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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서울 아파트 판 게 '패착'?…귀농 10년, 이만하면 됐다
촌구석 라디오에서 크리스마스 캐럴이 나온다. 이른 감이 있다 했더니 서울에 눈이 왔나 보다. 우리나라의 모든 시점은 서울이니 당연하다. 노래가 말했다.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 baby”란다. “크리스마스에 바라는 것은 아가 너뿐이여”라는 얘기다. 이기적이고 극단적이다. 노래는 계속 소원을 빌면서 “나 많은 거 바라는 사람 아녀. 그냥 너만 내 것이면 돼” 이런다. 관계에 따라 섬찟할 수 있는 내용이다. 크리스마스의 상징이 사랑이라 하니 “너를 원한다만 성탄절만큼은 네 맘대로 놀아보렴” 쪽이 나아 보이는데. 내가 시비 걸 일은 아니다.도시의 12월이나 농촌의 이 무렵 떠오르는 색깔은 빨간색이다. 산타클로스의 붉은 의상이 한 음료회사의 마케팅으로 만들어진 뿌리 없는 색깔이라면 김장의 빨간색은 묵직하고 강렬하며 현실적이다. 그냥 찍어 바르면 나오는 색이 아니다. 고춧가루 하나만으로는 깊은 색을 낼 수 없다. 20여가지 재료로 만든 ... -
(19)혼돈·파괴·망각의 두 달···물에 잠긴 집은 얼추 돌아왔지만
아침마다 먹는 약을 입에 털어넣고그 입에 라이터 불을 갖다 댄다쓰레기를 없던 것처럼 처리하는 게 아니라 모으고 옮기고 숨긴다“선재 아빠 올 거 같아 뜸벙뜸벙 뜯어 넣고 수제비 좀 였어요.”간전댁할머니가 부엌에서 작은 소반 위 큰 대접을 내오며 말씀하셨다. 거짓말하실 분이 아니다. 못 뵌 새 접신(接神)하신 듯하다. 집이 침수된 후 할머니댁 발걸음이 줄었고 전화도 못 드렸다. 무슨 근거로 내가 올 거라 짐작하신 걸까. 그냥 들렀는데.“기름 짜도 못 하겄는디요…….”마루 구석에서 끌어낸 납작한 핏빛 바가지에 두 손 모아 두 번이면 충분할 만큼 참깨가 담겨 있다. 모처럼 참기름을 짜 보려고 한 오십 평 심은 깨를 태풍이 쓸어갔다. 태풍 한두 번 겪고 농사 서너 번 망치셨을까. 갈무리를 해주신 할머니가 양 적은 것이 당신 탓인 양 미안해하셨다. 정작 나는 집이 물에 잠긴 후 통이 커지는 부작용으로 그 정도의 피해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 -
(18)이 하늘…위로인가 염장지르는 건가, 이 또한…살아가다보면, 지나가겠지
수해 이후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날 이전의 고민은 싹 사라져근데 그게 아내의 화를 돋운다산이 무심하다. 서시교가 닳도록 철물점을 오가면서 마주하는 지리산은 하나도 안 슬프다. 구름은 왜, 또 아름답기까지 하다. 어쩌다 본 노을은 이 세상 것이 아니었다. 현실감이 떨어진다. 내가 그렇다. 조용하게 피해를 입어서인지 내 꼴이 내 것 같지 않다. 가끔 이상하다. 왼쪽으로 누우면 가슴이 먹먹하고 울컥해진다. 오른쪽은 덜하다. 이유는 모른다. 수해 충격으로 쓰러진 냉면집 사장님 모습이 떠오르고 나흘간 진흙 가득한 집에서 주무셨다는 할머니도 생각난다. 축사로 달려가다가 코앞에서 물에 멈춘 사람들도 보인다. 사장님과 할머니 얼굴도 모르고 축사에 가 본 적 없다. 경험은 꿈처럼 가물거리고 생각과 상상은 경험처럼 굳어진다.심하진 않지만 후유증이 생겼다. 기억상실, 집중력 저하, 조울증세도 보인다. 어찌 보면 다행이다. 그날 이전의 고민이 싹 사라졌다. 뭘 걱정하... -
(17)설마 했던 수마…하늘은 인간적이지 않았지만 인간은 ‘하늘스러웠다’
“섬진강 둑이 무너졌나봐”…물은 조용하고 은근하게 좀비처럼 불어났고 난 보트를 타고 탈출했다소중한 것들을 삼켜버린 난장판, 군에서 달려온 아들을 붙잡고 아내는 울었고 아들은 엄마를 안았다…“괜찮아, 내 맘속에 다 남아 있어”난 사람들이 이럴 줄 몰랐다. 사람은 원래 이기적이고 정치적이고 못됐다고 생각했는데…한참 잘못 알았다먼 길 기꺼이 달려와 손을 보태고 마음을 건네고 돈을 보내고…그들의 표정과 땀, 목소리까지 내겐 아름다운 하늘이었다징그럽다. 7월 한 달, 26일 비가 내렸다. 이러다간 콩이고 참깨고 잎이 다 녹아 내리게 생겼다. 종종 “비 맞으면서 일하는 것도 시원하고 괜찮아요” 떠들었지만, 그건 일하다가 내리는 비를 맞을 때 얘기지 비 오는데 일하러 나가기는 쉽지 않았다. 무기력한 자가격리가 이어졌다. 늦은 밤 TV는 산사태 지역을 현장중계한다고 했지만 기자는 현장에 접근할 수 없다며 다급한 상황을 목소리와 표정으로 대신 전했다. 인명... -
(16)잡것들이 떡잎 나기 무섭게 쪼아대지만 ‘콩 땜질’ 애써볼란다, 포기는 그다음이니까
남보다 느려 덕본 감자와 달리 새들의 습격에 몰살당한 콩밭에 독수리 연 달고 허수아비 세우고 빈 구멍 찾아 다시 콩 심어본다범인이 현장을 떠난 지 채 얼마 안 돼 보였다. 발자국과 절도의 흔적이 이슬 위로 남아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지만 이미 시야에는 없었다. 재빠른 놈들. 그놈들은 사흘 전에 심은 콩에서 떡잎이 올라오기 무섭게 모가지를 끊어 물고 갔다. 산비둘기인지 물까치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중요하지도 않다. 그냥 새들이다. 잡것들이다. 새 피해를 막기 위해 그물을 씌운 적도 있다. 그해 그물 안으로 기어들어가 배 터지게 먹고는 빠져 나오지 못해 죽은 비둘기를 대면한 이후 차라리 피해를 좀 보더라도 쫓는 쪽을 택했다. 흔히들 ‘새대가리’라고 놀리지만 가족들은 끔찍이 챙긴다. 먹을 만한 콩밭을 확인한 다음에는 가족 친지를 동반하고 조찬부터 만찬까지 해결한다. 떡잎 사라진 자리에 다시 콩을 넣고 땅속 콩까지 훑어간 구멍에도 콩을 채워보지만 당해내... -
(15)환장할 ‘물 보급투쟁’…다 적인 줄 알았는데 모두 나의 동지였다
내 논 앞에서 입 벌린 30개의 논 위아래서 치열한 아우성 남들은 저리도 잘 받았는데… 물 먹는 하마가 있는 게 분명하다 매년 요맘때면 눈이 돌아간다. 그득그득한 논의 물을 볼 때마다 환장하겠다. 남들 논 얘기다. 어찌 저렇게 물을 잘 받았을까. 아니, 받아 놓은 물이 어떻게 그대로 있을까. 우리 논은 아무리 물을 넣어도 차 오르질 않는다. 물 먹는 하마가 서식하는 게 분명하다. 올해로 벼농사 9년째인데 마음대로 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묵혔던 논을 얻은 탓에 논두렁 관리가 제대로 안 돼 있었고, 물은 논두렁만이 아니라 바닥으로도 빠져나가는 모양이었다. 제초제를 안 쓰니 물 관리는 남들보다 중요하다. 어찌 보면 치명적이다. 반나절만 논 바닥이 드러나도 풀이 올라오고, 수면 위로 솟은 풀은 우렁이가 먹지 않는다. 풀과의 전쟁은 가장 뜨겁다는 7월부터 이삭이 패는 8월 중순 이전에 승부를 봐야 한다.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여덟 번 해봤다. ... -
(14)봄의 끝물 허망한 꿈…괜찮다, 5월은 또 오고 내 진짜 꿈은 살아있으니
아카시아 향 진동하고 낮은 곳에선 찔레꽃 지천인 때 농사 10년차에도 붙지 않는 속도 문제는 참 무례한 시간이다 꽃이 벌을 유혹하는 방법은 빛깔이라는데 향기는 사람을 위한 걸까. 아카시아 향이 진동한다. 다른 꽃과 다르게 아카시아는 기분 좋은 추억을 소환한다. 어릴 적 동네 뒷산에서 꽃 덩어리 훑어 먹던 기억, 아카시아라는 이름의 껌과 노래, 막연한 연애 시절의 느낌 따위들. 가슴으로 아파하고 꿈으로 치유하던 시절이다. 덩달아 낮은 곳에선 하얀 찔레꽃이 지천이다. 송홧가루 줄어들고 아카시아도 꽃을 떨구니 곧 밤꽃이 상공을 지배할 거다. 꽃 모양은 기억에 없지만 냄새만은 두텁다. 아카시아 향이 아름다웠던 시절 연인의 향이라면, 밤꽃 냄새는 우중충한 중년 남성의 방구석을 떠오르게 한다. 억울하게도 아카시아는 향인데, 밤꽃은 냄새다. 향내 나는 사람이고 싶었는데 고구마 두둑 앞의 나한테선 땀 냄새만 풍긴다. 꿈도 흐릿한 냄새 나는 중년.시간은 ... -
(13)이번 공약 좀 봤냐?…‘농업’이 없다니, 누굴 호구로 아는 게 분명하다
‘농업인 잘살게 해주겠다’ 말하며 후보마다 ‘농업’ 고민·대안은 외면“나랏돈 쓰는 대책이라면 나도 한다” 시간차 공격이었다. 기온이 영하로 떨어진다던 그날 아침 걱정했던 서리는 내리지 않았다. 바람이 불어준 덕이었고 감자 싹은 무사했다. 그렇게 맘 놓고 지낸 다음날, 된서리가 내렸다. 감자 싹이 꼬실라졌다. 일기예보와 다르게 새벽 기온이 떨어졌고 얌전히 내려 앉은 서리에 연둣빛 싹은 불에 탄 듯 시커멓게 변했다. 오봉댁어머니는 괜찮다고 하셨다. 감자가 몸살을 앓는다고, 고생은 좀 한다고. 내 속이 이런데 제 속은 오죽하랴. 마음 쓰고 지킨다고 내릴 서리가 올라가겠나 싶지만 내가 방심한 탓에 쟤들이 다친 것 같아 미안했다. 아침부터 속 모르는 선거유세 차만 시끄러웠다.선거가 코앞이니 지들 코도 석자일 터, 읍내를 지날 때마다 모르는 사람들이 다시는 못 입을 옷차림으로 연신 고개를 숙이며 ‘빠이빠이’를 한다. 아는 사람인가 쳐다보면 웃기만 한다... -
(12)이런 꽃 저런 꽃 다 있는데…이런 분 저런 놈 있는 게 당연하지
각설이 닮아 죽지도 않고 온 봄꽃은 피었지만, 반갑지 않다코로나 무시하는 상춘객 싫고농사를 시작해야 하니 싫다감자 준비를 하는데 J가 왔다고양이 손이라도 빌릴 판인데일손 필요하면 전화하라면서조릿대만 만들어 돌아갔다굳이 봄이 왔다. 각설이를 닮아 죽지도 않고 또 왔다. 내 의중과 상관없이 닥치는 봄이 썩 반갑지 않다. 이런 계절성 정신질환이 언제 시작됐는지 모르겠다. 요 몇 년 새 부쩍 감정이 악화되는 추세에 있다. 이유는 여러 가지다.일단, 꽃들이 또 피고 난리다. 어느 한 번 예외가 없다. 백과사전에 의하면 꽃은 ‘속씨식물의 유성생식기관’ 혹은 ‘종자식물의 번식기관’이다. 쉽게 말하면 거시기이다. 벌이나 나비를 유혹하려고 화려한 편이다. 사람들이 그걸 보고 곤충처럼 환장한다. 물어보면 관음증은 아니란다. TV 뉴스에서 기자가 ‘코로나도 있는데 이렇게 여행 다니고 생각이 있는 거냐’ 하는 뜻으로 좀 다르게 물었더니 여행객은... -
(11)춘궁기가 닥쳐도, 바이러스가 번져도…꽃 안 핀 2월 없고, 보리 안 팬 3월 없댔당께
아직 감자밭을 안 갈았다 하니“암시랑토 안 혀요 늦은 거 아이라” 언제나 안심을 주는 오봉댁어머니 오봉댁서 뱃골 두둑 밥을 먹고 와 봄 작업 일정을 적다 TV를 켜니 그새 코로나19 확진자는 또 늘어 그러다 문득 씨감자를 확인하는데 전화벨이 울린다“감자 눈 땄능가요?” 간전댁할머니는 분명 초능력자다 “확 먹구 튀어버릴까?”농사지으며 식당을 운영하는 동생네 가게에서 밥을 먹다가 내뱉은 말이다. 지난가을에 80㎏씩 주문 받은 쌀을 10㎏씩 세번째 보냈다. 쌀값 선불로 받을 때는 달콤했으나 앞으로 다섯번은 택배비와 포장재값 지출만 남았다. 두둑했던 겨울 지갑은 얼음 두께처럼 얇아지고 봄에 들여올 농자재는 줄을 섰다. “저그 한라봉식당 문 닫았다는 소리 못 들었소?”뭔 소린가 하니 갈치와 고등어 요리로 유명한 식당의 안주인이 주변에서 적잖은 돈을 빌려 야반도주를 했단다. 잘나가던 식당이 하룻밤 새 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