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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영국 레이크 디스트릭트(下)-미스 포터의 고향을 찾아서
당신에게도 남몰래 품은 도시가 있는지? 저릿한 통증과 함께 먼 과거의 시간 속으로 당신을 돌려 세워 놓는 도시. ‘런던’이라고 가만히 그 이름을 불러보는 것만으로 볼이 붉어지던 시절이 있었다. 사랑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우정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쓸쓸한 감정에 흔들리던. 2년 전 여름, 런던 지하철역에 서서 미로 같은 노선도를 들여다보던 나는 카프카가 연인 밀레나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오늘은 빈의 시가 지도를 보았습니다. 당신은 단지 방 하나만을 필요로 하는데, 사람들은 왜 그렇게 큰 도시를 건설했는지, 일순간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거대한 그 도시에 내가 그리워하는 얼굴은 단 하나, 그런데도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니! 런던 남부의 시골 길을 혼자 걷던 그 여름, 나는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이 도시의 모든 사람들이 출근을 하고, 신문을 읽으며 점심을 먹고, 친구들과 맥주를 마시고, 텔레비전의 리모컨을 눌러가며,... -
(16)영국 레이크 디스트릭트(上)-워스워드의 고향을 찾아서
여기는 영국. 나라 전체가 거대한 트레일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도보여행의 천국으로 꼽히는 곳이다. 그런 영국에서도 ‘도보여행자들의 고향’을 물으면 많은 사람들이 레이크 디스트릭트(Lake District), 호수 지방이라고 답한다. 수십 개의 크고 작은 호수와 깊은 계곡, 높은 산들에 둘러싸여 산빛과 물빛이 고운 그 미색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일찍이 걷기의 아름다움을 예찬한 워스워드나 요절한 시인 키츠와 셸리, 러스킨 등의 시인과 작가들에게 영감을 준 곳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곳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산길과 호숫길, 능선길, 계곡길, 마을길들이 전방위로 펼쳐져 소요하기 좋아하는 이들을 행복한 고민에 빠뜨린다. 오전 11시에 빅토리아 코치 스테이션을 출발한 버스는 이곳 저곳을 경유해 저녁 7시가 되어서야 앰블사이드(Ambleside)에 나를 내려놓았다. 앞으로 1주일간 트레킹을 위해 내가 머물 마을이다. 미리 예약해 놓은 비앤비(Bed and Breakf... -
(15)아일랜드 시골로 걸어가는 길-아일랜드 윅로 웨이
길 위에서 듣는 김광석은 위험하다. 이를테면, 이런 노래. “밤 늦은 여행길에 낯선 길 지나갈 때, 사랑은 떠났지만 추억이 살아올 때, 길가의 안개꽃이 너처럼 미소 지을 때….” 추억이 살아올 때 머리보다 몸의 반응이 빠르다. 머리가 지워버린 과거를 내 몸은 기억한다. 겨울 거리에서 내 손을 마주잡던 손가락의 온기를, 봄산 오르던 길에서 머뭇거리며 와 닿던 입술, 그 주름진 굴곡까지도. 짧은 사랑이 지나간 후의 긴 불면의 밤을 그의 노래에 기대어 건너오지 않은 이가 있을까. 어째서 모든 사랑은 첫사랑인 건지, 어째서 사랑의 상처에는 내성이 생기지 않는 건지 묻고 또 물었던 날들. 노래가 살려내는 먼 과거의 기억에 몸이 떨려온다면 아직 청춘인 걸까. 나는 지금 비 내리는 아일랜드에서 그의 노래에 젖고 있다. 바람과 안개, 자욱한 빗줄기 사이로 흩어지는 그의 목소리가 이 곳만큼 어울리는 곳이 또 있을까. 찬 바람 부는 더블린의 밤거리를 걸으며 나는 김광석과 함께 나를... -
(14)물길을 걸어 성으로 가는 길-프랑스 몽 생 미쉘
파리는 비에 젖고 있다. 가로등 불빛 아래 키스하는 연인들 곁으로는 낙엽의 무덤. 물 비린내와 젖은 낙엽의 흙냄새가 대기를 채우고 있는 몽파르나스 역에 내리니 밤 10시40분. 걸어서 5분 거리라는 호텔에 들어선 건 자정을 넘긴 12시10분. 한 시간 반 동안 비 내리는 파리의 밤거리를 걸었다. 공항 안내소의 직원이 호텔 이름을 엉뚱하게 알려줘서 헤매고, 잘못 찾아간 호텔의 직원이 우리가 예약한 호텔의 번지수를 틀리게 적어줘서 또 돌고, 막판에는 전화 통화까지 한 직원의 설명을 잘못 알아들어 호텔을 지척에 두고도 빙빙 돌았다. 이제 파리의 밤을 떠올리면 몽파르나스 역 주변을 맴맴 돌던 오늘밤이 제일 먼저 떠오르겠지. 새벽 5시 반에 숙소를 나서 몽파르나스 역으로 이동, 인터넷으로 예약해놓은 표를 찾고 기차에 오른다. 렌(Rennes)으로 가는 초고속열차 TGV다. 먹빛 어둠이 물러가는 자리에 새벽 하늘이 푸르게 열리고 있다. 비둘기의 날개 같고, 바다의 물결 같고,... -
(13)바람과 안개, 비-스코틀랜드 웨스트 하이랜드 클래식(下)
나는 걷고 있었다. 늘 그랬듯 배낭은 지구를 통째로 들어 올린 무게였고, 길은 고무줄처럼 늘어만 가고 있었다. 게다가 비까지 몹시 내렸다. 끈질기고 지독한 비였다. 진압용 물대포의 물줄기처럼 모질게 퍼붓기도 했고, 슬금슬금 흩뿌리며 속 깊이 달라붙기도 했다. 그리고 바람. 칼날처럼 벼려진 바람이 들판을 거칠게 쓸어가고 있었다. 빈 들판을 휩쓸며 달려오는 바람소리가 전쟁터의 말발굽소리처럼 울렸다. 또 안개가 있었다. 시야를 완벽하게 차단하는 안개였다. 그 땅의 주인은 비와 바람, 안개였다. 세상의 끝에 나 혼자 서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속수무책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바람소리에 마음이 살랑거린다고, 빗속을 걷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안개 낀 가을 들판의 풍경을 사랑한다고, 인적 끊긴 길에 나 혼자 서 있는 것도 좋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어쩌다가, 잠깐씩이라면. 하지만 여기서는 달랐다. 빛깔이라고는 회색, 잿빛, 양잿물색뿐인 땅에서 쌀뜨물 바가지에 푹 빠진 개미의 시야... -
(12)바람과 안개, 비…스코틀랜드 웨스트 하이랜드 클래식(上)
공항을 나서는 순간, 체크 무늬 치마를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남자와 마주쳤다. 치마를 입은 남자들이 백파이프를 부는 나라, 여기는 스코틀랜드다. 에든버러에서 하룻밤을 머문 후 글래스고로 이동, 그곳에서 멀가이(Milgavie)행 기차를 탄다. 스코틀랜드의 가장 유명한 도보여행길 ‘웨스트 하이랜드 웨이’(West Highland Way)는 이 작은 마을에서 시작된다. 기차역을 나와 마을로 들어서니 마을 광장에 길의 시작점을 알리는 표석이 서 있다. 길은 곧 나무가 우거진 숲으로 이어진다. 오롯한 숲길을 한 시간쯤 걷고 나니 광활한 평원이 펼쳐지고 멀리 호수가 눈에 들어온다. 9월 중순에 접어들었을 뿐인데 스코틀랜드는 이미 완연한 가을이다. 서늘한 바람도, 따스하게 느껴지는 햇살도, 끝이 노랗게 물들기 시작한 나무들도 가을 냄새를 풍긴다. 언덕을 넘고 초원을 지나 돌담을 넘기도 하고 목책을 가로지르기도 하며 걷는 길. 풀섶에 몸을 숨기고 있던 수십 마리의 꿩들이 내 ... -
(11)전설의 산악인, 그 발길을 따라 가는길 ‘프랑스 샤모니②’
8월7일, 푸른 하늘 아래 여름 햇살이 뜨겁게 내리쬐는 오후였다. 무거운 배낭을 멘 두 남자가 샤모니를 벗어나 보송 마을로 들어섰다. 멀리 보이는 눈 덮인 설산에 잠시 눈길을 주던 두 남자는 곧 가파른 오르막을 오르기 시작했다. 밤이 깊어서야 두 남자는 해발 2392m의 고갯마루에 도착했다. 거대한 바위 밑에서 잠시 눈을 붙였다. 여명이 밝기도 전인 새벽 4시, 두 남자는 다시 행군을 시작했다. 크레바스를 건너고, 깊은 눈을 헤치며, 악마가 살고 있다고 믿어 아무도 오른 적 없는 산을 향해 한 발 한 발 나아갔다. 그들에게는 약간의 식량과 허술한 방한복, 지팡이 등 보잘 것 없는 장비뿐이었다. 안전을 확보할 수 있는 로프도, 얼음 위에서 미끄러짐을 방지해주는 크램폰 같은 장비도 없던 시절이었다. 두 사람이 지닌 것은 오직 불굴의 의지와 용기뿐이었다. 15시간의 쉼 없는 전진 끝에 오후 6시23분, 마침내 그들은 해발 4807m에 도달했다. 더 이상 ... -
(10)세월 건너 다시 만난 첫사랑같은 ‘프랑스 샤모니’
-전설의 산악인, 그 발길을 따라 가는 길- 낯선 도시에 첫 발을 내디딜 때면 언제나 가슴이 뛴다. 핏줄 속 모세혈관들이 일제히 깨어나 웅성거린다. 설렘보다 긴장이 앞서 몸과 마음이 함께 굳는다. 그럴 때면 잠시 호흡을 고르며 속삭인다. ‘자, 또 새로운 땅이야. 여기서도 잘해낼 수 있지? 걱정하지마. 지금까지 그래왔듯 다 잘될 거니까.’ 숙소며 물가, 내 빈약한 주머니를 노리는 사기꾼까지 온갖 것에 대한 걱정을 뒤로하고 애써 스스로를 격려한다. 그리고 조심스레 공항 밖으로, 기차역이나 터미널 밖으로 나선다. 그 첫 만남의 떨림과 긴장을 나는 사랑한다. 까탈스럽기 그지 없어 일상의 사소한 변화도 견디지 못하기 일쑤인 내가 어떻게 끝없이 낯선 땅으로 발을 옮기는 여행자의 길에 들어설 수 있었을까. 익숙한 것에 대한 그리움과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 사이에서 승리는 언제나 호기심이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풍경, 나와는 다른 얼굴을 가진 사람들, 이질적인 문화들이 언제나 나... -
(9)스페인 안달루시아
-그라나다에서 시에라 네바다로 하얀 마을을 찾아- 아직 익지 않은 초록색 열매를 방울처럼 매달고 있는 감귤나무 곁에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여긴 안달루시아. 하얗게 회칠을 한 집들이 초록숲 사이에 섬처럼 떠 있는, 아니 꽃처럼 피어있는 곳이지. 살기를 내뿜는 8월의 태양 아래 사흘을 걷고 난 후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쉬고 있다. 일기를 쓰고, 책을 읽고, 마을을 어슬렁거리면서. 이 집의 주인 부부는 네덜란드 사람인데 300년 된 낡은 농가를 구입해 7년 째 스스로 고쳐가고 있는 중이야. 번거로움이 싫어 간판조차 매달지 않고, 자신들의 삶을 방해받지 않을 정도로만 손님을 받아가며, 버려진 세 마리의 개들을 돌보며 마당 가득한 과일 나무와 꽃들 사이에서 고요히 늙어가고 있지. 내가 머무는 방의 침대에 기대면 창 가득 산과 하늘이 들어와. 아침 나절 책을 읽는 사이 몇 마리의 새들이 창틀에 기대어 쉬다 갔다. 세상의 모든 고요와 평화는 전부 이 하얀 집에 머무는 ... -
(8)스페인 안달루시아②-하얀마을을 찾아
고요하고 평화로운 아침이다. 한낮의 무더위가 예상되지만 아직 아침 공기는 신선하다. 주인 아저씨가 직접 구운 빵과 요구르트에 치즈와 토마토를 곁들여 아침을 먹는다. 더 머무르고 싶은 유혹을 꾹 누르고 길을 나선다. 그토록 험난한 하루가 우리를 기다릴 줄 알았다면 꼼짝 않고 머물렀을 텐데… 길을 못 찾아 헤매는 우리를 본 동네 할아버지가 마을을 빠져나가는 곳까지 데려다 주셨다. 숲으로 가는 조붓한 길이다. 발걸음도 가볍게 숲을 나서니 밤나무와 귤나무, 감나무, 무화과와 석류나무가 늘어선 길이다. 경쾌하게 흘러가는 계곡의 물소리가 들려온다. 10분 만에 또 길을 잃었다가 다시 길을 찾아낸다. 이제는 강을 건너 지그재그로 올라간다. 가뭄에 바싹 마른 풀들이 발밑에서 바스락거린다. 길에는 인적이 없다. 나무와 꽃과 바위들만 제자리에 어여쁘게 서 있다. 가만히 바위들을 들여다보면 같은 모양이 하나도 없다. 똑같은 꽃도 저마다 다른 키와 얼굴을 지녔다. 우리는 길섶의 바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