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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공간과 이웃들, 도시를 만드는 그 사람들
서울 성수동2가 299-129번지, 50년쯤 된 상가 1층 점포. 이곳에 그 할머니들이 들이닥친 때는 지난해 여름이었다. ‘도시 이곳저곳을 여행하는 병풍’을 상상하는 전시회가 열린 날. 할머니들은 여기에서 전을 부치고 송편을 빚었다. 음, 이건 대관절 무슨 퍼포먼스일까? 전시를 보러 온 사람들이 입구에서 어리둥절. 어떤 외국인 관람객은 엉겁결에 할머니들이 건넨 찐 감자를 받아 먹었다. 그날 이후 할머니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이곳을 점거하고 또 점거했다. ‘병풍의 여행’이란 콘셉트와 어울리게 전시공간에 커다란 평상을 두고 문을 활짝 열어둔 게 좋은 핑계가 됐다. 무릇 평상이란 원래 그렇게 쓰는 물건이니까. 누구도 할 말이 없는 광경. 할머니들은 그해 여름을 그렇게 ‘도시를 만드는 사람들’에서 보냈다.문 활짝 열어두고 커다란 평상 설치하니 삼삼오오 모인 동네 할머니들‘주차장 쉼터’에선 아이들과 즐기기도…내일 성수아트홀에서도 다 같이 놀아요도시를 만... -
저녁과 공동체가 있는 삶, 도시는 더 작아져야 산다
이번 파리 올림픽 내내 에어컨을 두고 말이 많았다. 에어컨 없는 선수촌에서 잇따라 탈출한 선수들은 경기장을 오가는 버스에서도 ‘노(No) 에어컨’에 시달렸다. 파리 올림픽 조직위원회는 한발 양보해 에어컨 2500대를 선수촌에 제공했는데, 대신 사용하려면 요금을 내라고 했다. 조직위는 기후위기를 내세우며 한여름 올림픽을 이렇게 운영했고, 그 의도와 상관없이 폭염을 피하는 데 돈이 들게 만들어 부국과 빈국 사이 격차만 더 벌린 것 아니냐고 비판받았다. 탄소를 실컷 배출해 발전한 선진국이 이제 와서 후진국·개발도상국에 엄격한 재생에너지 기준을 들이대며 갈등하는 장면이 떠오른다.이런 모순적 행태에도 불구하고 기후변화에 경각심이 필요하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거칠고 꽉 막힌 운영 방식에 이의를 제기할 수는 있겠으나, 올림픽이란 국제무대를 배경 삼아 기후 의제를 부각한 효과를 생각하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강단이다. 냉방 기술이라면 오직 에어컨만 떠올리게 길든 우... -
다르지만 다 함께 살아갈 힘 기른다
요즘 여당 대표가 되겠다고 나선 한동훈은 지난 2월, 서울 은평구 구산동의 ‘다다름하우스’란 다가구주택을 방문했다. 당시 그 당의 비상대책위원장이었던 그는 여기서 인상적인 사진 한 장을 남겼다. 전동휠체어를 타고 그를 마중 나온 청년 장애인 앞에 무릎을 꿇고 눈높이를 맞춰 대화하는 구도에 카메라 셔터음이 폭발했다. 이날 떠들썩한 방문 일주일 후, 국민의힘은 아동양육시설을 떠나 홀로 생활을 준비하는 자립준비청년에게 맞춤형 주택과 전세금 지원을 강화한다는 공약을 발표했다.한동훈은 알았을까? 그가 자립준비청년을 만날 장소로 고른 다다름하우스에는 이날 그를 안내한 청년과 같은 장애인이 16가구 산다는 사실 말이다. 자립준비청년 4가구보다 이들이 훨씬 더 많지만, 국민의힘이 다다름하우스 방문 이후 공개한 공약에서 장애인 이야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한동훈이 알아야만 했던 중요한 사실은 또 있다. 다다름하우스는 한국토지주택공사(LH)의 ‘매입임대주택’인데, 이 매입임대주택... -
‘콸콸’ 물을 끌어와야 복원? 얕은 물길에도 이야기는 흐른다
청계천은 어디에서 왔을까? 태평로 청계광장 앞에서 동쪽으로 10㎞쯤 흘러 한양대학교 부근에서 중랑천에 합류하는 이 물길의 시작이 그냥 광장일 리는 없다. 중랑천은 청계천을 흡수한 다음 서쪽으로 계속 흘러 서울숲 근처에서 한강과 한줄기가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청계천은 이렇게 중랑천을 거쳐 흘러든 한강에서 온다. 한강 물을 정수해 하루 4만t씩 끌어다 만든 물길이 지금의 청계천이다. 이걸로도 부족해서 주변 지하철에서 발생하는 지하수도 하루 2만t씩 청계천에 흘려보낸다.청계천은 2005년 ‘복원’되었다. 복원, 즉 원래 모습으로 되돌린 것이라면 청계천엔 원래 이렇게 물이 콸콸 흘렀단 말일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청계천은 비가 올 때만 물이 흐르는 건천이었다. 평소엔 말라 있거나 물줄기가 끊긴 물웅덩이만 듬성듬성 자리했다. 20세기 초만 해도 고인 물에 오물이 섞여 썩은 내가 진동했다. 콜레라·장티푸스가 유행하자 일제 조선총독부는 청계천을 그 원인으로 지목했다. 19... -
뿌리를 키우는 사람들
서울 동북쪽 끄트머리에 백사마을이란 동네가 있다. 1960~1970년대 서울시는 남대문, 용산, 청계천 등지에 빼곡했던 무허가 주택을 철거한 다음 철거민을 트럭에 실어 백사마을 같은 변두리로 날랐다. 이 마을엔 아직 선대의 이주 서사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남아 있다. 수백 채 가옥은 군사정권 시절 판자촌 개량 사업을 벌일 때 썼던 붉은 시멘트 기와, 회색 시멘트 블록투성이다. 여기는 시간이 멈춘 것만 같다.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의 ‘흙수저’ 윤현우, 그의 엄마가 국밥을 팔던 ‘삼거리식당’은 실제 이 마을에 있는 밥집이다.백사마을에는 현재 주민이 거의 없다. 재개발 인허가가 최종 문턱을 넘을 듯해 보였던 2~3년 전부터 떠나는 사람이 급격히 늘었다. 지금은 거의 ‘유령 마을’에 가깝다. 무슨 포부였는지 건축가 10명이 싹 밀고 다시 짓는 ‘K재개발’ 대신 새로운 재개발을 시도해보려다가 크게 좌절했다. 백사마을도 곧 ‘K아파트’가 될 운명을 기다린다.... -
삶의 기록으로 남다, 기억조차 폐기되다
일본 도쿄 오모테산도에 있는 쇼핑몰 오모테산도 힐스는 안도 다다오의 2006년 작품이다. 오모테산도에 들르면 이 건물을 지나지 않기도 어렵다. 하라주쿠역부터 오모테산도역까지 약 1㎞ 이어지는 느티나무 가로수길에 300m가량 접한 긴 건물이 오모테산도 힐스다. 명품으로 유명한 이 거리에서 샤넬로 시작해 크리스찬 디올, 에르메스를 거쳐 루이비통으로 끝나는 여정에 오모테산도 힐스는 길 건너편에서 묵묵히 함께한다. 가로수가 울창한 계절에는 오모테산도 힐스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안도 다다오가 이 건물을 설계하면서 느티나무 가로수보다 높게 지을 수 없다고 고집한 탓이다. 쟁쟁한 럭셔리 브랜드의 각축장에서 오모테산도 힐스는 지금 홀로 키가 작다.오모테산도 힐스 자리에는 원래 ‘도준카이아오야마’라는 3~4층짜리 낡은 아파트가 있었다. 일본이 간토대지진 후 도쿄를 대대적으로 재건하면서 1927년 지은 건물이다. 지진이 할퀸 자리에 튼튼히 지어야 했기에 집합주택 중에는 일본 ... -
“노들섬, 그냥 놔둘 순 없나요”
서울 한강 변에는 섬의 기원을 지닌 곳이 제법 많다. 이를테면 뚝섬. 이름에 여전히 섬의 정체성이 남았다. 지금은 서울숲이 되었다. 이 공원을 거닐며 섬의 흔적을 느낄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억새밭으로 유명한 하늘공원에 올라서도 마찬가지다. 섬은커녕 불과 30여년 전까지 쓰레기 매립지였다는 기억조차 이제는 희미하다. 뽕밭이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된 잠실은 말할 것도 없다. 그나마 여의도가 여전히 한강과 샛강에 둘러싸여 섬의 위상을 간직하고 있는데, 한때 ‘정치·경제 1번지’라고 불렸던 이곳에서는 무수한 도로와 지하철에 둘러싸여 섬에 있다고 자각할 틈새가 없다.모름지기 섬이라면 그곳에 닿는 데 드는 수고가 육지와는 달라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뚝섬, 난지도, 잠실을 더는 섬이라고 보지 않는다. 여의도도 매한가지다. 누구나 쉽게 오갈 수 있다. 드나듦이 이보다는 좀 더 고생스러워야 비로소 섬다운 섬이라고 본다. 서울에서는 선유도나 밤섬이 그렇다. 각각 양화대교와 ... -
임대료 단 1400원, 조건은 “좋은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하라”
“그거 어디서 파는 거여?” 경복궁 서쪽 동네, 이른바 서촌에 사는 최성욱(사진)씨가 집 여기저기에 ‘뽁뽁이’를 칠 때였다. 옆집 노인이 최씨네 마당에 성큼 들어오며 뽁뽁이란 물건을 궁금해했다. 최씨가 꿈꿔온 한옥살이를 시작한 2010년, 여름은 그저 좋았다. 마당에서 빔프로젝터로 온갖 영화를 다 틀어댔다. 그런데 한 10월쯤 되자 겨울처럼 차가운 공기가 툇마루를 쓸었다. 한옥에 갓 이사 온 청년이 찬 바람 좀 막아보려고 산 뽁뽁이가 거의 평생 한옥살이를 한 노인의 눈에 참 신통해 보였나 보다.당시 최씨는 서촌에서 두 갈래 주민을 봤다. 한쪽은 개발파다. 불편한 한옥 따위 싹 밀어버리고 아파트를 짓자고 했다. 다른 쪽은 보존파다. 무슨 소리냐, 그래도 전통을 지켜야 한다고 맞섰다. 최씨는 보존파를 지지했는데, 그때 노인에게 뽁뽁이 정보를 주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한옥? 지켜야지. 하지만 집도 나이를 먹는다. 이 낡은 집을 지키고만 살라는 건 이런 노인에게 ... -
알록달록 ‘극장의 꿈’ 허문 자리 추억조차 앉을 곳이 없다
윤홍식씨는 원주 아카데미극장의 건물 관리인이었다. 아침이면 극장 문을 열고 청소하며 손님 맞을 채비를 했다. 젊은 시절 영화 구경하러 이 극장에 드나들었는데, 환갑이 넘어 그 극장을 돌보게 된 경험은 꽤 특별한 느낌을 줬다. 60년 된 아카데미극장을 보전하자는 시민들이 모여 재생 사업을 벌일 때였다. 그 사람들은 윤씨를 “반장님”이라고 불렀다.지난해 10월20일, 윤씨는 극장 지붕 아래 있었다. 지붕은 가운데가 살짝 솟은 삼각형꼴이었다. 나무로 만든 구조물이 지그재그 얽힌 다락 같은 공간에 몸 누일 자리를 폈다. 그곳에서 되는 대로 버틸 셈이었다. 처음 극장 관리인직을 제안했던 사람에게 띄어쓰기 없는 메시지를 보냈다. ‘극장옆구리가터져나갈때자리에못있겠더구만. 미안하네말릴것같아혼자결정해서.’ 그의 표현대로 굴착기가 극장의 옆구리에 커다란 구멍을 내고 있었다. 윤씨는 그 공간에서 엿새를 보냈다. 이렇게 하면 극장 철거를 막을 수 있겠거니 했다. 굴착기는 잠깐 멈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