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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와 분단 그리고 쿠데타
12·3 쿠데타 사태의 종국은 최소한 윤석열의 파면과 구속, 그리고 쿠데타 가담자들의 법적 처리 등일 것이다. ‘최소한’이라고 말하는 것은, 지금까지 알려진 상황에 국한했기 때문이다. 모르긴 몰라도 김건희와 그를 믿고 호가호위하던 세력들도 곧 그 전모가 드러날 것이다. 윤석열의 등장 자체가 엽기적인 사태여서 그의 집권이 ‘정상적으로’ 종료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오다가, 예상보다 더 폭정을 휘두르는 것을 보면서는, 마지막이 어떤 모습이든 임기를 제대로 채우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리라는 판단은 비단 나 혼자만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스스로 쿠데타를 일으킬 줄은 꿈에도 몰랐고 아직까지 총체적인 진실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이렇게까지 경악스러운 정권일 줄은 더더욱 몰랐다.돌아보면 우리는 점점 눈앞에 펼쳐진 사실의 세계를 불신하다 못해 사실의 세계마저 거짓으로 받아들이는 일에 익숙해지게 된 것도 같다.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라는 속설이 있지만, 보이는 것을 소박하게 믿고 살아가는 사... -
내란의 시간에서 개벽의 시간으로
2024년 12월3일 밤, 부산에서 일 보고 올라오는 기차 안에서 접한 비상계엄 선포 소식은 내게 실소와 공포를 동시에 안겨줬다. 도착하는 대로 여의도로 가야 하나, 달리는 기차 안에서 생각이 많았지만 여러 사정상 일단 집으로 가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아마 나처럼 혼란에 빠진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리고 힘든 밤을 보냈을 것이다. 그 시간 이후에 드러났듯이 이것은 비상계엄이 아니라 대통령의 쿠데타였으며, 대통령이 주권자인 국민에게 위임받은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고 국가의 법 위에 군림하려 했던 내란이었다. 사실 그동안 윤석열과 검찰이 보여줬던 행태 자체가 사법 쿠데타였는데, 아예 ‘귀찮은’ 법적 절차를 내던지고 국가폭력을 행사하려 했던 것이다.19세기 말 조선에서는 내란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그동안 변화가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500년을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민중을 지배했단 사실 자체가 불가사의한 일이기도 한데, 결국 그 하중이 19세기에 들어오면서 본격화된 ... -
첫눈을 기다리며
올가을 날씨가 많이 이상하다. 굳이 예년의 평균기온을 찾아볼 것도 없이 11월 중순의 한낮 기온이 20도 안팎인 것은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다. 아무리 낮게 잡아도 예년보다 10도 이상 기온이 높은 날씨가 계속되고 있다. 이런 현상이 지금 당장은 포근하고 생활하기 편할 수는 있지만 불길하게 생각되는 건 지나친 걱정일까. 귀동냥으로 들어보니 이런 이상기온을 가장 솔직하게 느끼는 것은 농작물이라고 한다. 먼저 벼멸구의 때아닌 습격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가을이 되면 벼멸구가 사라져야 하는데 이상기온으로 그 개체 수가 늘어났다는 기사가 있었다. 아직까지 모기가 주위에서 우글대는 것을 보면 충분히 수긍되는 말이다.한쪽에서는 더 이상 고추 농사짓기 힘들겠다는 말이 도는데, 한쪽에서는 또 그럭저럭 잘된다고 하고, 심지어는 같은 마을에서도 특정 작물의 잘되고 못 되고가 갈린다는 말도 들려온다. 경향신문 11월1일자에 실린 김해자 시인의 전언에 의하면, 제주 앞바다에서는 “해초가 단계적으로 ... -
노벨 문학상의 너머
지난 10일 밤 이후, 한강 작가의 벼락같은 노벨 문학상 수상의 열기가 아직 식지 않고 있다. 사실 우리에게나 벼락같은 소식이었지, 스웨덴에서는 이미 한강 작가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고 한다. 확실히 아시아 최초 여성 작가니, 대한민국 최초니 하는 수식어들은 대한민국의 공기를 마취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전제 없이 한강 작가의 수상을 축하드린다. 다만 그것과는 별개로 그리 단순하지 않은 이 열기가 무엇인지도, 열기가 가라앉은 다음에 짚어볼 문제인 것 같다. 또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이 우리에게 무얼 묻고 있으며 노벨 문학상의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는 문학이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앞으로 숙고해야 할 과제다.스웨덴 한림원은 선정 이유에서 한강 작가가 “역사적 트라우마를 직시하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강렬한 시적 산문을 선보였다”고 밝혔다. 이 짧은 선정 이유 앞에서 우리는 여러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한림원이 어떤 맥락으로 말했든 우리는 우리의 트라우... -
자동차의 속도에서 생명의 속도로
고 김종철 선생의 ‘자동차 없는 세상을 꿈꾸며’(<간디의 물레>, 녹색평론사)는 지금 읽어도 진실을 가리키는 바늘이 살아 있는 글이다. 오래전 처음 이 글을 접했을 때 불편하지만 외면할 수 없는 진실 앞에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때 자동차가 없었지만 자동차산업의 성장이 사회와 경제의 진보라는 이데올로기를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자동차 문화가 가져온 생태적 문제들은 틀림없는 사실이며 오늘날 우리는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지 않은가?지난 추석 연휴 때 평소에 끌지 않는 자동차를 몰고 고속도로로 나왔다. 한두 번 겪는 일은 아니지만, 나를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 것은 자기 속도를 줄이지 않으려는 어떤 저돌성들이다. 예를 들면 차선을 바꾸겠다고 신호를 보내면 속도를 줄여주든가 ‘알았다’는 어떤 반응이 있어야 하는데 도리어 전조등을 켜면서 위협적으로 다가오는 경우도 있었고, 휴게소를 나와 진입하지 않으면 길이 끝나는 난처한 상황에 빠진 상대방... -
시골 없는 도시라는 디스토피아
지난달부터 한 달에 1~2회씩 삼례에 있는 그림책미술관에서 시민들과 함께 시 읽기를 하게 되었다. 전라도 시골 소읍에서 시를 읽는 시간을 갖는 것은 색다른 경험이기도 하지만 자칫하면 공소해질 위험도 있는 일이다. 농촌 지역의 인구 감소가 어느새 ‘자연적’인 현상이 되어버린 현실 속에서 삼례도 나 어릴 적에 비해 인구가 많이 줄어든 곳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다시 늘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인근에서 가장 큰 장이 열렸던 때에 비하면 어림없을 것이다. 그렇다. 삼례는 내가 11세 때 이사 와서 자란 고향이며 아직도 어머니가 살고 계시는 곳이다. 영국의 문화비평가 레이먼드 윌리엄스는 그의 주저 <시골과 도시>에서 영국의 문학 작품들에 그려진 목가적 전통을 거슬러 올라간다. 베르길리우스로부터 시작해 헤시오도스, 테오크리토스와 모스쿠스까지 목가적 시가 은폐한 농촌 민중의 실상을 환기시킨다. 한마디로 말해 시인들이 노래하는 황금시대, 즉 “노동하지 않아도 저절로 생산하는 자... -
사이버레커들의 서식지
사이버레커를 처음 실감한 것은, 2022년 12월30일이었다. 이태원 참사가 벌어진 지 두 달하고 하루 지나서인데, 녹사평역에서 이태원 쪽으로 가는 길에서 추모 문화제를 하는 자리였다. 날씨가 많이 추웠지만 춥다고 말하는 것도 산 자의 투정 같은 생각이 들었다. 추모 문화제가 있기 한참 전부터 행사장 옆에는 딱 봐도 어떤 부류인지 알 만한 사람들이 휴대폰으로 현장 중계를 하고 있었다. 다른 집회 현장에서도 본 모습이라 그리 낯설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게 누구든 현장을 중계하는 데 ‘사명감’을 가진 사람들이 신기하기만 했다. 따지고 보면 우리 모두는 페이스북을 통해서건 인스타그램을 통해서건 현장을 알리는 데 익숙해져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그날 만난 유튜버들은 뭔가 남달랐다. 얼굴을 뒤덮은 증오심이 느껴졌는데, 추모 문화제가 시작되자 우리 쪽으로 눈을 번득이고 있다가 정권을 비난하는 말이 나오면 소동을 부리고는 했다. 동시에 언어 충돌 상황을 중계했다.‘사이버레커’라는 말... -
‘이따금씩’이 만드는 민주주의
‘지옥’이란 말이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쓰이는 세상이다. 예전에는 악행을 저지른 사람이 죽어서 가는 곳이라 알려졌는데 그것은 비단 기독교의 영향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천국도 가고 지옥도 간다는 말은 현세의 제도나 법으로는 다룰 수 없는 나쁜 행동과 마음가짐을 향한 민중의 바람 내지 자기 단속이었을지 모른다. 다르게는, 고달픈 현생의 삶에 대한 보상 욕구이기도 했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착한 사람은 하늘이 먼저 데려간다는 말을 나는 제법 듣고 자랐는데, 그것은 그 사람에 대한 안타까움과 죽어서라도 이승의 고달픔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마음이었으리라 생각해 본다.그런데 이 지옥의 의미가 점점 달라졌다. 예전에도 현실의 삶이 너무 힘들면 왕왕 ‘사는 게 지옥’이라고 했지만, 언젠가부터 우리가 지금 사는 이곳 전체를 지옥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얼마 전 유행했던 ‘헬조선’도 지금 여기가 지옥이란 뜻 아닌가. 심지어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말도 있었는데, 이는 어느... -
시인의 죽음
소크라테스는 죽음 직전에 시를 썼다. 스스로를 아테네의 쇠파리라고 부를 정도로 논리적인 변증술로 사람들의 무지를 일깨워 주는 것을 사명으로 삼은 사람이 시를 쓴 것이다. 사형이 집행되는 날, 소크라테스를 따르던 많은 사람들과 가족이 찾아오는데, 이때 있었던 마지막 대화에서 케베스는 이솝의 우화를 시로 쓴 적이 있는지 묻는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자기가 꾼 꿈들이 시를 지으라고 명한 듯해서 “신의 소임을 다하기 위해” 시를 썼다고 대답해 준다. 물론 소크라테스는 “철학은 가장 위대한 시가”로 덧붙이지만 죽음 직전에 시를 썼다는 <파이돈>에 등장하는 이 일화는, 아테네 시민들을 말(로고스)로써 성가시게 하던 소크라테스의 또 다른 내면을 보여준다.소크라테스는 재판에서 시인들이 “모종의 본성에 따라서” 시를 지을 뿐이지 지혜가 있어서는 아니라는 의견을 피력했는데 결국 그 자신도 시의 힘을 어쩌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사람을 이성이나 정신으로만 환원할 수 없음을 죽음 앞에서 ... -
박정희 동상 말고 전태일기념관을
박정희가 독재자 이승만을 몰아낸 4·19혁명을 짓밟고 군사쿠데타로 등장한 1961년에 전태일은 13세였다. 전태일이 1970년 11월13일 자기 몸에 불을 놓았으니 9년6개월 정도를 박정희와 전태일은 ‘공적’ 공기를 함께 마시며 산 셈이다. 실제로 전태일은 근로기준법마저 잘 지켜지지 않는 현실을 바꿔보기 위해 대통령 박정희에게 탄원서를 보내기도 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전태일의 그런 ‘상소’는 다소 순진하게 보이겠지만, 당시 전태일에게는 해볼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만 했고, 알다시피 그 마지막 선택이 자기 몸에 불을 놓는 것이었다. 민주화 세력, 박정희 산업화 인정1970년이라면 새마을운동이 막 태동하려는 시점이자 포항제철소가 공장 가동을 시작한 해였다. 정치적으로는 7대 대통령 선거를 1년 정도 앞둔 시점인데, 평화시장의 일개 재단사인 전태일의 호소가 장기 집권에만 관심이 있던 박정희에게 무슨 의미였건 전태일과 박정희가 공적으로 연결된 순간이 바로 전태일의 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