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와 함께한 천년의 시간을 만나다…국보부터 현대미술품까지

도재기 선임기자

호림박물관, ‘여지동락’ 특별전

종이 주제로 국보·보물 8건

공예·현대미술까지 모두 150여점 선보여

호림박물관이 특별기획전 ‘여지동락’을 열고 있다. 사진은 고려시대 종이 기록문화재이자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 권75’(12세기, 왼쪽)와 종이 작업으로 유명한 권영우 작가의 ‘무제’(1984, 개인소장). 호림박물관 제공

호림박물관이 특별기획전 ‘여지동락’을 열고 있다. 사진은 고려시대 종이 기록문화재이자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 권75’(12세기, 왼쪽)와 종이 작업으로 유명한 권영우 작가의 ‘무제’(1984, 개인소장). 호림박물관 제공

인류가 종이를 사용한 것은 2000년이 조금 넘는다. 기록상으로는 중국 한나라의 채륜이 서기 100년쯤 종이를 발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고학적으로는 조잡하긴 하지만 그보다 수백년 앞서 사용된 종이들이 확인된다. 지난 2000여년 동안 종이는 지식과 정보의 기록 매체, 일상생활용 각종 공예품과 예술품의 재료 등 다양하게 활용됐다. 디지털시대에 사용량이 줄었지만 종이의 중요성은 여전하다.

종이를 주인공으로 삼아 문화재와 현대미술품을 한 공간에서 선보이는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성보문화재단 호림박물관이 신사분관(서울 도산대로)에 마련한 기획전 ‘여지동락(與紙同樂)’이다.

‘종이와 함께하는 즐거움’이란 뜻의 ‘여지동락’전에는 1000여년 전의 종이 기록물부터 조선 후기의 각종 종이 공예품, 종이를 재료로 한 현대미술 작품 등 모두 150여점이 나왔다. 국보 2점·보물 6점 등 국가지정문화재와 현대미술품을 한자리에서 비교·감상하는 것이다. 종이를 바탕으로 서로 다른 시대, 공간에서 기록되고 만들어진 전시품을 통해 종이의 역할과 가치, 종이와 함께한 역사도 새삼 되새기는 자리다.

전시는 3개의 소주제로 구성됐다. ‘종이, 기록을 담다’(제1전시실)에서는 통일신라~고려시대 사경 유물, 고려~조선시대 목판인쇄물, 여기에 종이 작업으로 유명한 전광영 작가의 평면·설치 작업이 관람객을 맞는다. 사경은 깊은 신앙심과 간절한 소망을 담아 불경을 종이에 손으로 옮겨 쓴 것으로 당대 사람들의 종교생활과 가치관·생활문화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사료다. 흰 한지(백지)에 먹으로 쓰거나(묵서), 한지에 쪽물을 들인 감지·도토리물을 들인 상지 등에 금·은 가루를 아교에 갠 금니·은니로 글자를 쓰기도 했다.

종이로 만든 다양한 공예품들 가운데 현대의 손전등 역할을 한 ‘조족등’(왼쪽)과 종이를 꼬아 실처럼 만든 후 엮어내는 지승기법으로 제작한 옷. 호림박물관 제공

종이로 만든 다양한 공예품들 가운데 현대의 손전등 역할을 한 ‘조족등’(왼쪽)과 종이를 꼬아 실처럼 만든 후 엮어내는 지승기법으로 제작한 옷. 호림박물관 제공

종이로 만든 공예품의 하나인 실 상자(19세기, 왼쪽, 개인소장)와 고려시대 사경 유물이자 보물로 지정돼 있는 ‘감지은니 대방광불화엄경 권34’(1377년)의 변상도 부분 세부 모습. 호림박물관·도재기 선임기자

종이로 만든 공예품의 하나인 실 상자(19세기, 왼쪽, 개인소장)와 고려시대 사경 유물이자 보물로 지정돼 있는 ‘감지은니 대방광불화엄경 권34’(1377년)의 변상도 부분 세부 모습. 호림박물관·도재기 선임기자

국보인 ‘백지묵서 묘법연화경 권제1~7’(고려·1377)과 같은 시기 제작된 ‘감지은니 대방광불화엄경 권34’(보물), ‘감지금니 대방광불화엄경행원품’(고려·1344, 보물) 등의 사경, 고려시대 첫 목판본 대장경의 하나인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 권75’(고려·12세기, 국보) 등이 나왔다. 이들 문화재와 함께 고서 이미지의 종이를 접어 화면을 가득 채우거나 설치작업화해 독특한 조형성을 드러내는 전광영 작가의 작품들이 자리를 같이해 종이를 매개로 시공을 초월한 색다른 만남을 연출한다.

‘종이, 정신을 밝히다’란 소주제 아래에서는 조선시대 금속활자 인쇄 기록물과 사대부들이 사용한 갖가지 종이 공예품들, 여기에 단색화로 유명한 박서보·한국 실험미술의 선구자인 최병소 작가의 작품을 선보인다. 종이로 만든 필통 등 문방구는 물론 여러 용도의 함과 상자, 손전등을 대신해 밤길을 밝혀준 조족등, 종이 안경집·장기판 등 흥미로운 공예품들을 만날 수 있다.

함께 감상할 최병소 작가 작품은 ‘무제 0160911’(2016)이다. 대표작인 신문지 작업 시리즈의 하나로 신문지에 검은 볼펜·연필로 수많은 선을 그어 내용이 보이지 않도록 새카맣게 만들었다. 제 역할을 못하는 언론에 대한 비판과 저항을 상징한다. 박서보 작가 작품은 ‘묘법(Ecriture)’ 연작의 하나로 한지 질감이 두드러지는 1997년 작이다.

마지막 전시공간은 실생활에서 활용된 다양한 기법의 종이 공예품들로 구성됐다. 조선 후기~근대에 이르기까지 종이로 만든 각종 병은 물론 요강, 양산, 바구니, 반짇고리, 옷도 있다. 종이 공예기법은 사용할 물건의 겉면을 종이로 여러 겹 붙여 장식하는 지장, 종이를 꼬아 질긴 끈으로 만든 뒤 엮는 지승, 종이를 물에 불려 풀과 섞어 내구성을 높인 지호 등이 있다. 특히 옛 공예품들에는 폐지가 된 종이를 버리지 않고 재활용한 것들이 많다.

호림박물관 로비에 있는 지니 서 작가의 작품 설치 전경(왼쪽)과 전시장 전경 일부. 호림박물관 제공

호림박물관 로비에 있는 지니 서 작가의 작품 설치 전경(왼쪽)과 전시장 전경 일부. 호림박물관 제공

호림박물관 특별전 전시장 일부 모습(왼쪽)과 출품작인 고려시대 사경 ‘백지묵서 묘법연화경 권제1~7’(1377년, 국보). 호림박물관·도재기 선임기자

호림박물관 특별전 전시장 일부 모습(왼쪽)과 출품작인 고려시대 사경 ‘백지묵서 묘법연화경 권제1~7’(1377년, 국보). 호림박물관·도재기 선임기자

현대미술품으로는 다양한 방식의 종이 활용과 고유한 표현을 통해 새로운 조형미를 드러낸 작가들의 작품이 함께 전시된다. 먹물을 입힌 화폭 위에 여러 종류의 종이를 붙이고 쌓아올린 이응노의 ‘구성(Composition)’(1964), 한지를 찢고 뚫거나 겹겹이 붙이는 작업을 한 권영우의 ‘무제’(1984), 종이 재료인 닥 반죽을 캔버스 위에 펼쳐 서서히 굳게 한 정창섭의 ‘묵고(Meditation)’(1993) 등이다.

호림박물관은 이번 전시를 계기로 1층 로비에 지니 서 작가의 설치작 ‘Her Side of Me/Crossing Thresholds’(2023)도 선보이고 있다. 한옥의 바닥재로 쓰였던 장판지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세밀한 잉크화를 그린 뒤 병풍처럼 세워 관람객이 둘러볼 수 있게 한 작품이다. 전시는 유료이며, 5월13일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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