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정희 동상 말고 전태일기념관을
박정희가 독재자 이승만을 몰아낸 4·19혁명을 짓밟고 군사쿠데타로 등장한 1961년에 전태일은 13세였다. 전태일이 1970년 11월13일 자기 몸에 불을 놓았으니 9년6개월 정도를 박정희와 전태일은 ‘공적’ 공기를 함께 마시며 산 셈이다. 실제로 전태일은 근로기준법마저 잘 지켜지지 않는 현실을 바꿔보기 위해 대통령 박정희에게 탄원서를 보내기도 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전태일의 그런 ‘상소’는 다소 순진하게 보이겠지만, 당시 전태일에게는 해볼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만 했고, 알다시피 그 마지막 선택이 자기 몸에 불을 놓는 것이었다. 민주화 세력, 박정희 산업화 인정1970년이라면 새마을운동이 막 태동하려는 시점이자 포항제철소가 공장 가동을 시작한 해였다. 정치적으로는 7대 대통령 선거를 1년 정도 앞둔 시점인데, 평화시장의 일개 재단사인 전태일의 호소가 장기 집권에만 관심이 있던 박정희에게 무슨 의미였건 전태일과 박정희가 공적으로 연결된 순간이 바로 전태일의 탄... -
대파의 진실
올겨울엔 시금치를 자주 무쳐 먹었다. 겨울 시금치나 겨울 무가 맛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지만 그렇다고 단지 그 이유만으로 시금치를 자주 먹은 것은 아니다. 포항초 한 단에 4000원이 넘을 때도 있었고 남해 섬초는 꾸준히 3000원대를 유지했다. 싸다곤 할 수 없지만 시금치를 데쳐서 참기름, 담근 간장, 다진 마늘을 넣어 무친 뒤 참깨를 뿌려 먹는 맛의 즐거움 때문인지 가격은 생각하지 않은 것 같다. 농산물 가격에 내가 좀 둔하기도 하지만, 좀 비싸면 어떠랴, 관대한 생각을 가진 것도 사실이다. 그런 농산물 가격은 지난 설 전에 최고점을 찍었다. 그때는 이미 과일에 손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재작년인가, 처가에 갔을 때 처남이 대파를 한 아름 뽑아서 막 떠나려는 우리 차에 실어준 적이 있다. 대파나 양파는 우리 가족에게 거의 필수 식재료이기 때문에 처남에게 미안하면서도 그렇게 마음이 풍요로울 수가 없었다. 사실 명절 귀경길 풍경은 여러모로 흥미로운데 그중 제일은 언뜻언뜻 보이는 ... -
그린벨트 해제는 민주주의의 해제다
배우 맷 데이먼이 주연으로 출연한 <엘리시움>(2013)은 너무도 빤한 할리우드 SF 액션물이다. 오래전에 봤던 기억으로는, 망가질 대로 망가진 지구에는 가난한 사람들이나 로봇을 생산하는 공장 노동자들을 놔두고 부자들은 지구 바깥에 ‘엘리시움’이라는 인공 별로 이주해 산다. 생긴 모양은 지금 현존하는 국제우주정거장을 닮았다. 폐허가 된 지구를 버린 부자들은 거기에서 안락한 삶을 누리는데 몇번의 스캔으로 모든 병을 고치는 기계가 집집마다 구비되어 있기도 하다. 버려진 지구에서 사는 가난한 사람들은 로봇 경찰의 강압적인 통제를 받지만 엘리시움에서는 로봇이 시민들을 보호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엘리시움(Elysium)은 사람이 죽으면 가는 어두운 하데스와 달리 신에 의해 선택된 자들이나 선하게 산 사람들, 또는 영웅들이 죽으면 가는 이상적인 사후 세계라고 하는데, 영화에서는 돈이 신의 역할을 하는 셈이다.지난 2월21일 윤석열 대통령은 “지방 일자리를 만들고 활력을 불어넣... -
잿더미 앞에서
김남주가 처음 세상에 발표한 시는 ‘잿더미’라는 작품이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김남주 시의 명징함과 달리 이 시는 상당한 모호함으로 뒤덮여 있다. 그런데 그것은 의미의 차원에서 그런 것이지 작품의 구도나 리듬, 상징은 김남주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준다. 꽃과 피, 영혼과 육신, 황혼과 새벽, 봄과 겨울 같은 이미지들이 팽팽한 긴장감을 품고 있는 것이다. 시의 마지막에서는 꽃과 피, 영혼과 육신이 서로 맞물리고 스미면서 “그것”으로 합쳐진다. 아마도 김남주는 이항대립의 긴장 자체가 새로운 시간의 과정이라고 본 것 같다. 신념과 의지가 평생 김남주의 시를 지탱해준 힘이었던 건 맞지만, 그것도 주어진 현실에서 의미를 찾아내 ‘세계’를 수립하지 못하면 현실은 카오스에 머물고 만다. 어쩌면 ‘잿더미’는 유신 치하에서 젊은 김남주가 모색하던 길의 희미한 입구였는지도 모르겠다. 즉 꽃과 피는 김남주가 잿더미를 뒤적여 찾아낸 꺼질 수 없는 불씨였는지도.잿더미가 숨 막히는 현실을 가리키는 시적 ... -
잿더미 앞에서
김남주가 처음 세상에 발표한 시는 ‘잿더미’라는 작품이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김남주 시의 명징함과 달리 이 시는 상당한 모호함으로 뒤덮여 있다. 그런데 그것은 의미의 차원에서 그런 것이지 작품의 구도나 리듬, 상징은 김남주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준다. 꽃과 피, 영혼과 육신, 황혼과 새벽, 봄과 겨울 같은 이미지들이 팽팽한 긴장감을 품고 있는 것이다. 시의 마지막에서는 꽃과 피, 영혼과 육신이 서로 맞물리고 스미면서 “그것”으로 합쳐진다. 아마도 김남주는 이항대립의 긴장 자체가 새로운 시간의 과정이라고 본 것 같다. 신념과 의지가 평생 김남주의 시를 지탱해준 힘이었던 건 맞지만, 그것도 주어진 현실에서 의미를 찾아내 ‘세계’를 수립하지 못하면 현실은 카오스에 머물고 만다. 어쩌면 ‘잿더미’는 유신 치하에서 젊은 김남주가 모색하던 길의 희미한 입구였는지도 모르겠다. 즉 꽃과 피는 김남주가 잿더미를 뒤적여 찾아낸 꺼질 수 없는 불씨였는지도.잿더미가 숨 막히는 현실을 가리키는 시적 ... -
스스로 새로워지지 않는다면
‘새로움’은 여전히 문학에서 금과옥조처럼 여겨진다. 몰라서 그렇지 문학에서만 그러지는 않을 것이다. 다른 예술 장르에서도 새롭지 않으면, 즉 기존의 것을 단순 되풀이하면 작품이 주는 감동은 현저히 떨어진다. 때에 따라서는 우리 인식과 정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이든, 그게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새로운 것이든 낡은 것이든, 현실 조건 또는 역사라는 불빛에 비춰봐야 한다. 지금은 좋아 보이지만 실상은 위조지폐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누군가 작정하고 위조한 게 아닌데도 시간을 지나오면서 진품의 자격에 미달하는 사태가 벌어진다는 것이다. 이럴 때 적잖은 사람들은 진품이었던 과거를 역설하거나 본래의 순수한 의도를 강조하며 항변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품이 아닌 것을 진품이라고 인장을 찍어줄 순 없는 노릇이다.문학에서 새로움이 강조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문학이야말로 구습을 깨고 나아갈 수 있는 적임자기도 하며 또 문학은 그래야 할... -
‘떴다방 정치’의 시대에
보일러의 에어(air)를 한바탕 뺐는데도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엊그제 아파트 관리실에 전화를 걸어 보일러를 제대로 때고 있는 것인지 확인하고 나서야 다행히 방바닥에 온기가 조금 돌기 시작했다. 몇 년 전부터 슬슬 재개발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아파트가 낡긴 했지만, 막상 재개발을 하면 어쩌나 하는 찬바람이 마음 한구석에 분다. 그것은 서울이나 서울 언저리에서 사는 게 일종의 난민 같다는 느낌을 아직 벗어버리지 못해서일 것이다. 그래서 재개발을 시작하면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하는 막막함이 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돌아보면 한자리에서 오래 살긴 했구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내게는 유목의 피가 부족해서인지 다른 곳으로 이사 갈 엄두가 잘 나지 않는다. 사실 이런 걱정도 ‘가진’ 자라서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여기서 내 말문은 막히고 만다.) 겨울이 두려워지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은 현상이다. 지금은 사계절이 명확한 때가 아니어서일까. 사람이란 본래 미래의 일에 얼마간 예측 ... -
한국의 아이히만들
이태원 참사가 일어난 지 1년이 지났다. 아직도 그 일이 명료하게 언어화되지 않고 아프게 버석거리기만 한다. 최근에 이태원 참사를 수사한 특별수사본부의 수사 기록을 분석한 기사를 꼼꼼히 읽어봤다. 그러다가 왜 자꾸 말더듬이처럼 이태원 참사에 대한 언어가 답답하기만 한지 짚이는 데가 생겼다. 수사 기록마저 이제는 진부해질 정도로 우리는 그 사건의 진실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작년에 참사 현장을 찾았을 때, 참사 당시의 인파를 상상해봤지만 너무도 비현실적이어서 그것마저도 힘들었다. 그 당시 누구나 감지했던 국가안전시스템의 혼란은 수사 기록에 잘 담겨 있었다. 사건의 진실을 탐색하고, 의미화하고, 다른 길을 상상해야 할 언어가 막히는 것은 차라리 당연했다. 기성 언어의 틀로 참사의 진실이 포착되고 마는데 굳이 다른 언어가 필요할 리 없기 때문이다.우리는 문명화 과정을 폭력의 절제나 폭력을 사회에서 제거해 국가에 귀속시키는 것으로 규정하고는 한다. 그리고 국가에 귀속된 폭력이 ... -
복사씨와 살구씨와 곶감씨의 세계
시인 김수영의 새로운 민주주의‘복사씨…’ 세계가 생각나는 요즘 저 씨알들이 가진 건 혐오가 아니다 새잎을 틔울 경이와 설렘뿐이다 그것이 없는 민주주의는 위태롭다히틀러와 나치 일당의 유대인 혐오는 그들의 영혼에서 작동하는 원자로였다. 나치의 유대인 혐오가 학대와 학살로 이어진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와 더불어 우생학적 사고에 입각한 ‘비생산적 인간’에 대한 학살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장애가 있는 어린이들을 ‘소독작업’이라는 규정 아래 가스나 독극물 또는 총으로 쏴 죽이거나 굶겨 죽인 것이다. 이른바 ‘최종 해결’이라는 유대인 학살을 유대인 혐오 하나로 설명하기 힘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히틀러는 “강자에게 자리를 내주기 위해 약자를 파괴하는, 자연의 인간성”을 공공연하게 말해왔으며, 1929년 뉘른베르크 나치 전당대회에서 이것은 유대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님을 밝히기도 했다.유대인 학살에 대한 지그문트 바우만의 시각은 깊은 통찰의 ... -
깊은 수치와 무기력의 핵심
한·미·일이 나아가려는핵동맹은 전쟁 위험 높이고 생명터전 불가역적으로 퇴행시켜 이게 수치와 무기력의 핵심일 것 그러나 여기 머물러 있을 순 없다일본 정부의 원전 오염수 방류 문제로 주위 사람들이 깊은 수치심과 무기력을 토로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2014년 7월 후쿠시마현을 강타했던 바다에게 보복이라도 하려는 것일까, 방사성 물질로 범벅 된 오염수를 지난 8월24일 전격 방류하기 시작했다. 이는 오래전부터 예고된 것이기는 하지만 사람의 감정이라는 것은 실제로 사태가 일어나고 나서야 심하게 움직이기 마련인지라 방류에 대한 설왕설래가 있었던 때와는 다른 충격으로 다가왔다.그런데 우리를 수치심과 무기력에 빠뜨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바다에 대한 원초적인 감수성이 직격을 당한 탓이 컸을 것이다. 이는 단지 바다에 대한 낭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우리 삶은 가시적으로는 육지에서 꾸려지는 것만 같지만 사실 바다에 의존하는 바 크다. 단순히 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