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족 - 위구르족 18세기부터 갈등

이청솔기자

中정부, 종교·전통 무시… 신장 개발이익도 배제

이번 신장위구르 자치구 유혈사태의 배경에는 중국 한족과 위구르족 사이의 뿌리 깊은 갈등이 자리잡고 있다. 위구르인들은 자신들의 종교와 전통을 무시하는 중국 정부에 대한 반감을 꾸준히 키워왔다고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가 전했다.

이 지역은 18세기 중반 이후 중국 청조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나 위구르인들은 저항을 계속해 19세기 말 일시적으로 독립 이슬람국가를 건설하기도 했다. 청은 한족 농민들을 이주시키며 이 지역의 중국화를 추진했다. 1911년 신해혁명 이후 군벌의 지배 아래 놓였던 위구르인들은 2차대전 이후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공산당이 중국 본토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한 후 위구르족 지도자들에 대한 탄압이 벌어졌다. 이로 인해 신장은 중국의 자치구로 편입됐으나 위구르족의 저항은 계속 이어졌다.

위구르인의 민족분리운동은 90년대 이후 더욱 격렬해졌다. 옛 소련이 붕괴하면서 투르크계 이슬람 세력이 독립한 것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92~93년 위구르인들의 봉기가 일어났고 무차별 폭탄테러사건이 발생했다. 중국 정부는 무슬림 학교의 입학생 수에 제한을 두는 등 계속 탄압했다. 97년 베이징에서도 폭탄 테러가 발생해 버스와 백화점이 폭발했다. 베이징올림픽을 앞둔 지난해 여름에도 신장에서 폭탄테러가 잇따랐다.

역사적 이유 못지않게 위구르족이 겪는 경제적 어려움도 민족 갈등의 중요한 원인이라고 신문은 전했다. 타림분지와 타클라마칸 사막에 매장된 막대한 양의 석유와 천연가스는 새로운 갈등을 낳았다. 중국은 93년 석유 순수입국으로 돌아선 후 신장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러나 신장에서 거둔 이익이 위구르인들에게 돌아가지 않자 주민들의 반발이 커졌다.

중국 정부는 또 자원개발을 위해 노동자 3만여명을 이 지역으로 추가 이주시켰다. 위구르인들은 한족의 대량이주가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빼앗을까 전전긍긍하고 있다. 1955년 신장 인구의 76%를 차지했던 위구르족 비율은 현재 45% 미만까지 낮아졌다. 위구르인들은 지난 40여년 동안 부족한 수자원을 놓고 한족 이주민들과 경쟁을 벌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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