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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길 잃기’의 고통 속에서 새로운 생의 무지개도 함께 피어올랐다
길을 잃는다는 것은 시간낭비일까. 조금 모자라고, 자꾸 한눈팔고, 주의력이 부족한 사람들만이 길을 잃는 것일까. 작가 리베카 솔닛의 <길 잃기 안내서>에 대한 강연을 하던 중 한 독자가 질문을 던졌다. 이 책에서는 길 잃기의 아름다움을 예찬하고 있지만, 자신은 아직도 길을 잃는다는 것이 뭔가 손해 보는 일 같아 두렵다고. 나는 독자의 두려운 눈빛 속에서, 웬만하면 길 같은 건 결코 잃어버리지 않고 싶었던 20대 시절의 나를 발견했다. 지금은 나도 리베카 솔닛 못지않게 길 잃기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수백 가지 방법에 대해 밤새도록 수다를 떨고 싶을 정도다. 하지만 아직 여행 마니아가 되기 전, 인생에서 오직 ‘쭉 가던 길’로만 직진해 오던 나는, 절대로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뭔가 술술 잘 풀리지 않는 느낌, ‘이 길이 아닌가 보다’라는 느낌이 조금이라도 들라치면 재빨리 도망쳐 나오고자 안간힘을 썼다. 칭찬받는 길, 효율성이 극대화되는 길이 아니면... -
(23)정처 따위는 없는 소녀와 알파카 내 마음의 현을 울리는 여기 천국임을 이제야 알겠다
까르르, 끊임없이 반복되는 케추아족 사람들의 환대 라마의 기다란 속눈썹이 느리디느리게 깜빡이는 시간 어떤 문화유산이나 유명한 예술작품 하나 본 적 없는 날인데도, 그날의 평범한 일상이 최고의 여행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페루에서 라마와 알파카를 바라보며 보낸 시간이 그랬다. 라마와 알파카에게는 ‘시간을 잊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내게 조금만 용기가 있었더라면, 라마를 데리고 다니는 케추아족 소녀에게 “한 번만 너의 친구 라마를 쓰다듬어도 되겠니?”라고 물어보았을 것 같다. 나는 바짝 다가가 라마와 친구가 되지는 못하고 조금 떨어져서 물끄러미 바라보며 홀린 듯 시간을 보내곤 했다. “너는 페루에 라마 찍으러 왔니?” 내가 페루에서 라마나 알파카만 보면 사족을 못 쓰고 멍하니 멈춰서서 바라보거나 수없이 사진을 찍자 일행이 물었다. 겸연쩍지만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 했다. 라마를 찍으러 페루에 간 것은 아니지만, ‘낙타과’에 속하는 동물들만 보... -
(22)말린체의 아들 ‘첫 메스티소’는 두 세계를 잇는 메신저가 아닐까
멕시코 여성들이 문양과 색으로 정체성을 표현했던 ‘우이필’…조임이 없어 목과 팔만 끼우면 금세 내 것 같은 느낌이 된다. ‘창조적 예술가’ 프리다 칼로에겐 화려한 우이필이 잘 어울린다. 타인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는 그녀에게서 ‘무한한 자유’를 발견한다. 칼로의 남편 리베라가 그린 벽화에는 정복자 코르테스와 그의 연인이자 노예 통역사인 말린체가 그들의 아이를 업고 있다. 종족을 팔아넘긴 배신자라 은밀하고 칙칙하게 그렸을까. 소설 ‘말린체’에는 그녀가 숫자 8에 관심을 보이는 장면이 나온다.‘혼혈 아들’을 상징한 8은 분열과 갈등의 해답이 아닐까. 변절자와 페미니스트 사이, 말린체는 그저 자유를 꿈꾼 여성인 듯 싶다.라틴아메리카 여행의 색다른 묘미 중 하나는 각 나라의 전통의상을 바라보는 즐거움이다. 멕시코의 전통의상 우이필(huipil)은 형형색색의 색실로 이루어진 자수(刺繡), 헐렁한 듯하면서도 결코 축 쳐지지는 않는 미묘한 긴장감이 서린 라인... -
(21)‘슬픈 탱고’처럼 비극이 흐르는 곳 미안하다 아직 꽃피지 못한 수많은 꿈들에게
아름다움을 찾으려 하는 노력 속에서 문득 죄책감을 느끼는 순간들이 있다. 라틴 아메리카의 아름다움을 찾아 떠난 여행자들은 아르헨티나의 탱고에 열광하고, 오페라극장을 개조한 알 아테네오 서점의 놀라운 인테리어에 감탄한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양쪽에서 감상할 수 있는 이구아수폭포의 웅장함에 놀라고, 카리브해의 파도가 다이아몬드처럼 투명하게 부서지는 아바나의 말레콘 앞에서 황홀경을 느낀다. 여행 속에서 우리는 마치 어떤 의무감에 사로잡힌 듯 그저 속절없이 아름다운 것들을 발견하려 한다.하지만 그 아름다움들 속에는 지워지지 않는 아픔의 흔적들, 아직 끝나지 않은 고통의 흔적들이 숨어 있다. 라틴 아메리카의 대부분은 스페인의 잔혹한 식민통치 경험을 지니고 있으며, 브라질은 포르투갈 식민지였다는 사실은 여전히 끝나지 않은 역사적 트라우마를 상기시킨다. 식민주의의 폭력이 다행히 지금은 끝난 고통이라면, 여성을 향한 끊임없는 납치와 강간·살해 같은 강력범죄는 아직 끝나지 ... -
(20)물음표가 가슴에 화살처럼 박혔다
한국전쟁에 4000명 넘는 군인을 파병했던 콜롬비아마르케스의 소설 속 늙은 대령의 모습엔 한국 파병 역사의 흔적이 있다계엄 아래의 콜롬비아, 오지 않을 희망을 기다리던 노병여행이 끝난 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여행이 끝난 후 그 장소를 더 깊이 사랑하게 되어, 더 많이 조사하고, 더 오래 궁리해야 깨닫게 되는 것들. 나의 라틴 아메리카는 그곳에 있을 때보다도 지금 이곳에서 뒤늦게 공부하고 탐색하며 알게 된 것들로 더욱 오래오래 마음속에서 빛난다. 여행이 끝나도 또 다른 마음속 여행이 지속되는 듯한, 더 깊고 따스한 여행. 오래오래 잔열이 식지 않는 뚝배기처럼 향긋한 뒷맛을 남기는 이런 여행이 좋다. 라틴 아메리카 여행이 끝난 뒤 여행 장소들과 관련된 작가들의 작품을 열심히 찾아보던 중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를 읽게 되었다. 이 작품을 읽으며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가 한국과도 관련 ... -
(19)외워서 흉내낸다고 될 리가 없다 자기 안의 리듬을 살아내는그 자유로운 몸짓이
마치 춤의 유전자가 있는 것처럼 숨 쉬듯 자연스러운 그들의 춤에서융이 말하는 ‘무의식의 의식화’, 내면의 희열을 찾는 ‘개성화’를 느꼈다룸바, 살사, 파소도블레, 자이브, 차차차의 공통점은? 이 모두가 라틴 아메리카에서 유래된 춤들의 이름이라는 점이다. 라틴 아메리카 여행에서 놓쳐서는 안될 것은 바로 일상 곳곳에서 부담 없는 가격으로 관람할 수 있는 라틴 댄스의 향연이다. 아르헨티나의 탱고 디너쇼, 브라질의 라파인쇼, 쿠바의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 등 유명한 퍼포먼스들뿐 아니라 평범한 레스토랑이나 소박한 공연장에서도 훌륭한 춤공연을 볼 수 있다. 수많은 라틴 아메리카 사람들의 몸에는 마치 ‘춤의 유전자’가 선천적으로 입력돼 있는 것 같다. 쿠바 사람들과 브라질 사람들은 그냥 걸어 다닐 때도 왠지 신바람이 절로 나고, 어쩐지 리드미컬한 몸짓으로 걷는 것처럼 보인다.사실 나의 라틴 아메리카 기행에서 ‘가장 신기하면서도, 가장 따라하기 어려운 것’은 바로 ... -
(18)‘나에게 안겨’ ‘여기 앉아 쉬다 가렴’…바라만 보아도 편안해진다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해도, 어쩐지 위로가 되는 풍경들이 있다. 시원하게 물보라가 흩어지는 분수 아래서 사람들이 흐르는 물을 만져보고 동전을 던지며 소원을 비는 풍경. 가파른 산등성이를 넘고 또 넘어 마침내 정상에 다다르자,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여기저기서 ‘소원을 비는 돌멩이들’을 쌓아 올린 장엄한 돌무더기를 발견했을 때. 새까만 기왓장에 하얀 펜으로 또박또박 소원을 적어 절을 짓는 공사장에 쌓아 올린 모습을 볼 때. 이렇게 한다고 해서 꼭 소원이 이뤄지는 것은 아님을 알면서도 사람들은 돌덩이를 차곡차곡 쌓아 올리고, 소원을 비는 편지를 쓰고, 두 손 모아 기도하며 저마다 자신의 바람을 마음속으로 속삭인다.이런 풍경들의 특징은 ‘지역성’보다 ‘보편성’이 강하다는 점이다. 스위스의 마터호른 산꼭대기에서도 네팔의 전통사원에도 한국의 사찰에서도 흔히 발견된다. 사람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두 손을 모으고 탑 주위를 수백 번씩 돌기도 하고, 어여쁜 돌멩이를 골라 이름... -
(17)사막의 거대한 촛불이 속삭인다…힘들어도 결코 포기하지 말라고
“선생님, 저는 20개국 여행이 목표입니다!” “작가님, 지금까지 몇 개국이나 가보셨어요?” “가장 오래 떠나 본 기간이 며칠이세요?” 독자들은 가끔 ‘얼마나 오래, 얼마나 많은 도시를 다녔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런데 정작 나는 ‘몇 개국을 여행했는지’ 계산해 본 적이 없다. 여행에서만은 그런 양적인 문제, ‘숫자’와 관련된 강박을 가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평생 계속되어온 숫자와의 씨름에 이미 지쳐있지 않은가. 조회 수와 판매량, 성적과 등수, 키와 몸무게, 지지율과 가성비, 날짜와 연차, 연봉과 부동산 가격에 일희일비하는 우리의 삶이 너무도 피곤하지 않은가. 나는 여행할 때만이라도 ‘숫자’를 잊고 싶다. 그러다 보니 여행할 때는 날짜와 요일마저 잊어버릴 때가 있다. 날짜와 요일조차 잊은 채 여행 그 자체에 완전히 몰입할 수 있을 때, 여행이 정말 성공했다는 느낌이 든다. 일상의 시곗바늘 위로 일분일초를 아쉬워하며 바쁘게 뛰어다닐 때는 느끼지 못하... -
(16)아! 그때 그 춤을 꼭 췄어야 했는데…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기억을 떠올리며 내 마음속 여행이 다시 시작됐다
타코 즐길 수 있는 멕시코 음식점 언젠가부터 한국에도 점점 늘어 쿠바·아르헨티나 등 영화·음악도 이젠 집에 앉아 쉽게 접할 수 있어 “미국 음식은 별로 맛이 없지 않나요? 거의 모든 음식에 치즈와 버터, 설탕을 너무 많이 넣어서 원래 재료의 맛을 느끼지 못하겠어요. 저는 여기 와서 미국 음식보다는 멕시코 음식을 더 많이 먹었어요.” 얼마 전 뉴욕의 택시 운전사에게 들은 말이다. 그는 미얀마 출신인데 멕시코 음식과 한국 음식을 좋아하고, <태양의 후예>를 1회부터 마지막 회까지 빠짐없이 시청했으며, <주몽>의 광팬이라고 한다. 뉴욕의 한식당에서 매콤한 제육볶음에 맥주를 곁들여 먹으며 한국 드라마를 보는 것이 그의 낙이라고 한다. ‘한국 음식은 많이 맵지 않으냐’고 물었더니, 태국 음식과 비슷한 미얀마 음식은 훨씬 더 맵다며 한국 음식은 ‘매운 축’에도 끼지 못한다고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나는 그가 좋아하는 멕시코·한국·미얀마 음식 사이... -
(15)자연의 축복과 인간의 손길…‘한 잔’이 이렇게 행복한 거였구나
산티아고에서 버스로 세 시간 남짓낮술도 와인도 즐길 줄 모르기에두렵고 자신없던 와이너리 방문얼마 전 <부르고뉴, 와인에서 찾은 인생>이라는 영화를 보면서 한번도 꿈꾸지 않았던 와이너리의 삶을 부러워하게 되었다. 물론 와이너리를 경영하는 일은 결코 녹록지 않다. 와이너리의 삶을 멀리서 바라보면 낭만과 여유로 가득해 보인다. 끝없이 펼쳐진 거대한 포도농장을 힘차게 일구고, 매일 향기로운 와인을 마실 수 있는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전원적이고 목가적인 삶. 하지만 와이너리를 가꾸고 보살피는 가족들은 당최 쉴 틈이 없다. 한 해의 절반 이상은 농부로 살아야 하고, 그 나머지 절반은 와인을 만들고 숙성시키는 일에 매달려야 한다. 그 바쁜 와중에 경영난과 세대 간 갈등까지 겹치니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다. 머리로는 ‘정말 힘들겠다’ 싶으면서도 가슴속에서는 은근한 찬탄과 경외의 감정이 밀려들었다. 와인을 한 모금 마시는 것만으로도 포도 품종과 생산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