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완전한 권위를 넘어 불완전한 인간으로
‘스트레인저 댄 픽션’(감독 마크 포스터)의 주인공 해럴드(윌 페렐)는 모든 것이 숫자로 환원되는 삶을 살고 있다. 세금징수를 담당하는 해럴드는 칫솔질의 횟수까지 헤아리는 남자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화면에는 숫자가 등장한다. 일상의 모든 것이 숫자에 의해 정교하게 관리되는 것이다. 이처럼 그는 과학적 인과관계에 의해 완벽하게 통제되는 삶을 살고 있다. 그런데 어느날 해럴드는 자신이 에이펠(엠마 톰슨)이 쓰는 소설의 주인공이며 그녀의 소설대로 자신을 둘러싼 현실이 결정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소설의 내용이 자신의 삶에 그대로 재현되는, ‘소설보다 더 이상한’ 현실이 벌어진 것이다. ‘스트레인저 댄 픽션’의 소설가 에이펠(엠마 톰슨)은 절대자를 연상시킨다. 해럴드가 듣는 에이펠의 목소리는 해럴드의 운명을 예지하고 지시한다는 점에서 신의 계시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숫자에 의해 관리되는 계량화된 삶을 살아가던 해럴드가 소설가의 개인적 판단에 의해 생사의 경계에 놓이게 ... -
‘미스터 브룩스’… ‘악마적 혈통’ 의 세습
‘미스터 브룩스’(감독 브루스 에반스)의 주인공 브룩스(케빈 코스트너)는 성실한 가장이자 건실한 사업가다. 그러나 그는 치밀한 수법으로 살인을 저지르는 섬뜩한 살인마이기도 하다. 브룩스의 분신인 마샬(윌리엄 허트)은 브룩스의 악마성을 대변한다. 그는 악마적 충동에 끊임없이 시달리는 위태로운 심성의 소유자다. 그러나 영화는 브룩스의 살인을 평면적으로 중계하지 않는다. 브룩스를 추적하는 형사 앳우드(데미 무어)의 활약상을 부각시키지도 않는다. 영화가 주목하는 것은 무분별한 살인 충동에 노출된 브룩스의 내면이다. 브룩스의 불안정한 내면은 선과 악이 매일 충돌하는 전쟁터다. 앳우드는 브룩스를 추적하지만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한다. 하지만 브룩스는 앳우드를 죽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의 고민을 해결해주기까지 한다. 브룩스는 혈통의 그늘에서 벗어난 앳우드에게 이상한 호감을 느낀다. 형사 앳우드는 저명한 기업가의 딸이다. 그런데 그녀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형사라는 직업을 택한... -
‘기담’… 일제와 유신, 그 이상한 향수
‘기담’(감독 정가형제)은 1940년대 경성의 어느 병원에서 벌어지는 세 가지의 이야기다. 안생병원에서 실습생활을 시작한 의대생 정남(진구)은 여고생 아오이(여지)의 시신을 처리하게 된다. 아사코(고주연)는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은 엄마(박지아)의 환영을 본다. 의사부부인 동원(김태우)과 인영(김보경)도 도쿄에서 돌아와 기이한 일을 겪는다. ‘기담’에서 공포는 욕망과 일정한 접점을 갖는다. 욕망의 공격성과 일방성이 인물간의 관계에 특별한 공포를 드리우기 때문이다. 사랑했던 사람이 유령이 되어 마침내 등장인물들을 찾아오는 것이다. 금기를 넘어서려는 욕망도 공포를 낳는다. 그래서 공포는 욕망의 그림자다. 정남은 아오이의 시신을 두고 상념에 빠진다. 아사코도 엄마와 새아빠 사이에서 미묘한 감정을 느낀다. 기담의 인물들은 금기를 향한 욕망을 공유한다. 일제시대에도 개인적인 차원의 다양한 욕망은 분명 존재했을 것이다. 본능적인 감정에 충실한 인물들의 등장은 그 시대 사람들의... -
‘허스’-미국, 한국인에게 어떤 곳인가
‘허스’(감독 김정중)는 외견상 세 여자의 이야기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지나라는 공통된 이름을 가지고 있다. 20대의 지나는 한국을 떠나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향한다. 로스앤젤레스의 지나(김혜나)는 성매매 조직에서 가까스로 탈출하지만 조직의 의뢰를 받은 부패형사를 만난다. 라스베이거스에 사는 30대의 지나(엘리자베스 바이스바움)는 디자이너 지망생이다. 그러나 낯선 남자를 ‘고객’으로 상대해야 하는 그녀의 현실은 고통스럽기만 하다. 40대의 지나(수지 박)는 오로라를 보기 위해 알래스카로 온다. 그러나 이번에도 지나는 생계를 위해 자신의 얼굴이 새겨진 야릇한 명함을 뿌려야만 한다. 과연 세 여자는 전혀 다른 사람들일까. 알래스카의 지나가 등장하는 세번째 이야기에서 감독은 로스앤젤레스의 지나가 햇빛을 바라보던 모습을 중간에 끼워 넣는다. 알래스카에서 지나가 부르는 노래도 두번째 이야기에 등장한 어느 성매매 업소에서 흘러 나오던 노래다. 영화가 세 여자의 다른 이야기라... -
‘별빛 속으로’
-야만의 시대 ‘진실의 숨결’- ‘별빛 속으로’(감독 황규덕)에서 독문과 교수 수영(정진영)은 학생들에게 자신이 대학시절에 겪었던 신비한 경험을 이야기한다. 젊은 수영(정경호)은 삐삐소녀(김민선)를 만나 사랑을 느낀다. 하지만 그녀는 모호한 말을 남긴 채 시위 도중 숨진다. 그녀의 죽음 이후 수영은 환영을 경험하며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들게 된다. ‘별빛 속으로’를 지배하는 것은 그리움의 정서다. 교련복과 국기 하강식으로 대변되는 1970년대 말이 영화의 배경이다. 관념적이면서 감상적인 대사도 이 영화가 본래 지난 시절을 회고하는 애틋한 추억담임을 시사한다. ‘별빛 속으로’에는 사랑의 영원성에 대한 통속적인 확신이 존재한다. 영화의 주인공들은 모두 죽음을 초월하는 사랑에 대한 낭만적 동경을 공유하고 있다. 사랑은 시대를 초월하지만 시대에 의해 가장 잘 설명되기도 한다. 사랑을 통해 연인들은 영혼의 동요를 경험한다. 그러나 사랑이 개인간의 자폐적 감정에 불... -
2007 ‘힛쳐’
-원작의 내면·감성 실종 ‘기획상품’- 영화 ‘힛쳐’(감독 데이브 마이어스)는 짐(잭커리 나이튼)이 여자친구 그레이스(소피아 부시)와 함께 여행을 떠나며 시작된다. 그런데 도중에 존 라이더(숀 빈)를 태우게 된 두 사람은 갑자기 이상한 언동을 보이는 그에게 점점 두려움을 갖게 된다. 낯선 자와의 동행은 감당할 수 없는 불행을 두 사람에게 안겨줄 뿐이다. 존 라이더가 살인마로 돌변하여 짐과 그레이스를 공격하는 것이다. ‘힛쳐’는 1986년에 발표됐던 원작을 리메이크한 영화다. 로버트 하몬이 연출한 원작은 현대 사회의 불확실성이 일상의 공포를 불러 일으키는 근원적인 요인임을 간파한 영리한 작품이었다. 관객은 존 라이더가 표출하는 기괴한 공격성의 방향과 목적을 알지 못한다. 낯선 인물의 맹목적 적의가 영화를 이끌어 가는 동력인 것이다. 이해타산에 기초한 ‘허약한 인간관계’가 불특정 다수에 대한 증오를 잉태할 수 있다는 착상은 여전히 신선하다. 일상화된 익명성과 그... -
능청스러운 성인용 잔혹동화 ‘폭력의 역사’
‘폭력의 역사’(감독 데이비드 크로넨버그)는 수상한 인물들이 중산층의 안온한 일상에 난입하면서 시작된다. 두 명의 강도가 톰 스톨(비고 모텐슨)의 조그만 음식점에 침입한다. 스톨은 단번에 강도 둘을 해치우고 유명인사가 되지만, 그것은 도리어 낯선 자들의 불길한 방문이 이어지는 계기가 된다. 스톨이 악명 높은 마피아 조이 쿠삭일 것이라고 확신하는 칼 포카티(에드 해리스)와 그의 부하들이 연이어 등장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스톨의 형은 대저택에 사는 기업적 마피아다. 정말 마피아 조이 쿠삭이 평범한 소시민 톰 스톨로 신분을 숨긴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폭력의 역사’에는 사실적인 폭력 장면이 가득하다. 하지만 영화는 지극히 사실적이면서도 비현실적이다. 폭력으로 인한 신체의 훼손을 극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도 영화의 마지막에는 기이할 정도로 거대하고 화려한 저택이 등장한다. 현실과 환상의 대표적 경계는 이미 영화의 도입부에 존재한다. 영화가 시작되면 작은 음식점을 주된 ... -
‘다이하드 4.0’ 잔혹한 폭력. 그뿐
‘다이하드 4.0’(감독 렌 와이즈먼)의 가장 큰 특징은 맥클레인(브루스 윌리스)이 마침내 ‘망토를 걸치지 않은 슈퍼맨’이 되었다는 것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맥클레인은 죽지 않는다. 물론 온몸으로 격투를 벌이는 맥클레인은 어느새 피투성이가 되어 있다. 그러나 피투성이가 되었음에도 맥클레인은 태연하게 초인적 힘을 발휘한다. 영화 내내 맥클레인은 피가 밴 상의를 유니폼처럼 입고 다닌다. 그것은 어느 순간 슈퍼맨이나 스파이더맨 같은 영웅들이 입는 개성적 복장을 연상시킨다. 그렇게 지독하게 다쳤으면서도 버젓이 악당을 제압하는 맥클레인의 모습은 비현실적이다 못해 희극적이다. 맥클레인이 죽음을 피해 다닌다기보다는 죽음이 맥클레인을 애써 피해 다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망토 없는 슈퍼맨이다. 최첨단 해커를 소재로 삼고 있지만 영화는 해킹을 둘러싼 상식적 상상을 넘어서지 않는다. 영화는 해커들의 두뇌 싸움에는 처음부터 관심이 없다. 그것은 단지 시대적 상황을... -
‘오션스 13’-유쾌하지만 지루한 복수극
전작을 통해 이미 관객에게 존재감을 충분히 각인시킨 오션과 그의 친구들이 멋지게 귀환하면서 영화 ‘오션스 13’(감독 스티븐 소더버그)은 시작된다. 대니 오션(조지 클루니)의 친구 루벤(엘리어트 굴드)이 윌리 뱅크(알 파치노)에게 그만 사기를 당하고 만 것이다. 하지만 관객은 몸져누운 루벤이 사경을 헤매는 것은 아닌지 미리 염려할 필요가 없다. 윌리 뱅크가 과연 몰락할 것인지 구태여 묻지 않아도 된다. 루벤이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거나 뱅크가 처참하게 몰락한다면, 영화가 시리즈의 전통에서 이탈하여 지나치게 심각해져 버리기 때문이다. 가령 복수극이 잔혹한 응징의 형태로 진행되었다면, 시리즈 특유의 부담없는 경쾌함은 사라졌을 것이 분명하다. 러스티(브래드 피트)와 라이너스(맷 데이먼)를 비롯한 오션의 친구들은 다시 모인다. 윌리 뱅크를 파멸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에게 사기꾼 세계의 엄정한 법도를 깨우쳐 주기 위해서. 즉 복수의 외형은 온전히 유지하되 복수의 수준이나 ... -
‘13자메티’… 인간성 부수는 죽음의 룰렛 게임
자메티는 그루지야어로 13을 의미한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영화 ‘13자메티’(감독 겔라 바블루아니)는 13명이 벌이는 기묘한 혈투에 관한 이야기다. 여기 13명의 ‘선수’들이 있다. 그들은 1에서 13까지의 숫자가 적힌 옷을 입고, 한 손에 총을 든 채 서 있다. 그런데 이들은 그 총을 서로의 머리에 겨눈다. 이들은 지금 총알이 발사되는 순간을 누구도 알 수 없는 ‘러시안 룰렛’ 게임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에서 그루지야 출신 이민자로 힘겹게 살아가는 세바스찬(게오르기 바블루아니)은 큰돈을 벌 수 있다는 말만 믿고 외딴 저택에 도착한다. 그러나 그곳은 러시안 룰렛으로 생존자를 가리는 죽음의 결투장이다. ‘13자메티’의 흑백 화면은 잿빛 현실의 음울한 질감을 효과적으로 관객에게 전달하지만, 영화 전반을 지배하는 정서는 순도 높은 긴장감이다. 누구의 총에서 언제 탄환이 발사될지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죽음을 둘러싼 잔인한 불확실성은 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