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예의 전당
생쥐로 태어나 얼마 지나지 않았을 즈음 깨달았다. 나는 보통의 표준적 생쥐로 살아갈 수 없는 운명이라는 것을. 환생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오류 탓에 나의 뇌에는 한 인간의 기억이 버그로 남았다. 전생이니 환생이니 하는 말에 코웃음 치던 어리석은 인간에게 이것이 바로 인과응보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무너져가는 도서관 속에서 헤매고 있다. 날마다 자라나는 앞니로 책 속에서 찾아낸 낱말 몇 개를 갉아먹는다. 평생 도서관을 제집처럼 드나들다가 마침내 열람실 책상에 엎드려 종말을 맞이한 인간의 기억을 여전히 지니고 있기에. 폐허가 된 도서관은 거대한 미로다. 수백개의 서가들, 꽂혀 있는 수천만권의 책들, 그 속에 적힌 깨알 같은 낱말들이 수천만 갈래의 길을 만들고 있다. 검은 글자들과 하얀 빈자리가 만들어내는 길이다. 오래전에 이미 사라진 존재가 머릿속에서 중얼거리며 끼어든다. 책 속에 길이 있다고? 길 따위는 없어. 평생 진실을 찾아 헤맸으나, 결국 아무것도 발견하지... -
눈보라
흩날리던 눈송이가 눈보라로 변했다. 허겁지겁 움직이는 와이퍼가 감당 못할 기세였다. 고속도로를 달리던 차들이 비상등을 켜고 속도를 줄였다. 11월 중순의 폭설이었다. 그는 트럭 안 어딘가에 스노체인이 있는지 머릿속을 뒤져 보았다.눈과 바람은 쉬이 잦아들지 않았고, 차들은 가다 서다 하면서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트럭 안은 고요했다. 김 서린 유리창과 함께 몽롱해지는 의식을 다잡으려 그는 어디로 몇시까지 가야 하는지 떠올려 보았다. 목적지도 시간도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잠이 모자란 탓인가. 어젯밤에도 휴게실에 차를 세우고 두 시간 남짓 눈을 붙였다. 그는 집에서 나온 지 며칠째인지 헤아려 보았다.퍼붓는 눈발 속에 도로를 가득 메우고 있는 차들을 바라보았다. 모두 어디로 가는 것일까. 그는 화물을 싣지 않은 차들이 왜 굳이 도로를 달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뒤에 실린 짐이 없다면, 그 짐을 목적지까지 실어 날라야 한다는 약속이 없다면, 그것으로 돈을 벌어 트럭 ... -
폐허 관광
어떻게 종말이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그저 시작되었고, 진행되고 있으며,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알 뿐이다. 모든 경위를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없었다. 과거에 읽은 책에서는, 시간이 돌연 끊어졌다가 다시 출현한 뒤 단절된 시간을 가늠하는 것은 본래 불가능한 일이라고 했다.1) 단절 이전의 시간을 나는 ‘과거’라고 부른다. 지구의 기후가 변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과거가 끝나가는 시점이었다. 만년설이 녹아내리고, 빙하가 사라졌다. 태풍이 계절을 가리지 않고 날뛰었다. 긴 홍수와 긴 가뭄에 번갈아 시달리는 나라들도 있었다. 전기와 물의 가격이 오르다가 끝내 배급이 시작되었고, 신선한 채소와 과일을 더 이상 구할 수 없었다. 통조림 같은 것들이 진열대를 채웠다. 전쟁과 폭동이 일어났고 뉴스에서는 연일 전 세계를 떠도는 난민의 행렬을 보도했다.10월의 어느 날 저녁이었다. 때아닌 태풍이 몰아쳤다. 뒤이어 오래 폭우가 쏟아졌다. 뉴스를 확인할 수 있었던 몇 시간 동안 쓰나미가 ... -
항아, 달의 이야기
세상에 딱 둘밖에 없다는 불로장생의 약을 눈앞에 두고, 남편과 아내의 대화는 끝없이 표류했다. 한 개를 먹으면 늙지 않고, 두 개를 먹으면 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간다는 신령스러운 약이었다. 누가 어떻게 약을 먹어야 할지 의논하면서 사흘 밤낮을 지냈으나 결론이 나지 않았다. “태양이 지는 쪽을 향해 날마다 걸었어. 당신도 알다시피 한꺼번에 하늘로 떠오른 열 개의 태양 가운데 아홉 개를 내가 활로 쏘아 떨어뜨렸잖아? 세상이 불구덩이가 되는 것을 구한 공만으로도 약은 내 맘대로 처분하는 게 마땅해. 생각해 보면 태양이 하나라서 다행이었어. 여러 개였다면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우왕좌왕했을 거야. 험한 산을 넘고 지평선이 아득한 광야를 가로질렀어. 울창한 숲에서 길을 잃기도 했지. 그러면서 여섯 괴물을 만나 차례로 싸움을 벌여야 했어. 길고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괴물, 사람 얼굴을 하고 아기 우는 소리를 내는 소, 머리가 아홉 개 달린 이무기, 폭풍을 일으키는 사나운 새, 코끼리를 ... -
나비를 보았다
A구간 3번 정류소에서 셔틀버스를 기다릴 때부터 마음이 무거웠어요.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결심한 곳으로 고작 여섯 달 만에 돌아가는 길이었으니까요. 버스는 정해진 시각에 어김없이 왔고, 떨어지지 않는 걸음으로 버스에 올랐어요. QR코드를 찍고 나서 자리에 앉았죠. 버스 안은 고요했어요. 작업장에 도착하기 전까지 모두 잠시라도 눈을 붙이려 하니까요. 창틀 위에 앉아 있는 나비를 발견한 것은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려던 순간이었어요. 제비나비라고 부르던가요? 날개를 활짝 편 검은색 나비였죠. 처음에는 헛것을 보았나 했어요. 움직이지는 않았지만 분명 나비였어요. 그냥 검은색이라고만은 할 수 없었어요. 달이 뜬 밤하늘의 빛깔이었죠. 얼핏 보면 검은빛이 도는 보라이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푸른빛이 비치는 색이지요. 중국의 구이저우성 깊은 산속에 모여 산다는 이들을 떠올렸어요. 달과 밤하늘을 좋아해서 같은 빛깔의 옷을 만들어 입는다는 사람들이요. 천을 짜면 우선 남전초라는 풀로 열 번 이상... -
비밀의 완성
어느 날 아이는 상자 하나를 손에 쥐게 되었다. 다소 거친 표면에 나이테가 줄무늬처럼 보이는 나무 상자였다. 뚜껑에는 경첩이 있어 여닫을 수 있고, 단순한 형태의 잠금장치도 달려 있었다. 어른용 손목시계 하나가 들어가기에 맞춤한 크기였다. 아이는 설레는 마음으로 뚜껑을 열어보았다. 상자 안은 비어 있었다.어릴 때는 대부분 그렇듯 아이도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아이 노릇은 힘들었다. 하지 말라는 것도 많고 하라는 것도 많았다. 아이는 어른의 삶을 잘 몰랐으나 그들은 다르게 사는 것 같았다. 어른들은 아이 앞에서는 말을 멈추기 일쑤였고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궁금한 것을 물어도 제대로 된 대답이 돌아온 적은 드물었다. 어른의 삶에는 비밀이 깃들어 있었다. 아이에게 비밀이란 뚜껑이 달린 빈 상자 같은 거였다.아이는 상자 안에 무엇인가를 넣어두고 싶었다.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동구 밖에 외따로 서 있는 포도나무였다. 며칠 전 아이는 여름의 첫 포도송이를 발견한... -
달팽이의 순간 이동
산길을 벗어나, 아무개는 숲속으로 들어섰다. 볕은 뜨거운데 공기는 축 처진 물주머니 같은 날이었다. 지구가 위험할 정도로 뜨거워지고 있다는 소문이 돌지만, 무더위가 시작되기에는 아직 일렀다. 적어도 장마는 끝나야 하지 않나. 몸이 기억하는 모든 것을 의심하게 되는 시절이다. 바람 한 줄기가 간절했다. 아무개는 등허리를 곧게 펴고 기지개를 켰다. 잠시 그대로 서 있으니 나뭇가지처럼 뻗은 양팔 사이로 바람이 휙 지나가는 듯했다. 나무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든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아무개는 그 자세 그대로 서 있었다. 흉내를 내면 닮기라도 하겠지. 몇 달 전에 부러져 여전히 보호대를 차고 있는 오른쪽 손목이 근질근질했다. 조금 전에 지나쳐 온 아파트 단지 안에는 버드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몸통과 굵은 가지들이 뭉텅뭉텅 잘려 나간 모습을 목격한 게 봄이었다. 얼마 안 있어 아무개는 의자 위에 올라가려다가 넘어지며 손목을 다쳤다. 동티가 난 게야. 오며 ... -
은행나무 꽃
모든 나무는 이주자이다. 운명에 따라, 혹은 유전자에 따라 씨앗은 바람에 날리거나 강물과 빗물을 따라 흘러간다. 단맛에 이끌린 짐승과 날짐승, 인간의 몸을 빌리기도 한다. 멀리 더 멀리 가려는 힘이 꺾이면, 뿌리를 내리고 몸을 펼쳐 잎을 틔운다.나는 어미의 그늘에서 자라던 어린 은행나무였다. 네 할아버지가 나를 개울가로 옮겨 심었다. 그리고 30년 뒤에 네가 태어났다. 열 달 동안 너를 품은 태를 네 할머니가 개울물로 말갛게 씻었다. 볕이 잘 들고 사람 발길이 뜸한 곳에 묻었다. 한두 해 뒤에는 내 뿌리가 가닿을 만한 자리였다. 이제 막 꽃필 준비를 시작한 나는 그 모든 장면에 배경으로 서 있었다. 너와 나는 한 오라기 실낱의 인연인 줄만 알았다.세 살 무렵 너는 열병을 앓았다. 지루한 봄 가뭄이 지속되던 나날이었다. 열에 들떠 네가 뒤척일 때, 나는 땅속 깊이 뻗은 뿌리로 식은땀 같은 시큼한 물기를 빨아들였으나, 갓 돋아난 잎의 가장자리는 남몰래 말라갔다. 때 이른 ... -
야간산행
복잡한 심사를 가라앉히려는 산행이었다. 산길을 오르며 몸은 점점 무거워졌으나, 마음은 그만큼 무게를 덜었다. 그래도 해가 지기 시작했을 때 돌아서야 했다. 휴대폰 손전등을 켜는 순간에도 기회는 있었다. 저 아래 도시의 불빛이 훤히 보이는 자리였다. 왠지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몸을 더 힘들게 하고 싶었다. 동네 뒷산이었고, 정상까지 돌계단이 이어지는 것도 알고 있었다. 숨을 몰아쉬며 계단을 오르는데 무엇인가가 눈앞으로 휙 지나갔다. 등골이 오싹했다. 불빛의 움직임 때문에 헛것을 본 것이겠지. 진정하고 다시 걸었다. 산이 깊어질수록 덤불에서 검은 그림자가 불쑥 튀어나오기도 하고 바스락 소리도 들렸다. 식은땀이 흘렀다. 휴대폰 배터리가 다한 듯, 갑자기 손전등이 꺼졌다. 기다렸다는 듯 새카만 어둠이 주위를 짓눌렀다. 이제 헛것은 보이지 않았다. 산에서 내려가는 일도 만만치는 않을 것이다. 작정하고 다시 돌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땀으로 몸이 흠뻑 젖었다. ‘언제부터인가 줄... -
사마리아 교정 프로그램
밤거리다. 어디선가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걸음을 멈춘다. 둘러보니 노새 한 마리가 전봇대 앞에 서 있다. 비쩍 마른 정강이에 선혈이 낭자하다. 하얗게 드러난 뼈도 보인다…노새가 왜 이런 곳에? 눈을 떴다. 흰 벽으로 둘러싸인 낯선 방이다. 여전히 꿈속인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는데 옆의 협탁 위에 놓인 얇은 책자가 눈에 들어왔다. 표지에는 <사마리아 교정 프로그램>이라고 적혀 있다. 손을 뻗어 펼쳐보았다. ‘당신이 이것을 읽고 있다면, 교정 대상자로 선택된 것이다. 사마리아라는 프로그램의 명칭은 성경 속 이야기에서 비롯되었다. 어느 날 율법 학자가 예수를 시험하고자 질문한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는데, 누가 우리의 이웃입니까. 예수는 강도를 만나 길에서 죽어가는 사람을 예로 든다. 같은 유대인인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를 외면했다. 그러나 여행 중이던 사마리아인은 불행을 당한 이를 알아보았다. 가까이 다가가 기름과 포도주를 부어 상처를 치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