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자리서 만난 변관식과 현중화…서화(書畵) 거장들의 특별한 묵향(墨香)

도재기 선임기자

제주 소암기념관, 기획전 ‘서귀소옹과 20세기 서화거장 Ⅶ-소정 변관식: 몽유강산’

근현대 화단·서단 대표작가, 소정과 소암의 풍경산수화·서예 60여점 선보여

현대미술에도 영감…설치미술가 최정화 “새삼 작업의 화두 떠올려”

한국 근현대 화단과 서단의 거목인 소정 변관식과 소암 현중화의 작품이 제주 소암기념관의 기획전을 통해 만나고 있다. 소정의 ‘금강바위’(1960년대, 37×31㎝, 종이에 수묵담채, 개인소장, 사진 왼쪽)와 소암의 ‘영봉靈峰’(1970년, 70×140㎝, 종이에 먹, 소암기념관 소장). 소암기념관 제공

한국 근현대 화단과 서단의 거목인 소정 변관식과 소암 현중화의 작품이 제주 소암기념관의 기획전을 통해 만나고 있다. 소정의 ‘금강바위’(1960년대, 37×31㎝, 종이에 수묵담채, 개인소장, 사진 왼쪽)와 소암의 ‘영봉靈峰’(1970년, 70×140㎝, 종이에 먹, 소암기념관 소장). 소암기념관 제공

한국 근현대 화단과 서단의 거장인 소정 변관식(1899~1976)과 소암 현중화(1907~1997)가 한 자리에서 만났다.

소정과 소암은 일제강점기와 전쟁, 남북분단 등 격동의 근현대사 속에서 뜨거운 예술혼을 그림과 서예로 펼쳐내며 미술사에 큰 획을 남겼다. 깊고 넓은 인문학적 소양에 기반한 두 거장에게 시·서·화(詩·書·畵)는 하나이고, 그림과 글씨는 한 뿌리(書畵同源·서화동원)였다.

근대라는 이름으로 또 서구 사상·미술의 확장으로 시·서·화가 갈라졌지만 이들은 시서화일체, 서화동원이라는 동양 예술사상을 토대로 치열하게 작업했다. 웅숭깊은 작품들은 현대 미술에 영감을 주고, 작가들을 각성시키고 있다.

제주도 소암기념관(서귀포시 소암로)에서 ‘서귀소옹과 20세기 서화거장Ⅶ-소정 변관식: 몽유강산(夢遊江山)’ 전이 열리고 있다. 제주특별자치도·소암기념관이 서화동원의 가치, 거장들의 예술세계를 재조명하기 위해 마련하고 있는 연속 기획전 ‘서귀소옹과 20세기 서화거장’의 일곱번째 전시다. 예술의 다원화 속에 근현대 그림과 서예의 현대적 가치와 의미를 되짚어보는 귀한 자리이자 소암기념관의 재개관 기념전이다.

소정 변관식의 ‘상림착색 霜林着色’(1960년대, 33×87㎝, 종이에 수묵담채, 인주문화재단 소장). 소암기념관 제공

소정 변관식의 ‘상림착색 霜林着色’(1960년대, 33×87㎝, 종이에 수묵담채, 인주문화재단 소장). 소암기념관 제공

지난 5~6일 찾은 기획전은 두 거장의 대표작 60점(소정 40점, 소암 20점)으로 3개층 전시실에 펼쳐졌다. 매화향같은 은은한 묵향 속에 두 예술가의 삶과 작품세계를 살펴볼 수있다. 특히 소정은 금강산을, 소암은 한라산을 중심으로 자연과 우리 삶을 작품으로 다루지 않았던가. 금강에서 한라까지 이 땅의 강과 산, 사람들의 희노애락이 작품 속에 생생하게 깃들어 있다.

소정은 조선의 마지막 화원인 외조부 조석진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다. 이후 일본 유학과 금강산 사생 여행, 전국 답사 등을 통해 조선 서화의 전통 위에 독자적 화풍·예술세계를 구축했다. “우리는 피동적이 되지 말고 능동적, 모방적이 되지 말고 독창적, 공상적이 되지 말고 현실적이어야 되겠다”는 말은 유명하다.

소정 변관식의 ‘금강운해 金剛雲海’(1960년대, 18.5×123.5㎝, 종이에 수묵담채, 인주문화재단 소장). 소암기념관 제공

소정 변관식의 ‘금강운해 金剛雲海’(1960년대, 18.5×123.5㎝, 종이에 수묵담채, 인주문화재단 소장). 소암기념관 제공

먹물을 살짝 묻힌 갈필, 층층이 먹을 쌓지만 맑게 드러나는 특유의 적묵법, 선 위에 여러 점을 찍어 선을 깨뜨리는 파선법 등의 기법이 잘 알려져 있다. 화면 속 다양한 시점, 대담한 공간구성, 깊은 공간감 등도 소정의 수묵 미학이다. 담채는 ‘갈색 장인’이라 할만큼 흙 색깔을 닮은 갈색이 두드러진다. 당대 유명 맞수인 청전 이상범이 부드럽고 온화하며 서정적이라면 소정은 거칠고 짙고 호방대담한 분위기에 서사적이다. 청전과 달리 소정은 화면 속 화제의 가치를 중시하기도 했다.

전시장에는 소정의 초기~말년 작까지, 유명 작품부터 낯설고 신선한 작품까지 다채롭게 나와 눈길을 잡는다. 인주문화재단·은평역사한옥박물관 등 기관·개인 소장품을 애써 모은 덕분이다. 소정의 작품세계는 ‘금강산 화가’라 불리듯 금강산 관련 작품에서 잘 드러난다. ‘금강바위’ ‘금강사계 6곡병풍’ ‘금강운해’ ‘보덕굴’ 등이다. 금강산은 소정에게 남북 분단으로 갈 수없는 고향, 이상향이었다.

여기에 ‘상림착색’ ‘세검설초’ ‘일편추의’ ‘산수풍경’ 등 시대별 풍경산수, 현대적 미감까지 엿보이는 ‘문어’와 생활 속 소재·주제들 작품도 선보인다. 모든 것을 비워낸듯 앙상한 나무 숲길을 홀로 걸어가는 뒷모습을 수묵담채로 담은 ‘만행’은 예술가·예술의 길을 상징하는 듯하다.

소암 현중화의 ‘능운 凌雲’(1972년, 129.5×32㎝, 종이에 먹, 소암기념관 소장). 소암기념관 제공

소암 현중화의 ‘능운 凌雲’(1972년, 129.5×32㎝, 종이에 먹, 소암기념관 소장). 소암기념관 제공

소정 작품과 나란히 소암의 역작들이 걸렸다. 소암은 동아시아 서단에서 주목받는 서예가로 서귀포 출신이다. 일본 유학을 통해 일본 서단을 주름잡은 그는 1950년대 중반 고향으로 귀국해 작품활동과 후학을 양성했다. 특히 ‘서방정토로 돌아가는 늙은이’란 뜻의 ‘서귀소옹(西歸素翁)’을 선언하고 오직 글씨에 매달린 치열한 작업은 잘 알려져 있다.

소암은 고전을 재해석하고 인간 삶과 자연의 이치를 서예 오체로 구현했는데, 특히 자유분방함이 돋보이는 행·초서는 ‘소암체’의 서예 미학을 잘 보여준다는 평가다. 서예사가인 이동국 예술의전당 수석큐레이터는 “소암체는 생활과 고전, 자연의 결정체로 3000년에 걸친 서예고전의 재해석으로 얻은 역사의 힘으로 작가의 현실 공간인 제주 바다와 산, 하늘을 녹여냈다”며 “소암 글씨는 인간 현중화이자 당대 현실”이라고 표현한 바있다.

소암 현중화의 ‘심여운수 心如雲水’(1960년대, 120×32㎝, 종이에 먹, 소암기념관 소장). 소암기념관 제공

소암 현중화의 ‘심여운수 心如雲水’(1960년대, 120×32㎝, 종이에 먹, 소암기념관 소장). 소암기념관 제공

전시장에는 ‘영봉(靈峰)’ ‘능운(凌雲)’ ‘심여운수(心如雲水)’ ‘동(冬)’ ‘정철 장진주사(將進酒辭)’ 등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유려하면서도 굳센 기운이 느껴지는 운필과 필획, 공간구성, 발문 등에서 소암의 삶과 성정, 철학을 오롯이 감지할 수 있다.

나란히 걸린 두 거장의 작품들은 글씨 같은 그림, 그림 같은 글씨다. 회화와 서예의 구분을 단박에 깬다. 서화동원의 의미를 드러내며 관람객의 감흥을 북돋워 신선한 예술적 경험을 안긴다. 사실 현대 미술가들, 특히 공간을 다루는 예술가들은 오래전부터 서예 미학에 주목해오고 있다.

실제 전시장에서 세계적 주목을 받는 설치미술가 최정화, 소설가 최영을 만났다. 이 시대 주요 생산물인 플라스틱 바구니·냄비같은 생활용품·폐자재를 독특한 현대미술로 승화시키는 미술가이자 예술감독으로 유명한 최정화 작가는 “역시 어떤 시대든 언제나 현대미술”이라며 “전시를 둘러보며 ‘새생’ ‘VITA NOVA’ ‘竝立(병립)’ 등 작업의 화두 같은 단어들을 생각했다”고 밝혔다.

국제적으로 주목받는 설치미술가 최정화 작가(오른쪽에서 두번째)와 소설가 최영(오른쪽에서 세번째)이 제주 소암기념관에서 고준휘 학예사(왼쪽)와 현영모 소암기념관 명예관장과 함께 전시를 관람하고 있다. 도재기 기자

국제적으로 주목받는 설치미술가 최정화 작가(오른쪽에서 두번째)와 소설가 최영(오른쪽에서 세번째)이 제주 소암기념관에서 고준휘 학예사(왼쪽)와 현영모 소암기념관 명예관장과 함께 전시를 관람하고 있다. 도재기 기자

그는 “결국 예술은 신생, 창생과 더불어 새롭게 태어나고 거듭나는 ‘새생’, VITA NOVA(라틴어 표현으로 ‘새로운 삶’)를 의미하는 것 아니겠느냐”며 “‘설립(입·立)’자 3개로 구성된 ‘병립’처럼 과거와 현재·미래가 나란히 함께 녹아들어 있어야 하는 것같다”라고 말했다.

“소암의 작품 ‘동(冬)’에서는 무한대(∞)·무한성·인피니티(infinity)란 단어가 떠올랐다. 화면을 유려하게 흐르는 획의 흐름 속에서 자연과 생명, 우주만물의 순환성을 느꼈다. 작품 ‘문어’는 요즘 말로 아주 ‘힙’한 측면이 있어 신선했다.” 최 작가는 “새삼 현대미술가들 모두 각자의 작품성이 지역적인지, 국내적인지, 국제적인지 한번쯤 살펴봐야한다는 생각도 했다”고 덧붙였다.

소설 ‘로메리고주식회사’로 잘 알려진 소설가 최영은 “이번 전시는 기계문명과 기후변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자연과 교합하는 정신세계, 새로운 해석이 필요한 통일의 의미를 시대적 징후로 제시하는 것같다”며 “우리가 교감해야 하는 자연은 평면에 박제된 자연이 아니라 기운이 생동하는 입체의 자연, 살아 숨쉬는 자연임을 거듭 생각했다”고 밝혔다.

그는 “소정과 소암은 작업에서 사람을 놓치지 않았고, 작품들에서 작은 인간을 봤다”며 “인간은 확실히 지금보다 작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소정 변관식의 ‘만행 萬行’(1960년대, 39.5×49.5㎝, 종이에 수묵담채, 인주문화재단 소장). 소암기념관 제공

소정 변관식의 ‘만행 萬行’(1960년대, 39.5×49.5㎝, 종이에 수묵담채, 인주문화재단 소장). 소암기념관 제공

전시 기획자인 현영모 소암기념관 명예관장과 고준휘 학예사는 “지방의 작은 미술관이, 그것도 한국화와 서예로 기획전을 연다는게 결코 쉽지 않았지만 드물고 특별한 자라를 만들고 싶었다”며 “다행히 각 분야 전문가, 예술 애호가들이 알음알음 많이 찾고 있어 보람이 크다”고 밝혔다. 전시는 19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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