 어렵고….” 상구는 정용에게 딱 한 달만 신세를 질 수 없겠냐고 물었다. 그 뒤엔 고시원이든 친구 방이든 구해서 나가겠다고 했다. 안 그러면 자기 여자친구 방으로 들어온다고 하는데, 다 큰 남매가 한 방에서 지내는 것도 그렇잖아? 정용은 상구의 말을 묵묵히 듣기만 했다. 여자친구 방에서 거의 살다시피 하는 상구가 더 큰 문제겠지.사이버보안학과... -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일
늦은 밤, 정용은 자취방을 향해 걷고 있었다. 날은 흐리고 바람은 매서웠다. 도로를 지나다니는 차 소리는 평소보다 더 크게 들렸고, 신호등은 더 붉고 더 파랗게 깜빡거렸다. 오늘 밥은 먹었던가? 정용은 어깨를 옹송그린 채 따져 보았다.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라면을 먹은 것도 같은데, 그게 저녁이었는지 점심이었는지, 명확하지 않았다. 허리가 조금 뻐근했고, 종아리는 계속 욱신거렸다. 그런데도 무언가를 먹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먹을 때마다 자꾸 다른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함께 살던 진만이 사고로 죽은 뒤, 정용은 근 보름 넘게 자취방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잠을 자다가 일어나면 오랫동안 가만히 앉아 있었고, 그러다가 다시 잠이 들기를 반복했다. 멍한 상태로 생라면을 우적우적 씹어 삼키기도 했고, 멀거니 스마트폰으로 유튜브를 보기도 했다. 정용은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제대로 알 수 없었다. “야, 그래도 뭘 좀 먹... -
도로교통법 제154조
정용은 치킨 한 마리를 시켰다. 맥주와 음료는 따로 주문하지 않았다.홀에는 정용 이외에 다른 손님은 없었다. 프랜차이즈 유니폼을 입은 종업원 한 명이 테이블을 닦고 있었고, 커튼으로 반쯤 가려진 주방에선 연신 그릇 닦는 소리와 무언가 튀기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환기 시설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지 천장 쪽으로 마치 한지 위에 엎질러진 먹물처럼 계속 연기가 퍼져나가고 있었다.그리고 거기 사장이 있었다.사장은 사십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남자였는데, 체격이 크고 검은색 야구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는 카운터 뒤에 서서 연신 포스기를 바라보며 전화를 받고 있었다. 오후 4시30분이 막 지난 시간. 이 한가로운 평일 오후에도 치킨을 배달시키는 사람들은 많았다.정용은 사장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했다. 그가 사고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죽은 진만에겐 또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직접 들어볼 작정이었다. 하지만 매장에 들어선 순간, 정용의 마음... -
스무살 지방러
최종민은 2002년 생으로 올해 2월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태어난 곳은 광역시이지만 다섯 살 이후부턴 쭉 현재 살고 있는 군 소재지에서만 자랐다. 그의 아버지는 8년 전 다니던 재활용공장에서 폐지 더미에 깔리는 사고를 당했다. 그 바람에 허리를 다쳤고 이후 줄곧 자리보전한 채 방 안에서만 누워 지냈다. 최종민의 아버지는 4년 전 당뇨합병증으로 세상을 떴다. 그의 어머니는 식당 설거지와 공공근로를 병행하다가 2년 전부터는 요양병원 식당에서 일하고 있다. 새벽 5시에 출근했다가 오후 7시쯤 퇴근했는데, 그 일을 얻은 것을 아주 다행으로 여겼다.최종민이 나온 고등학교는 전체 학생 수가 47명이었고, 그중 고3이 19명이었다. 그 19명 중 수도권 소재 대학으로 진학한 학생은 2명. 한 명은 아버지가 군청에 다녔고, 다른 한 명은 읍내 대성 한의원 집 둘째 딸이었다. 나머지 17명 중 8명은 인근 광역시에 위치한 국립대와 사립대에 진학했고, 5명은 같은 군 소재지에 주소를 두... -
작고 여린
정용은 어느 밤 이런 꿈을 꾸었다.밤안개 자욱한 국도를 걷고 있을 때였다. 버드나무가 띄엄띄엄 마치 커다란 물음표처럼 늘어서 있는 국도였다. 저녁 내내 비가 왔는지 아스팔트는 검게 젖어 있었고, 차는 한 대도 지나다니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노란색 중앙선은 더 단호해 보였다. 한참을 걷다 보니, 저 앞에 감청 후드티를 입은 남자 한 명이 천천히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어깨를 잔뜩 옹송그린 채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넣은 모습. 정용은 뒷모습만으로도 그것이 진만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저러니, 내가 잔소리를 안 할 수 있나. 정용은 잰걸음으로 진만을 따라잡았다. 숨은 하나도 차지 않았다. 어깨로 툭, 진만의 상체를 쳤다. 뭐야? 또 알바 잘린 거야? 정용이 물었지만 진만은 말없이 씨익 웃기만 했다. 며칠 면도를 하지 않은 듯 턱엔 거무튀튀한 수염이 나 있었지만, 이마와 뺨은 잡티 하나 없이 말끔했다. 둘은 함께 국도를 걸었다. 버스정류장이나 전봇대의 모습은 나오지... -
그의 행적
아마도 진만은 딱 한 달을 예상했는지 모른다. 더도 말고 한 달만. 눈 딱 감고 한 달만 고생해보자. 그러면 모든 것이 다 좋아질 거야.후에 진만의 행적을 쫓아 면 소재지에 위치한 모교까지 내려간 정용은 계속 진만의 마음을 짐작하려고 애썼다. 경찰이 알려준 진만의 후불 교통카드가 찍힌 마지막 행선지가 그들이 함께 졸업한 D대학교였다. 거기 학생식당에서 사천오백원짜리 백반 정식을 먹은 것도 기록에 남아 있었다. 기록은 거기에서 끝나 있었다. 이후에는 다른 사람의 증언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한 한 달 전쯤이었을 거요? 저녁장사 준비하고 있는데 불쑥 들어오더라고요. 전단지 붙여놓은 거 보고 왔다고….”진만이 일했던 프랜차이즈 치킨집 주방 이모는 출근길에 만난 정용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녀는 말을 하는 동안에도 계속 눈치를 봤다. 치킨집 사장은 아직 출근 전이었다. 진만이 본 전단엔 ‘홀 서빙 알바 구함’이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숙식 제공 가능, 성... -
실종신고
맞다. 분명 진만의 흔적이었다.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같은 방에서 입고 돌아다녔던 감청색 반바지와 회색 반팔 티셔츠가 의자 등받이에 마치 개수대 위 고무장갑처럼 맥없이 걸쳐 있었다. 배낭은 침대 바로 옆에 모로 누워 있었고, 양말과 속옷이 함께 들어 있는 쇼핑백은 간이옷장 손잡이에 걸려 있었다. 그 외에 짐은 거의 없었다. 책상 위에 놓인 칫솔과 치약이 전부였다. 환기가 잘 안되는지 방에선 계속 락스 냄새가 났다.정용의 휴대전화에 낯선 전화번호가 뜬 것은 어제 오후의 일이었다. 평상시 같았으면 스팸이나 대출 안내 전화라고 지레짐작 무시했겠지만,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살고 있는 광역시 지역번호가 앞에 붙은 것도 어쩐지 찜찜했다. 그리고… 그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전화를 건 사람은 50대쯤 되어 보이는 여자였다. 한빛고시원, 이라고 했다. 정용이 살고 있는 원룸에서 버스로 3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고시원.“아니, 우리도 답답한 게요, 보... -
누가 공평을 말하는가?
진만은 오랜만에 졸업한 대학교 앞을 찾았다. 화요일 오후 세 시 무렵이었다. 광역시에서 버스를 타고 사십 분쯤 걸리는 면 소재지에 위치한 진만의 모교는 얼마 전 뉴스에 나오기도 했다. 신입생을 다 채우지 못한 지방 사립대학교, 벚꽃 피는 순으로 문을 닫을 거라는 기사였다. 하긴, 우리 대학교에 벚꽃 나무가 많긴 많았지. 진만은 학교 정문 옆에 세워진 거대한 지구 모형의 탑을 올려다보았다. 밤에 저 앞 잔디밭에 앉아 막걸리도 많이 마셨는데, 지구에 토도 많이 했는데…. 지금은 띄엄띄엄 지나다니는 차만 몇 대 보일 뿐, 학생들은 보이지 않았다. 진만은 천천히 그 옆길을 따라 학교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내가 왜 여기 왔을까? 진만은 걸으면서 생각했다. 그즈음 진만은 정용과 함께 살던 원룸에서 나와 광역시 변두리에 있는 고시원에서 살고 있었다. 통장에 남아 있던 돈을 탈탈 터니 간신히 한 달치 고시원비가 나왔다. 고시원에 들어가고 난 후 진만은 외출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저... -
빈자리
일주일 전, 정용은 편의점에 출근하기 바로 직전 누군가 원룸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 나가 보니 초등학교 5학년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서 있었다. 양손엔 콜팝을 하나씩 들고 책가방을 메고 있었다.“저기 사콘지 아저씨 안 계세요?”“누, 누구? 싸, 싸이코?”“아니요. 사콘지 아저씨요. 왜 맨날 추리닝 입고 돌아다니는.”정용은 그제야 아이가 진만을 찾는다는 것을 알아챘다. 진만은 보름 전 짐을 싸서 원룸을 떠났다. 하지만 정용은 아이에게 지금 없는데, 라고만 얼버무렸다.“이상하네. 그럴 리가 없는데….”아이는 진만과 함께 만화카페에 같이 가기로 약속이 되어 있다고 했다. 자기가 콜팝을 사면 나머지는 아저씨가 내기로 했다는 것.“근데 왜 그 아저씨가 사콘지 아저씨야?”정용이 묻자 아이는 귀찮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사콘지 스승님 몰라요? ‘귀멸의 칼날’에 나오는… 아저씨는 사콘지, 저는 탄지로.”자... -
사소한 작별
정용은 아무래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뭘? 뭘 어쨌다고? 같이 사는 처지에, 아니 그 정도 말도 못한단 말인가? 예전에는 더 심한 말도 했는데…. 정용은 혼자 따져보다가 기분이 더 상해버렸다. 가든 말든 마음대로 하라지. 내가 뭐 아쉬운 게 있다고…. 정용은 그렇게 진만이 나간 방문을 바라보다가 마음의 문마저 휙 닫아버렸다.시작은 사소한 말 한마디부터였다. 편의점 야간 알바를 마치고 돌아온 정용이 켜져 있는 컴퓨터 모니터를 보며 ‘안 쓸 땐 쫌!’ 하고 짜증을 냈다.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을 보고 있던 진만은 ‘왔냐?’ 하며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었다. 컴퓨터는 정용의 것이었고, 진만이 누워 있는 침대도 정용의 자리였다. 진만은 평소 침대 아래에 삼단요를 깔고 잤다. 가뜩이나 컴퓨터 쿨러 상태가 안 좋으니까 웬만하면 쓰지 말라고 했는데도 진만은 매번 귓등으로 흘려들었다. 정용이 낮은 한숨을 내쉬며 옷을 갈아입고 있는데 뒤에서 진만이 말을 걸었다. ‘야, 세상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