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마출신 이주민 인권운동가 소모뚜

김석종 문화에디터

“이주자가 평화로워야 한국도 성숙… 상이 아닌 인권을 달라”

“너무 너무 창피합니다.” 버마 청년 소모뚜(35)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기자가 “버마 독재자 탄슈웨가 영국의 축구팀 맨체스터유나이티드를 인수하려고 했던데…”라고 말을 꺼냈던 것이다.

‘이주노동자의 방송’ 대표이자 이주 노동자밴드 ‘스톱 크랙다운’의 리더인 소모뚜는 “항상 나 자신을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 인권’이라고 말한다. | 김세구 선임기자 k39@kyunghyang.com

‘이주노동자의 방송’ 대표이자 이주 노동자밴드 ‘스톱 크랙다운’의 리더인 소모뚜는 “항상 나 자신을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 인권’이라고 말한다. | 김세구 선임기자 k39@kyunghyang.com

소모뚜는 40년 넘게 군사독재와 정치적 탄압이 이어지고 있는 ‘최악의 인권국가’ 버마에서 온 미등록 이주노동자다. 그런 그가 2010년 말 대한민국 정부기구인 국가인권위원회와 대표적인 민간 인권단체인 한국인권재단에서 동시에 인권상 수상자로 뽑혔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는 국가인권위원회가 주는 대한민국인권상 ‘인권표창장’은 거부해버렸다. 한국인권재단이 주는 ‘인권홀씨상’만 받겠다고 했다.

그는 지난 8일 약속시간보다 1시간 늦게 신문사에 나타났다. 그가 순박하게 웃으며 내민 명함에는 여러 개의 직함이 적혀 있다. ‘이주노동자의 방송’ 대표 겸 PD, 버마 민주화를 요구하는 ‘버마행동’ 한국 총무, 다국적 노동자밴드 ‘스톱 크랙다운’의 리더(보컬·작곡·기타리스트), 이주민 인권강사….

‘바쁘다’는 그의 말은 빈말이 아니다. 말하자면 그는 이주노동자들의 ‘스타’다. 부르는 곳이 너무 많다. 다문화 행사장, 축제현장, 시민단체의 공연행사, 다문화교육현장 등에서는 기타, 마이크, 카메라를 든 소모뚜를 쉽게 만날 수 있다. 이날도 그는 두 곳의 방송국과 인터뷰를 했고, 자신이 진행하는 방송프로그램을 녹화했다. 이주노동자의 방송 제작회의까지 참석하느라 서울과 인천을 두 번이나 오갔다. 올해 들어 처음 서울에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한국 사회와 이주자 사이의 벽을 없애 보자는 거죠. 피부색과 문화가 달라도 서로 이해하고 존중하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희망으로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습니다.”

그는 한국말을 아주 잘했다. 발음과 종결어미가 약간 부정확하긴 해도 말뜻을 조리 있게 전달할 줄 아는 데다 어휘력도 상당했다.

-‘인권홀씨상’ 수상을 축하한다. 상금은 어떻게 쓸 계획인가.

“이 상을 개인적으로 받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제 옆과 뒤에, 많은 동지들과 단체, 조직이 있다. 이번 수상을 계기로 더 많은 사람들이 외국인 노동자 인권운동에 관심을 갖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기쁜 마음으로 상금 전액을 소수자 인권운동에 쓰려고 한다.”

-인권위의 상까지 받았으면 더 많은 상금을 좋은 일에 쓸 수 있지 않나.

“상은 누가 주느냐에 따라서 가치가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인권위원장(현병철 위원장)이 주는 상은 인권상다운 인권상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에 아쉽지만 받지 않기로 했다.”

-그동안의 활동을 인권상으로 평가받은 소감이 어떤가.

“사람들은 가만히 있으면 난민 지위가 인정될 텐데 왜 한국정부 미움을 받느냐고 안타까워한다. 그러나 잘못된 것을 보고 외면할 수가 없었다. 지금도 여전히 단속 과정에서 이주노동자가 죽거나 다치고 있다. ‘노동권’이 보장되지 못하고 임금체불도 줄어들지 않았다. 정의를 위해 싸우는 일은 나를 위해 싸우는 일이다. 그것이 내 양심이고 사상이다. 그런 점을 인정받고, 평가받았다고 생각한다.”

소모뚜는 15년 전 관광비자로 한국에 왔다. 스무 살 때였다. 김포의 박스공장에서 8년 동안 일했다. 열심히 한국어를 익혔다. 5개월 만에 웬만큼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 그는 하루 15시간의 고된 노동을 묵묵히 견디며 주임까지 승진했다. 늦게 입사했지만 먼저 계장이 된 한국인이 ‘미안하다’고 사과할 정도로 숙련된 일꾼이었다.

-외국인 노동자로 어떤 고통을 받았나.

“나는 운이 좋았다. 한 번도 단속반에 붙잡힌 적이 없다. 심지어 단속반원들이 다른 친구들을 잡아가면서도 나는 그냥 지나쳤다. 내가 한국사람처럼 생겨서 그런가. 아니면 전생이 한국사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하하하.”

-그런데 왜 활동가로 나서게 됐나.

“우리가 한국사람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 아무도 하지 않는 밑바닥 일을 하고 있다. 1997년 외한위기 때는 우리도 월급을 반만 받아가며 일했다. 2002년 월드컵 때는 ‘대한민국~’을 목 터져라 외쳤다. 그런데 2003년 한국정부가 이주노동자를 강제추방하겠다고 발표했다. 불법체류자 단속이 시작되면서 목숨을 끊는 친구들이 있었다. 충격을 받았다. 내가 차별당하지 않고, 크게 다친 적 없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서울 태평로 성공회대성당 농성장으로 갔다.”

소모뚜는 당시 인천지역의 버마 동료들과 함께 최초의 ‘이주노동자 밴드’인 ‘유레카’를 결성해 음악활동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멤버 가운데 몇 명은 단속에 걸려 추방당했고, 몇 명은 직장으로 숨어버렸다. 그는 혼자 남았다. 쫓겨나더라도 싸우다가 쫓겨나자는 결심을 했다. 농성장에서 유레카의 게스트로 자주 노래를 불렀던 ‘미누형’을 다시 만났다. 지난해 10월 강제 추방당한 네팔인 이주노동자 미누, 바로 그 미노드 목탄이다.

농성이 1년 동안 이어지면서 자연스럽게 밴드를 만들었다. 멤버는 미누(보컬)와 소모뚜(기타), 소띠하(버마·베이스), 해리(인도네시아·키보드), 그리고 한국인 송명훈(드럼)이었다. 농성장에서 목 터져라 외쳤던 구호, ‘스톱 크랙다운(Stop Crackdown·단속을 멈춰라)’은 그대로 밴드 이름이 됐다. 그 후 미누와 해리는 강제출국됐다.

-언제부터 기타를 치고 음악을 했나.

“버마 젊은이들은 누구나 기타를 칠 줄 알고 노래를 잘 부른다. 한국에 와서도 휴일이면 버마 친구들과 기타를 치며 어울렸다. 어느해 부천외국인근로자센터에서 이주민을 위한 크리스마스 잔치를 열었다. 버마, 네팔, 인도네시아 친구들과 함께 노래를 해 인기를 끌었다. 센터 사무국장이 권해서 만든 밴드가 유레카다. 스톱 크랙다운은 지금까지 2집 앨범을 냈다. 1집 앨범의 ‘와’와 2집에 실린 ‘월급날’이 꽤 알려졌다. 음악은 사람들을 따뜻하게 위로해주는 힘이 있는 것 같다.”

-이주노동자의 방송은 어떻게 시작했고, 어떤 방송을 하고 있나.

“2003년 농성 당시 시민방송 RTV에서 ‘무한자유지대’라는 제목으로 이주민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찍었다. 그 후 시민방송에서 이주민들이 직접 이주노동자의 목소리를 내는 방송을 제안했다. 시민방송 사무실 안에 책상을 내줬다. 방송을 하면서 이주노동자들의 어려운 현실과 노동의 권리에 대해 눈을 뜨게 됐다. 지금까지 이주민과 관련된 다큐멘터리와 이주민 뉴스 등을 제작, 방송하고 있다.”

-어려운 점은 무엇인가.

“현 정부 들어 시민방송에 대한 정부 지원금이 끊겨 상황이 어렵다. 그래도 시민방송이 제작비 일부를 지원해준다. 사무실은 후암동 수유너머 연구소에 의지하고 있다. 이런 지원과 정기 후원자들의 후원금으로 운영하지만 항상 적자다. 언제까지 방송을 계속할 수 있을지 걱정스럽다.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린다.”

-미등록 이주자인데 어떻게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나.

“버마 민주화운동으로 조국에 돌아갈 수 없기 때문에 한국정부에 난민 신청을 했다. 아직 난민 신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현재 ‘인도적 지위 체류허가’ 비자를 받은 상태여서 당장 추방당할 염려는 없다. 지난달 3일에는 ‘난민인정 결정 불허결정처분 취소’ 청구소송 2심에서 승소했지만 쉽지는 않을 것 같다.”

-그 이유가 뭔가.

“보통 2심에서 승소하면 난민 지위가 인정된다. 그런데 법무부에서 대법원까지 가겠다고 한다. 3년 전 여수외국인보호소에 화재 사망사고 때 다른 인권단체들과 함께 성명서를 냈다. 법무부 인권 담당자와 난민실 관계자가 ‘버마 민주화운동에 전념하지 않고 한국정부를 반대하고 한국 사회를 흔드는 활동을 하기 때문에 난민 신청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다른 이주민이 인권침해당하는 것을 보면서 침묵할 수는 없다. 난민 자격보다 인권이 먼저다. 앞으로도 일이 생기면 항상 앞장설 거다.”

그는 “얼굴에 오물이 묻어 있다고 알려주는 사람에게, 그것을 닦지는 않고 말해준 사람을 미워하고 핍박하는 격”이라고 비유했다.

-버마 민주화를 요구하는 ‘버마행동’은 어떤 활동을 하고 있나.

“버마 민주화를 지지하는 한국의 단체들과 함께 ‘프리버마’ 캠페인을 펼치고 있다. 매월 마지막주 화요일 한남동 버마대사관 앞에서 집회와 기자회견을 한다. 버마 국내외에서 활동하는 단체들과도 연결돼 있다. 2007년 샤프론 민주항쟁 때는 한국의 도움으로 우리가 재정적 지원을 많이 했다. 우리는 한국의 민주화 역사를 존경하고,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배우고 있다.”

소모뚜는 15년 동안 한 번도 한국을 떠나지 않았다. 한국에서 돈을 버는 대로 모두 부모님께 송금을 했다. 독실한 불교 신자인 어머니는 아들의 송금 덕분에 양곤 시내 셰다곤 사원 근처에 살고 싶은 평생 소원을 이뤘다. 두 여동생도 모두 대학을 마쳤다. 지금은 영국과 말레이시아에 살고 있다.

-가족들을 한 번도 못 만났나.

“항상 부모님이 보고 싶다. 마음이 약해질까봐 사진도 잘 보지 않는다. 영국에 사는 동생이 지난 4월 한국에 다녀갔다. 동생을 경복궁에 데려가 한복을 입고 함께 사진을 찍었다. 동생은 시민권까지 받았고, 영국 생활이 행복하다고 했다. 나는 너무 창피하고 부러웠다. 그날 나는 한국에서 소수자가 행복하게 사는 날을 만드는 데 앞장설 것이라고 동생에게 약속했다.”

-네팔로 떠난 미누와 연락은 하고 지내나.

“페이스북, 전화, 인터넷으로 소식을 주고받는다. 비록 멀리 떨어져 있어도 마음만은 하나다. 미누형은 네팔에서 외국인으로 살고 있다고 농담을 한다. 한국에서 18년을 살았기 때문에 오히려 네팔 생활이 낯설다는 뜻이다. 그만큼 한국을 그리워한다. 요즘은 네팔코리아닷컴이라는 사이트를 만들어서 한국과 네팔 사이에 정보를 제공하는 일을 시작했다. 잘됐으면 좋겠다.”

소모뚜는 농성 후 서울 가리봉동 소화기 부품 공장에서 6년을 일했다. 지난해 미누가 추방될 때 해고됐다. 지금은 이주노동자의 방송 상근자로 월급 90만원을 받는다. 집은 가리봉동의 보증금 50만원에 월세 11만원짜리 ‘쪽방’이다. 다행히 강연이나 공연으로 조금씩 돈을 받기 때문에 버마에 계속 송금도 하고 있다.

“술, 담배를 전혀 하지 않기 때문에 돈 쓸 일이 거의 없다. 그래도 노래방에 가면 진짜 잘 논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라는 노래를 즐겨 부른다. 가사가 너무 좋으니까. 나는 가진 것에 만족하는 사람이 부자라고 생각하며 산다.”

-한국 생활이 행복한가, 불행한가.

“나보다 더 힘든 사람들이 조금 더 편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을 하는 것이 기쁘다. 부당하게 월급을 못 받는 친구, 사업장에서 폭행당하는 친구들이 도움을 요청하고, 그런 문제를 해결했을 때 행복하다. 강연이나 노래를 듣고 한국분들까지 호응해줄 때 눈물이 날 만큼 행복하다. 지금의 활동을 하지 않았으면 행복하지 못했을 거다.”

-당신이 생각하는 인권은 무엇인가.

“내가 좋아하는 것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아야 한다는 것, 내가 싫어하는 것은 남도 싫어한다는 것, 나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다른 사람도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것,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인권이다. 항상 나 자신을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문화’가 중요한 키워드가 되고 있는 한국 사회에 하고 싶은 말은?

“동남아 이주여성들이 한국 농촌의 고령화와 저출산 문제를 해결해주고 있는 것 아닌가. 그들은 단순히 출산하기 위해 한국에 온 사람들이 아니다. 서구인은 동경하고, 동남아인은 무시하거나 범죄자 취급하면서 무슨 다문화사회인가. 관청이 주도하는 축제나 행사도 필요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다양한 사람이 함께 어울려 서로의 꿈을 감싸줄 때 다문화사회라고 할 수 있다. 이주자의 삶이 평화로워야 한국 사회도 성숙해질 거라고 믿는다.”

-언제 버마로 돌아갈 것인가.

“버마가 변했을 때. 나는 한 번도 내 조국을 잊은 적이 없다. 내가 한국에서 배운 것들을 조국에서 실천하고 싶다. 버마 반정부 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 돌아가면 체포되어 감옥에 가게 될 것이다. 민주화가 되지 않으면 못 돌아간다.”

-당신이 꼭 이루고 싶은 꿈은 무엇인가.

“건강한 몸과 건강한 정신으로 활동을 계속하고 싶다. 내 활동이 헛된 것이 아니기를 간절히 원한다. 그러면 어떤 시련에도 실망하거나 지치지 않을 것 같다. 그것이 가장 큰 희망이다. 버마 민주화가 이루어지면 돌아가서 복지와 관련된 분야에서 활동하고 싶다.”

“밍글라바!” 그가 ‘축복받으세요’라는 뜻의 버마어 인사말을 남기고 함박눈을 맞으며 돌아갔다.

(소모뚜는 인터뷰 이틀 뒤인 10일, 국가인권위원회 인권상 시상식장에서 당당하게 인권표창장 ‘수상거부 소감’을 밝히고 있었다. “우리들이 원한 것은 상이 아니라 인권입니다”라고.)

▲ 소모뚜는 누구
버마의 엘리트 학생… 다문화 인권 활동가로 변신


소모뚜는 버마 수도 양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국영제지회사 공무원, 어머니는 학원의 교사였다. 독실한 불교 집안이었다. 소모뚜는 7세 때부터 해마다 3개월씩 일곱 차례나 삭발하고 출가했다. 그는 “출가해서 불교 경전 공부를 했는데, 인간답게 사는 길과 선행의 가르침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며 “한국에 오지 않았으면 스님이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1988년 8월8일 전국적으로 민주화 시위가 일어났다. 13세이던 그도 부모님을 따라 머리띠를 두르고 거리로 나갔다. 군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선거를 치렀다. 선거에서 아웅산 수치 여사가 이겼지만 정권은 이양되지 않았다. 시위에 참가한 시민·학생들은 검거되고 학살됐다. 그의 아버지는 해직됐고, 가족은 삼엄한 감시를 당했다.

그는 공과대학에 입학했다. 버마는 성적 순으로 의대, 공대생을 선발한다. 그는 “내가 그만큼 공부를 잘했다”며 웃었다. 그러나 집안형편이 갈수록 어려워졌다. 밥값도 못하면서 학교에 다니는 것이 부끄러웠다고 한다. 그는 “부모님과 두 여동생을 위해 이번 생은 없는 것으로 하겠다고 결심하고 학교를 그만뒀다”고 말했다.

당시 그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스님이 있었다. 1995년 3월 세미나 참석차 한국에 오게 된 스님을 따라왔다. 그도 한국에 대한 동경과 호감을 갖고 있었다. 먼저 와서 자리를 잡은 버마 사람들의 도움으로 불법체류자 생활을 시작했다.

2003년 정부의 이주노동자 강제추방에 맞서 농성을 벌인 이후 ‘활동가’가 됐다. 지금은 이주노동자와 다문화 인권 강사로 각종 집회, 행사의 강단에 서고 있다. 경인방송에서 매주 금요일 방송되는 <다문화 톡톡>을 진행한다. EBS 라디오에서는 버마 음악을 소개하고 있다. 위클리수유너머에 칼럼 ‘밍글라바코리아’를 연재한다. 매주 월요일에는 성공회대 민주사회교육원이 운영하는 노동대학에서 강의를 듣는 학생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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