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쭈물하다’ 망해가는 온건·좌파 정당들

이인숙 기자

전에 본 적 없는 ‘센 지도자’가 먹히는 시대

‘우물쭈물하다’ 망해가는 온건·좌파 정당들

“이제 오바마를 기다리는 일은 관둬라.”

워싱턴포스트는 25일(현지시간) 미국 민주당을 향해 이렇게 일갈하며 “당신들 일은 스스로 알아서 하라”고 썼다. 도널드 트럼프에게 백악관을 내주고 버락 오바마라는 스타가 떠난 뒤 길을 잃은 민주당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프랑스에서는 58년 만에 주요 양당 후보가 대선 결선에도 오르지 못하는 일이 벌어졌다. 지지율 6%로 5등을 한 사회당은 처참하게 몰락했다. 영국 노동당도 6월 ‘브렉시트 총선’에서 참패가 예상된다. 일본 민주당은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독주 속에서 존재가 사라졌다.

기존 정치문법을 무시하는 ‘강한 지도자’들에 대한 갈망, 엘리트 정치권에 대한 반감이 포퓰리즘 정치인들의 득세를 불러오는 상황에서 자유주의 성향의 온건파, 좌파 정당들은 설 자리를 잃고 있다. 변화에 대한 욕구를 읽지 못하고, 세대교체에 실패하고, 야만적인 세계화의 피해자들 앞에서 ‘대안’을 내놓지 못한 탓이다. 지난해 대선에서 의회까지 모두 공화당에 내준 미국 민주당은 트럼프 정부의 폭주 앞에도 무기력하기만 하다. 무슬림 입국금지 행정명령에 제동을 건 건 사법부였고, ‘오바마케어’ 폐지가 무산된 건 공화당의 내분 때문이었다. ‘클린턴 패밀리’ 이후 세대교체를 하지 못한 민주당에는 이렇다 할 주자도 눈에 띄지 않는다.

지난해 대선을 취재한 기자들이 쓴 책 <산산이 부서진(Shattered)>에는 의미심장한 구절이 등장한다.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대선후보 캠프에서 일한 한 참모는 이렇게 말했다. “출마할 이유가 있어야 했다. 그게 아니라면 출마하지 말아야 했다.” 클린턴의 참모들도 왜 유권자에게 표를 달라고 하는지 알지 못했다는 얘기다. 민주당은 지난 25년 중 16년을 집권했다. 월가와 워싱턴의 큰손에게 안주하면서 신자유주의를 더 확대했고, 도시 엘리트에만 올인했다. 그사이 핵심 지지기반이던 노동자들을 잃었다.

일본 민주당도 지리멸렬 그 자체다. 자민당에서 떨어져나온 사람들과 야당 정치인들이 합쳐져 탄생한 민주당은 애당초 한 지붕 밑에 여러 세력이 모인 태생적 한계를 갖고 있었다. 2009년 55년 만에 정권을 교체했지만 이듬해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사고 대응에 실패한 뒤 3년 만에 정권을 내주고 처참하게 몰락했다.

영국 노동당의 지지율은 현재 보수당보다 20%포인트 넘게 뒤진 25% 안팎이다. 이대로라면 6월8일 총선에서 참패가 불보듯 뻔하다. 지난해 6월 브렉시트 국민투표 때 노동당은 유럽연합(EU) 잔류를 당론으로 내세웠지만 노동당 지지자의 3분의 1은 탈퇴를 선택했다.

‘제3의 길’을 주창한 토니 블레어의 노선을 이어가자는 중도파와 ‘더 왼쪽으로’를 외치는 강경 좌파 간 내분은 심각하다. 제러미 코빈 대표를 비롯한 강경 좌파가 똘똘 뭉쳐 당권은 지키고 있지만 재집권 전망은 보이지 않는다.

프랑스 사회당은 일간 르몽드의 24일 표현을 빌리면 “빙하기에 접어들었다”.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은 최악의 한 자릿수 지지율을 기록하는 등 천덕꾸러기로 전락했다. 경제회복을 이끌어내지도 못한 채 친시장 노동개혁을 내세웠다가 실패하는 바람에 사회당은 전통적 지지층도 극좌 후보 장 뤼크 멜랑숑에게 내줬다. 상당수 노동자들은 아예 마린 르펜의 민족전선(FN)에로 넘어갔다. 프랑스 사회당 출신의 피에르 모스코비치 EU 경제담당 집행위원은 24일 “유럽의 사회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다”며 “사회당은 지성적·정치적 재건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독일 사회민주당은 앙겔라 메르켈 총리 집권 기간 내내 우파 기민-기사연합의 ‘대연정’ 파트너로 연명했다.

오는 9월 총선을 앞두고 사민당은 유럽 정치무대에서 활약해온 마르틴 슐츠를 총리 후보로 내세워 회생을 벼르고 있다. 독일 내에선 상대적으로 새 얼굴인 슐츠는 과감한 좌클릭으로 메르켈에게 도전하고 있다. 지난 1월까지만 해도 기민당에 10%포인트 넘게 뒤져 있던 사민당 지지율은 2월 이후 2~3%포인트 격차로 좁혀졌다. 하지만 슐츠가 메르켈 장기집권 체제를 깰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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