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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기록으로 남다, 기억조차 폐기되다
일본 도쿄 오모테산도에 있는 쇼핑몰 오모테산도 힐스는 안도 다다오의 2006년 작품이다. 오모테산도에 들르면 이 건물을 지나지 않기도 어렵다. 하라주쿠역부터 오모테산도역까지 약 1㎞ 이어지는 느티나무 가로수길에 300m가량 접한 긴 건물이 오모테산도 힐스다. 명품으로 유명한 이 거리에서 샤넬로 시작해 크리스찬 디올, 에르메스를 거쳐 루이비통으로 끝나는 여정에 오모테산도 힐스는 길 건너편에서 묵묵히 함께한다. 가로수가 울창한 계절에는 오모테산도 힐스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안도 다다오가 이 건물을 설계하면서 느티나무 가로수보다 높게 지을 수 없다고 고집한 탓이다. 쟁쟁한 럭셔리 브랜드의 각축장에서 오모테산도 힐스는 지금 홀로 키가 작다.오모테산도 힐스 자리에는 원래 ‘도준카이아오야마’라는 3~4층짜리 낡은 아파트가 있었다. 일본이 간토대지진 후 도쿄를 대대적으로 재건하면서 1927년 지은 건물이다. 지진이 할퀸 자리에 튼튼히 지어야 했기에 집합주택 중에는 일본 ... -
“노들섬, 그냥 놔둘 순 없나요”
서울 한강 변에는 섬의 기원을 지닌 곳이 제법 많다. 이를테면 뚝섬. 이름에 여전히 섬의 정체성이 남았다. 지금은 서울숲이 되었다. 이 공원을 거닐며 섬의 흔적을 느낄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억새밭으로 유명한 하늘공원에 올라서도 마찬가지다. 섬은커녕 불과 30여년 전까지 쓰레기 매립지였다는 기억조차 이제는 희미하다. 뽕밭이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된 잠실은 말할 것도 없다. 그나마 여의도가 여전히 한강과 샛강에 둘러싸여 섬의 위상을 간직하고 있는데, 한때 ‘정치·경제 1번지’라고 불렸던 이곳에서는 무수한 도로와 지하철에 둘러싸여 섬에 있다고 자각할 틈새가 없다.모름지기 섬이라면 그곳에 닿는 데 드는 수고가 육지와는 달라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뚝섬, 난지도, 잠실을 더는 섬이라고 보지 않는다. 여의도도 매한가지다. 누구나 쉽게 오갈 수 있다. 드나듦이 이보다는 좀 더 고생스러워야 비로소 섬다운 섬이라고 본다. 서울에서는 선유도나 밤섬이 그렇다. 각각 양화대교와 ... -
임대료 단 1400원, 조건은 “좋은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하라”
“그거 어디서 파는 거여?” 경복궁 서쪽 동네, 이른바 서촌에 사는 최성욱(사진)씨가 집 여기저기에 ‘뽁뽁이’를 칠 때였다. 옆집 노인이 최씨네 마당에 성큼 들어오며 뽁뽁이란 물건을 궁금해했다. 최씨가 꿈꿔온 한옥살이를 시작한 2010년, 여름은 그저 좋았다. 마당에서 빔프로젝터로 온갖 영화를 다 틀어댔다. 그런데 한 10월쯤 되자 겨울처럼 차가운 공기가 툇마루를 쓸었다. 한옥에 갓 이사 온 청년이 찬 바람 좀 막아보려고 산 뽁뽁이가 거의 평생 한옥살이를 한 노인의 눈에 참 신통해 보였나 보다.당시 최씨는 서촌에서 두 갈래 주민을 봤다. 한쪽은 개발파다. 불편한 한옥 따위 싹 밀어버리고 아파트를 짓자고 했다. 다른 쪽은 보존파다. 무슨 소리냐, 그래도 전통을 지켜야 한다고 맞섰다. 최씨는 보존파를 지지했는데, 그때 노인에게 뽁뽁이 정보를 주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한옥? 지켜야지. 하지만 집도 나이를 먹는다. 이 낡은 집을 지키고만 살라는 건 이런 노인에게 ... -
알록달록 ‘극장의 꿈’ 허문 자리 추억조차 앉을 곳이 없다
윤홍식씨는 원주 아카데미극장의 건물 관리인이었다. 아침이면 극장 문을 열고 청소하며 손님 맞을 채비를 했다. 젊은 시절 영화 구경하러 이 극장에 드나들었는데, 환갑이 넘어 그 극장을 돌보게 된 경험은 꽤 특별한 느낌을 줬다. 60년 된 아카데미극장을 보전하자는 시민들이 모여 재생 사업을 벌일 때였다. 그 사람들은 윤씨를 “반장님”이라고 불렀다.지난해 10월20일, 윤씨는 극장 지붕 아래 있었다. 지붕은 가운데가 살짝 솟은 삼각형꼴이었다. 나무로 만든 구조물이 지그재그 얽힌 다락 같은 공간에 몸 누일 자리를 폈다. 그곳에서 되는 대로 버틸 셈이었다. 처음 극장 관리인직을 제안했던 사람에게 띄어쓰기 없는 메시지를 보냈다. ‘극장옆구리가터져나갈때자리에못있겠더구만. 미안하네말릴것같아혼자결정해서.’ 그의 표현대로 굴착기가 극장의 옆구리에 커다란 구멍을 내고 있었다. 윤씨는 그 공간에서 엿새를 보냈다. 이렇게 하면 극장 철거를 막을 수 있겠거니 했다. 굴착기는 잠깐 멈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