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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를 마치며
적어도 인터넷이 활성화되기 전인 1990년대 말까지 ‘해외 음악전문지’는 음악 마니아들에게 있어 해외 대중음악 음반을 사기 위한 핵심적인 소스였다. 나 또한 그 일원이었기 때문에 해외 음악 전문지의 편집 방향성과 이들이 지속적으로 다루는 내용 등에 익숙해져 있었다. 심지어 97년에 대중음악전문지 ‘서브(SUB)’를 창간하려고 했을 때 참고했던 것들이 바로 이들이었고, 결국 서브의 편집 방향성과 레이아웃, 코너명을 붙이는 방식 등은 해외의 잘 만든 음악전문지들을 참고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이들이 ‘지속적으로 다루는 내용’ 중에 주목한 것이 바로 온갖 종류의 ‘음반 선정 특집’이었는데, ‘1970년대를 빛낸 록음악 100대 명반’과 같은 기획은 아주 흔한 방식이었다. 그리고 음악 마니아들 중 많은 이들은 이런 리스트들을 스크랩해서 음반 사는 데 유용하게 활용했을 것이다. 물론 당시 존재한 국내 음악 전문지들에서도 이런 기사를 많이 전재해 주었다.그런데 서브를 만들면서 곰곰이 ... -
99위 이상은 ‘외롭고 웃긴 가게’
이상은을 설명함에 있어 성별 구분과 여성 뮤지션의 희소성을 강조하는 건 재평가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었던 1990년대 후반부터 사실상 무의미했다. ‘더딘 하루’(1991)부터 ‘Asian Prescription’(1999)까지의 흐름에서 일관성 있게 증명한 양질의 결과물들은 성별 구분 없이 그 자체로 전대미문이었기 때문이다. 균일하게 뛰어난 완성도는 개별적인 해석이 용이했고 이상은을 스타일리스트로 바라볼 수 있는 이유였으며 이를 근거로 했을 때 1990년대 그녀와 동일 선상으로 간주할 만한 이름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여기서 이상은을 여전히 ‘담다디’로 기억하는 대중과의 간극이 발생하는데, 공신력 있는 음악매체의 부재가 낳은 불편함은 반드시 드러나야 한다. 다시 말해 신보가 발표된 시기에만 드문드문 재조명하는 방식은 이상은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구하는 최선의 해결책이 아니었고, 결국 오늘날까지 ‘담다디’를 기점으로 한 물음과 대답만을 지겹게 반복하는 실정이다. 이는 2000년대... -
100위 동서남북 ‘아주 오래된 기억과의 조우’
음악 애호가들에게 1980년대는 심야 라디오방송과 소위 ‘빽판’으로 불리는 해적판LP로 이야기되는 시대다. 서슬 퍼렇던 신군부의 검열로 인해 록은 움츠러들었다. 음악에 대한 갈증을 풀기 위해 사람들은 밤새워 라디오를 듣고 종로, 청계천, 노량진을 돌아다니며 해적판을 구했다. 영미 록의 명작들이 원판 재킷 그대로 소개됐고, 선구자적인 DJ, 잡지 평론가들에 의해 이탈리안 아트 록 등 제3세계 예술주의 록들이 알려지게 됐다. 당연히 대학가를 중심으로 영미 하드록을 추종하는 그룹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하드록을 표방한 마그마와 작은거인을 거쳐 시나위·백두산·부활로 대표되는 헤비메탈의 르네상스가 열린다. 그리고 그 자양분은 90년대 인디신의 태동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이 80년대에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는 그룹이 바로 동서남북이다. 80년대는 캠퍼스 밴드의 한계를 벗어나 프로뮤지션의 역량을 갖춘 그룹들이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된 시기다. 대학가요제 출신 그룹들이 진화를 거듭하... -
97위 W ‘Where The Story Ends’
“데이비드 보위의 노래를 뚫고 뛰쳐나온 너의 뒤틀린 웃음 다른 빛깔의 눈동자 위로 각기 서로 다른 시간을 비추며 Let’s Try 너는 내 곁으로.” 초현실적이면서도 쉽게 이해되고 귀에도 잘 감기는 가사가 들려오는 가운데 노래의 클라이맥스가 다가온다. ‘Shocking Pink Rose’라는 타이틀의 후렴구 직후 들려오는 두 번의 박수소리, 덕분에 상쾌한 느낌이 상승한다. 이렇게 심플한 소재로 최대의 효과를 얻어내는 것이 그룹 W의 음악적 특징이다. 일찍이 청명한 분수 화음에 레게의 맛을 살짝 가미한 아이스크림 같은 느낌의 ‘그녀의 아침’으로 10년 이상 앞서나간 감각을 선보였고 ‘우리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답다’를 통해 몇 십 년 전의 팝으로부터 현대의 감성을 뽑아내는 묘기를 보여주기도 했던 배영준이 ‘코나’ 이후 만든 밴드 W는 창작 의지가 사라져버린 듯한 21세기의 한국 대중음악에 신선한 공기를 불어넣어주는 인공호흡기와 같은 팀이다. W가 주목받아야 할 부분은... -
98위 브라운 아이즈 ‘Brown Eyes’
한국은 지금 흑인 음악 열풍이다. 아니 세계가 이미 흑인 음악에 빠져든 지 오래다. 오히려 한국이 뒤늦게 합류했다고 보는 게 맞다. 지금 가요는 SG 워너비 스타일의 R&B 음악이 대세다. 일부 음악계는 그런 현상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음악의 다양성보다는 돈 되는 음악만 투자한다고. 하지만 돈 되는 음악은 결국 사람들이 원하는 음악이라고 볼 수 있다. 즉 대중음악이 R&B 음악이 됐다는 이야기다. 그럼 한국 R&B 음악의 열풍은 SG 워너비가 완성한 것인가? 그런 질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한국 R&B 시작에는 유영진도 있었고, 솔리드도 있었다. 하지만 대중적인 R&B의 완성은 브라운 아이즈가 아닐까 생각이 든다. 1999년부터 불기 시작한 힙합 열풍과 함께 이미 어느 정도 자리 잡고 있었던 R&B 시장에 2001년 두 명의 젊은이가 나타난다. 2년여간의 준비를 통해 나타난 두 젊은이는 윤건과 나얼이었다. 윤건은 전에 양창익이란 이름으로 ... -
95위 전인권 ‘전인권’
전인권이 리드보컬로 참여했던 밴드 ‘들국화’의 1집은 한국 대중음악 최고의 명반이다. 누구도 범접하기 힘든 불멸의 금자탑을 쌓은 들국화는 그러나 채 5년을 넘기지 못하고 시들어 버렸다. 수많은 이들의 안타까움 속에서 멤버들은 각자의 음악을 향해 흩어졌고 전인권은 들국화 시절보다 훨씬 로킹한 음악들을 선보이며 들국화에 미련이 남은 이들의 아쉬운 마음을 달래주었다. 허성욱과 함께한 전작 ‘머리에 꽃을’ 앨범에서 그는 자신이 뛰어난 보컬리스트이며 동시에 뛰어난 창작자임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흡사 상처 입은 야수가 절규하듯 울부짖는 그의 보컬은 김현식과 함께 1980년대의 치열함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민주화의 열기가 활화산처럼 터져 나오던 시대의 격랑만큼 에너지 들끓는 보컬리스트였던 그는 밴드 파랑새를 거느리고 최구희와 허성욱의 조력을 받아 들국화 이후 자신의 첫 번째 독집 앨범을 내놓았다. 이 앨범에서 그는 ‘머리에 꽃을’ 앨범보다는 덜 로킹하지만 자신의 음악적 뿌리였던 ‘따로 또... -
96위 시나위 ‘Down And Up’
대한민국 대중음악계의 거물 신중현의 장남 신대철이 고등학교 음악 수업시간에 듣게 된 국악 용어 시나위. 단어 자체의 어감도 좋았고, 즉흥연주라는 뜻도 지니고 있어서 록 밴드 이름으로 적격이라 생각돼 사용된 대한민국 최초의 헤비메탈 밴드 시나위의 초대 보컬리스트는 사실 김종서였다. 하지만 첫 공연 전 긴장과 부담감 등으로 사라졌던 김종서는 공연 하루 전에야 나타났고, 그 일로 밴드에서 방출된다. 그 후 임재범이 녹음을 하게 되고 데뷔 앨범이 발매됐다. 그런데 임재범은 입영통지서를 받은 상태로 데뷔 앨범이 나온 두달 후쯤부터 단기사병 복무를 하게 됐다. 그리고 지방 공연 등 원활한 밴드 활동이 어려워지자 스스로 탈퇴했고 멤버 전체의 변화도 모색된다.신대철을 중심으로 이미 예전에 같이 했었던 강기영과 당시 고등학교 2학년생이던 김민기가 합세했고, 보컬리스트를 뽑는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나타난 김종서를 맞아들여 새로운 시나위는 대망의 2집 앨범을 준비한다. 2집은 데뷔 앨범에서 드러... -
93위 이소라 ‘눈썹달’
노래를 부를 줄 아는 이는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이보다 하수인가. 사랑과 이별을 노래하는 이는 인류와 세계평화를 노래하는 이들보다 하위 레벨인가. 우리는 어쩌면 싱어 송 라이터라면 그 결과물이 무엇이든 대단하다는 착각에 빠져있고, 한 사람의 희로애락보다는 커다란 대의를 위한 무언가가 더 대단하다는 착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이상을, 저 먼 허공을 사력을 다해 가리키다가 갑작스레 피부에 와 닿는, 심장의 가장 깊은 곳을 베어내는 듯한 저릿한 아픔에 흠칫 놀라는 건 왜일까.한국 대중음악계에서 그 누구보다 ‘진한 사랑’을 노래할 줄 아는 이소라는 타고난 보컬리스트다. 연인과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친구에게 털어놓으며 투정부릴 때도, 인사도 나누지 못한 채 뒷모습을 보인 이별에 머리 위로 ‘바람이 분다’고 담담히 말할 때에도 깊이를 알 수 없는 내공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밝은 면을 비추고 있을 때보다는, 어두운 그늘을 드리우고 있을 때 형용할 수 없는 빛을 발... -
94위 강산에 ‘나는 사춘기’
첫번째 앨범 ‘Vol. 0’을 발표하고 ‘…라구요’를 부르던 당시의 강산에는 로커였고, 자유인이었으며, 기인이었다. 그는 ‘…라구요’ ‘예럴랄라’ ‘할아버지와 수박’ 등의 노래들을 박청귀, 이근형, 강기영 등의 록 세션에 담아 부른 장발의 로커였으며, 하모니카와 함께 “풀냄새 참 흙냄새 참 오래간만이네”를 외치던 자유인이었고, 잘 다니던 한의대를 그만두고 백마 ‘화사랑’이란 곳에서 먹고 자며 노래하던 기인이었다. 이런 강산에의 독특한 행보는 한 TV 프로그램에까지 소개되며 독특한 로커라는 이미지를 더욱 강화시켰다.그러나 그가 2집 앨범 ‘나는 사춘기’를 발표하면서 그에 대한 평가는 많이 바뀌었다. 그는 여전히 로커였지만 두 번째 앨범에서는 사뭇 다른 이미지의 로커가 돼있었다. 본인의 경험과 자유로움에 대해서 노래하던 강산에는 이제 분단과 반전에 대해 노래하는 ‘의식있는’ 로커가 된 것이었다. 사실 그의 사회 문제에 대한 발언은 1집에서부터 시작됐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 -
91위 클래지콰이 ‘Instant Pig’
‘인터넷’으로 수혜를 입은 신진 아티스트들이 있다. 기껏해야 TV와 라디오, 그리고 약간의 언론 매체가 홍보 수단의 전부였던 당시에 일종의 ‘전환점’이 됐던 1998~2002년의 과도기를 요긴하게 사용한 팀들은 나름 쏠쏠하게 재미를 봤다. 반짝 성황했던 인터넷 가요제를 통해 얼굴을 알린 성시경이나 자신들의 홈페이지에서 음악을 선 공개 후 메이저 시장에 뛰어들 수 있었던 얼바노(Urbano) 등의 전례는 아주 대표적. 그중에서도 지금 소개하는 클래지콰이는 그 과도기를 가장 잘 이용한 대표적인 아티스트로 불릴 만하다.이들이 처음으로 이름을 알렸던 시기는 2000~2001년쯤 음악 외에 별 공개한 것이 없었던 자신들의 홈페이지였다. 지금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긴 했지만(호란은 당시의 멤버가 아니었음) 그때만 해도 그들의 존재가 생경하기 짝이 없었던 일렉트로니카 음악의 장을 열어젖히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예상은 아무도 하지 못했다. 무단으로 공유가 가능하게끔 배포됐던 그들의 mp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