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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회장님, 한국사회 변했습니까?”
김성주라는 여성 기업인 이름을 처음 대한 것은 MBC TV의 를 통해서였습니다. 는 지금은 없어졌지만 어려움을 극복하고 성공한 사람의 성공사례를 보여주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그 프로그램을 꼬박꼬박 챙겨보는 것은 아니었는데 우연히 접한 그의 이야기가 지금까지 생각나는 것은 비틀린 한국의 현실을 잘 집어낸 프로라고 여긴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 기업을 하면서 술접대 안 하고, 돈봉투 안 돌리고, 거짓말 안 하면서 기업을 꾸려간다는, ‘김성주식 경영’이 주된 내용이었습니다. 김 회장은 그 프로그램이 방송된 후 자신이 납품하는 백화점과 면세점으로부터 많이 두들겨 맞았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10여년이 훌쩍 지났습니다. 외환위기 때 일시적인 부도위기를 넘기고 지금은 투명경영, 가진 자가 책임을 다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대표적인 여성 최고경영자(CEO)의 대명사로 우뚝 섰습니다. 지난달 2일에도 모교인 연세대에서 21세기 지도자가 갖춰야 할 덕목을 주제로 강연하는 등 사업... -
불어라 평화바람
지난 22일 오후 7시 용산 참사 현장에서 전국사제시국기도회가 열렸습니다. 천주교 사제단이 지난 15일 시국선언을 하고 매주 월요일 전국을 돌며 시국기도회를 하겠다고 한 후 열린 첫 기도회였습니다. 용산 참사 현장에서 첫 시국기도회가 열린 것은 아마 당연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사람사는 세상에서 허무하게 사람이 사라지고, 정부와 국민 간의 의사소통이 단절되고, 민주주의 후퇴를 여실히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용산 참사 현장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문정현 신부가 어김없이 모습을 나타냈습니다. 3월 말부터 현장에서 유가족들과 함께 하고 있는 그는 그 날따라 목이 쉬어 말을 제대로 못했습니다. 몇 마디 나누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습니다. 참사 5개월되는 지난 20일 열린 범국민추모대회에서 공권력의 횡포에 맞서 고함치고, 몸부림치느라 목소리가 상했다고 문 신부와 함께 하는 행동가(필명 낮잠)가 일러주었습니다. 시작성가를 부를 때 문 신부는 앉아있는 참석자 대열 속으로 들어가 젖먹이 아이처럼 두... -
진짜 꽃중년이 됩시다
웃을 일이 별로 없는 세상입니다. 여기저기서 한숨 소리만이 들립니다. 어린애들은 어린애들대로, 청소년은 청소년대로, 중년은 중년들대로, 노인은 노인대로 걱정만 한아름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대 나름의 고민, 어느 때나 있었던 것이지만 요즘처럼 무겁게 느껴지는 때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저에게도 어느 덧 중년이라는 딱지가 붙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중년의 이야기와 고민에 유달리 귀가 솔깃해집니다. 요즘 중년은 어느 때보다 더 힘든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저와 비슷한 연배가 살아온 ‘삶의 지도’를 그려봅니다. 대학생 때는 공부보다는 군사 독재 정권에 몸부림치고 저항하고 고민했던 세대, 결혼하고 아이낳고 도란도란 가정을 꾸릴 30대에는 외환위기 풍파를 만났던 세대, 요즘은 또 유례없는 세계적인 경제위기의 한 가운데 선 세대. 강산이 한 번 변하는 세월을 주기로 마치 대나무에 뚜렷한 삶의 상처를 칼로 새겨놓고 살아가는 세대인 것 같습니다. 中年이 아니라 重年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 -
비수같은 객담
지난 1일이었습니다. 서울 남대문로에 있는 법무법인 ‘광장’을 찾아갔습니다. ‘광장’은 한승헌 변호사가 10년째 몸담고 있는 곳입니다. 그의 사무실은 깔끔하게 정리된 다른 변호사 사무실과는 딴판이었습니다. 인기척에 책더미 위로 그가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왜소한 체격에, 까무잡잡한 얼굴. 양복만 걸치지 않았다면 마치 밭에서 김매다 온 촌로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 느낌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나 봅니다. 1985년 무크지(부정기간행물) ‘민중교육’ 사건으로 한 변호사의 변호를 받았던 윤재철 교사(당시 서울성동고)는 회고담에서 이렇게 적었다고 합니다. “(한 변호사는) 꼭 시골에서 김매다 지금 막 올라오신 삼촌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 당신 스스로 ‘촌놈’이라고 했던 표현이 딱 어울리는 듯했습니다. 한 변호사의 모습을 보자 그가 말한 3복(福)이 떠올랐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평생 한 가지 복도 받기 어려운데 한 변호사는 세 가지 복을 받았다니 부러울 따름이죠. 그중의 하나가 일복... -
이명박, 서울광장, 모순의 정치
서울광장은 2004년 5월1일 문을 열었습니다. 1963년 6월29일 생긴 서울시청 앞 분수대가 41년 만에 사라진 것입니다. 사람들은 감격했습니다. ‘발상을 전환하면 세상이 이렇게도 변하는구나.’ 서울광장이 문을 열었을 때 저는 서울시청을 출입하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서울광장으로 몰려나와 이야기하고, 뒹굴고, 거닐고…. 그때의 감동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서울광장의 탄생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교통의 결절점에 광장을 만드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는 이유로 반대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은 밀어붙였습니다. 청계천 복원, 교통체계 개선, 서울광장 조성은 성공한 서울시장의 상징사업이 됐습니다. 서울광장이 문을 연 날 이 시장이 어느 언론사와 인터뷰한 동영상을 봤습니다. “시민들에게 불리한 어떠한 활동도 제재가 없습니다. 서울광장은 24시간 열려 있습니다. 마음껏 즐기셔도 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시장도 광장을 품에 안고 기뻐하는 시민들 이상으로 기... -
‘문디 가시나’ 목순옥
‘아내야’ ‘옥이야’ ‘순옥아’ ‘문둥아’ ‘내 마누라’ ‘문디 가시나’.천상병 시인은 부인 목순옥씨를 이렇게 여러 가지 말로 불렀습니다. 언어를 갈고 닦는 시인답게 부인을 부르는 말도 그때그때 기분에 달랐습니다. 문디라는 말은 경상도 사투리로 문둥이를 뜻합니다. 그러니 문디 가시나란 말은 문둥이 계집애라는 뜻인데 사랑스러운 부인을 부르는 말치고는 좀 흉측하죠? 그러나 그 말속에는 경상도 사투리 특유의 반어적인 함축미가 숨겨져 있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말 중에 천 시인이 기분이 아주 좋을 때는 ‘아내야’라고 불렀다고 합니다.천 시인이 어떤 말로든 부인을 소리내 불러보지 못한지도 벌써 16년이 됐습니다. 지난달 28일이 기일이었습니다. 마침 기일을 앞두고 천 시인이 생전에 살았던 수락산 입구에 천상병 공원이 문을 열었습니다. 생활시인이었던 천 시인을 일상생활에서 자연스레 가까이 접할 수 있게 돼 다행입니다. 천 시인 부부가 함께한 21년을 되돌아보면서 부부의 의미를 되새겨... -
내 사랑 엄앵란
한 3주쯤 됐을까요. 점심시간에 회사 근처에서 손수레 행상이 지나가는 것을 우연히 봤습니다. 그 손수레 바퀴 쪽에는 뜻밖에 옛날 영화 포스터가 붙어있었습니다. 포스터에는 머리를 비교적 짤막하게 하고 조각한 듯한 젊은 시절의 신성일씨 얼굴이 큼직하게 들어있었고 제목도 한자로 크게 쓰여 있었습니다. 下宿生(하숙생). 알아보니 1966년 김지미씨와 주연한 영화더군요. 무엇을 파는 행상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데는 ‘신성일’만한 게 없다는 생각을 하고 그 포스터를 내걸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적어도 영화인으로서의 신성일의 위치는 이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럴 것입니다. 1960~70년대 많은 사람들이 신성일의 영화를 보고 많이 울고 웃었습니다. 최근 그가 낸 책의 제목처럼 신성일은 시대를 위로하는 큰 별이었죠. 한 시대를 풍미한 그였지만 그도 위로(또는 비난이었을지도 모르지만)를 받을 때가 있었죠. 영화에서 잠시 외도해 정치에 발을 들여놓았고, 불미스러운... -
잃어버린 편지
뭔가를 잃어버리고 오랫동안 가슴앓이를 해 본 적이 있습니까. 누구나 한 두 번쯤은 몹시 아끼던 물건을 잃어버리고 안타까워했던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곁에 두고 애지중지하던 것일수록 상실의 쓰라림은 더했을 겁니다. 하나를 꼽으라면 저는 편지를 꼽습니다. 학창시절과 군대시절 친구들과 주고받았던 편지를 본가에 보관하고 있었는데 집을 옮겨 다니던 와중에 몽땅 잃어버렸던 기억입니다. 가정의달 5월, 편지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봅니다. 제가 언제부터 누군가에게 편지를 썼는지, 기억에 남는 편지가 무엇이었는지….어렴풋한 기억으로는 편지다운 편지를 처음 쓴 때는 31년 전인 고등학교 1학년때였던 것 같습니다. 너무 늦었나요. 고등학교 때는 마산에서 먼 데서 온 학생들이 많았습니다. 첫 여름방학. 시골친구들은 고향으로 돌아갔고 그들과 주고받은 짤막한 글들이 편지에 대한 첫 경험이었던 것 같습니다. 군대생활할 때 편지의 기억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군대 갔다 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럴 것입... -
인문학 바람 ?
올해 대학생이 된 큰아이가 학교에서 받아 온 학교 생활 안내서를 우연히 들춰보게 됐습니다. 고등학교 생활이 지긋지긋하다던 아이가 대학에 가서 뭘 배우고 어떤 생활을 할지 궁금했습니다. 안내서에는 대학 4년간 교육과정, 전공과목 소개, 진로·직업 소개 등이 있었습니다. 그걸 보다가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드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바로 교육과정 중 ‘교양’ 교과목이었습니다. 교양과목 중 상당수가 실용영어, 제2외국어, 경제, 경영, 기업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아이에게 한마디 했습니다. “네가 이공계지만 교양과목이 너무 부실한 것 같구나.” 교양이라…. 우리는 뭘 교양이라고 하지요?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정신적 자양분이 아닐까요. 그럴 필요가 있나 싶지만 이를 굳이 학문적 영역으로 따지자면 문학, 역사, 철학일 것입니다. 뭉뚱그려 말하면 인문학일 것이고요. 나의 질문에 아이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공계는 전공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되지 않아요?” 아이 말은 곧 인... -
‘답사기’를 기다리며
유홍준 교수와 를 떼놓고 생각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오랜만에 책꽂이에 꽂혀 있는 그 책을 꺼내봤습니다. 1995년 4월에 구입한 책이더군요. 1권이 93년 5월에 처음 나왔으니 초판 발행 2년여 만에 구입한 셈입니다. 당시 그 책은 (지금도 꾸준히 잘 팔리고 있지만) 베스트셀러였습니다. 문화재를 잘 모르는 저도 책에 나와 있는 여정을 따라 답사하고 싶다는 생각을 할 정도였으니 독자들에게 대단한 영향을 미친 것은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그 책은 유 교수를 문화재청장으로 만든 일등공신이었습니다. 그러나 청장이 된 뒤 그는 정작 비문화적인 언행으로 여러 차례 구설에 올랐지요. 유 교수는 이번 인터뷰에서 당시 언론의 비판에 대해 당당하게 조목조목 반박했는데 독자들은 과연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합니다.문화재 담당 부처 수장으로서 가장 뼛속까지 사무치는 일은 지난해 2월 숭례문 소실이었을 것입니다. 그때 집에서 불타는 숭례문을 보면서 스스로 문화유산 전도사라는 유 청장의 얼굴을 떠올렸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