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올 아카데미상 주목받는 ‘바벨’·‘리틀칠드런’

불확실과 혼돈의 시대, 누구 하나 악한 개인은 없고 의도된 가해도 없지만 불행은 꼬리를 문다. 2005년 런던 폭탄 테러 직후 경찰의 오인사살로 사망한 브라질 청년은 테러범이 아니라 불법체류자임이 발각될까봐 도망을 치다 변을 당했다. 방아쇠를 당긴 것은 강하고 힘 있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불안하거나 겁이 많은 쪽이다.

여수 출입국관리소 보호실에 돌발적으로 던져진 불씨는 필시 추방을 앞둔 이주노동자의 갈피 못잡은 손길에 의한 것이었을 테지만, 수많은 생명과 꿈을 앗아간 것은 불법체류자에 대한 오만 가득한 차별 구조였다. 담당 공무원 개개인으로선 주어진 상황에서 규정대로 처리했을 뿐 다른 도리는 없었을 터다. ‘모래와 안개의 집’(2003)에서 죄 없는 중동 소년을 죽게 한 보안관, 15일 개봉하는 ‘리틀 칠드런’에서 장난감총을 갖고 놀던 소년을 오해해 사살한 전직 경찰 입장도 애꿎기는 마찬가지다. 지난해 아카데미 작품·편집·각본상을 받은 ‘크래쉬’(2004)에서 차를 얻어탔다가 비명횡사한 청년의 이야기도 다르지 않다. 엉겁결에,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더 황망하고 억울하다.

몹시 사소한 일에서 끔찍한 일이 비롯된다는 설정의 이들 영화가 모두 아카데미에서 수상하거나 주요 부문 후보에 오른 작품이라는 점은 이 같은 불안과 혼돈상에 미국인들이 공감하고 있다는 방증일 것이다.

바벨

바벨

# 소통 가로막는 범지구적 장애

올해 골든글로브 작품상을 받고 오는 25일(현지시간) 있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유력한 작품상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영화 ‘바벨’은 이들과 같은 선상에 놓이면서 그 혼돈의 연결고리를 범지구적으로 확장한다. 비극은 모로코 양치기 소년이 들짐승으로부터 양을 지키기 위해 구한 총 한자루에서 시작된다. 인물들의 소통을 가로막는 것은 언어가 아니라 다른 문화·사회에 대한 편견이다. 문명이 발달해 지구 곳곳의 물리적 거리는 좁혀졌고 국경은 허물어진 지 오래지만 개인들은 서로의 처지와 입장을 알지 못한다. 출입국관리소의 화마 속에 세상을 뜬 외국인 노동자들을 괴롭힌 것 역시 언어장벽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 영화가 제목을 통해 명료하게 가리키듯 아직도 지구촌 사람들은 야훼의 노여움을 사 서로 말귀를 알아먹지 못해 허둥대는 바벨탑 공사장의 인부들이다.

바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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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아프리카 북부 모로코의 건조한 바람소리에서 출발한다. 양을 잡아먹는 자칼을 쫓기 위해 총을 든 양치기 소년이 총의 성능을 시험해본답시고 무심코 발사한 총알은 저 멀리 달리던 관광버스의 차창을 뚫고 미국인 관광객 수잔(케이트 블란챗)의 어깨를 파고든다. 남편 리처드(브래드 피트)는 버스를 돌려 낯선 모로코 마을에서 응급처치를 받아보려 하지만 여의치 않다. 미국 정부는 이 일을 이슬람권 국가에서 벌어진 자국민 대상 테러로 규정한다.

리처드의 미국 집에는 어린 딸과 아들이 멕시코인 보모 아멜리아의 보살핌 아래 재롱을 피우고 있는데, 아멜리아는 고향의 아들 결혼식에 참석해야 하지만 모로코의 사고 때문에 리처드네 가족이 아이들을 봐주러 오지 못하자 어쩔 수 없이 두 아이를 데리고 멕시코로 향한다. 아멜리아는 두 백인 아이를 자기 자식처럼 키워온 순박한 아줌마지만 미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음주운전과 불법체류 단속을 걱정한 조카 탓에 아이들을 차에 태운 채 경찰에 쫓기는 신세가 된다.

애초 모로코 소년이 사용한 총은 일본인 사업가(야쿠쇼 고지)가 사냥 관광을 왔다가 현지인 가이드에게 선물로 주고 간 것으로, 도쿄의 부유한 집에 살고 있는 사업가의 딸 치에코는 사춘기의 방황을 겪고 있지만 어머니의 자살과 청각장애라는 고통 속에 괴로워하고 있다.

# ‘개인’이 아니라 ‘구조’가 문제다

‘나는 A라고 말하는데 너는 B라고 알아듣는’ 선입견이 어떤 혼돈과 비극을 낳을 수 있는지를 담아내려 애쓰는 이 영화가 처절하게 포착하는 것은 소통의 벽이 만드는 고립감이다. 불결하고 미개한 것만 같은 모로코의 낯선 마을에서 수의사의 응급처치를 받게 된 수잔과 리처드를 남긴 채, 미국인 관광객들은 테러가 또 있지나 않을까 불안해하며 버스를 출발시킨다. 아멜리아는 차 한대 보이지 않는 사막 한가운데서 백인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지만 결국 불법체류자로 내몰린다. 현란한 유흥가의 음악을 듣지 못하는 치에코는 소외와 고립에 몸서리친다. 사람이 갖고 있는 보편적 인정은 종종 가로막힌다. 자신이 선물한 총이 테러에 연루됐다는 소식을 들은 일본인 사업가는 우정을 나눴던 현지인 가이드의 안부를 묻지만 일본 경찰이 할 수 있는 말은 “그거야 저도 모르죠”다. 아이들을 걱정하는 아멜리아에게 불법체류를 단속하는 미국 경찰이 내뱉는 말도 “그건 당신이 알 바 아니고”이다. 모로코 마을 사람들은 수잔을 살려주려 애쓰고, 멕시코 마을 사람들은 낯선 백인 아이들과 거리낌 없이 놀아주고, 일본 경찰은 치에코를 따뜻하게 감싸주려 하지만 구조가 만들어낸 벽을 넘기엔 역부족이다.

리틀칠드런

리틀칠드런

# 관용 없는 세상의 비극

‘크래쉬’가 미국의 거대 도시 로스앤젤레스에서 인종과 계층의 충돌을 바라보고, ‘바벨’이 지구 곳곳에 쌓아올려진 소통의 벽을 더듬었다면, 올 아카데미 여우주연·남우조연·각색상 후보에 오른 ‘리틀 칠드런’은 미국 중산층이 사는 작은 마을에서 인간이 겪는 비극의 씨앗을 찾아낸다.

아동 성추행범 주소 공개 조치로 이웃에 사는 마을 사람들은 “우리 아이가 괴물과 한 동네에 살고 있다”며 치를 떨지만 이들 부모는 모두 불륜을 꿈꾸거나 이상성욕을 감추고 사는 사람들이다. 내 아이를 병들게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영화는 아동에게만 성욕을 느끼는 정신적 장애를 악하게 그리지 않는 대신 평범한 일상을 위협하는 요소가 바로 우리 집 주변에 있다는 오늘날 미국인의 불안감, 내부에 있어 쉽게 자각하지 못하는 인물 자신의 장애를 눈으로 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극중 성추행 전과자가 수영장에 몸을 담그자 모든 부모들이 병이라도 옮는다는 듯 자기 아이를 풀장에서 꺼내고, 결국 쫓겨나게 된 전과자는 절규한다. “난 그냥 더워서 나온 거라고!” 사회적으로 거세당한 전과자가 스스로를 물리적으로 거세하는 종반부 장면에 이르면 죄와 벌에 대한 기존의 제도적 개념은 서글프게 모호해진다.

불법체류자를 잠재적 범죄자로 인식하고 불법체류자는 쉽게 범죄를 저지르게 되는 상황, 당국 직원들은 이들을 범죄자로 몰아세울 수밖에 없는 구조 속에서 여수 화재참사 같은 비극은 언제든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이 ‘모래와 안개의 집’ ‘크래쉬’ ‘바벨’ ‘리틀 칠드런’ 같은 영화들의 직접적인 지적이다. 멕시코 출신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의 3번째 장편 ‘바벨’은 22일 한국 개봉한다.

〈송형국기자 hank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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