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전 두 미군대령이 한반도 허리를 잘랐지, 해방이 분단이 된 거네

소설가·평론가 김형수=“돌아오네, 돌아오네…” 하는 유행가 ‘귀국선’은 해방을 귀환의 때로 상정합니다. 일제강점기 마지막 10년간 몰아친 징집, 징병, 징용의 역사가 그렇게 근거지 회복으로 종결됐어야 했는데, 들뜨게 했을 뿐 그렇지 못했어요. 36년 동안 빠져나간 독립운동가들은 또 어떻습니까?

고은=역사란 충족이 아니라 미달의 역사인지 몰라. 한반도 현대사의 풍경은 더욱 부실의 풍경이었어. 어쨌거나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노래로 시작하지. 노래야말로 역사의 첫사랑이고 시대의 첫 제전인가 보네. “어둡고 괴로워라 밤이 깊더니/ 삼천리 이 강산에 먼동이 튼다/ 동포여 자리 차고 일어나거라/ 산 넘고 바다 건너 태평양까지/ 아아 해방의 해방의 종이 울린다.” 새 노래들이 해방의 환희를 너나없이 뿜어냈어. 식민지 시대의 자위(自慰)였던 가요 ‘나그네 설움’ ‘타향살이’ 등과 가곡 ‘봉선화’ 등은 한동안 이런 새 노래 뒤쪽으로 물러섰지. 그것은 또한 일제 내내 강제로 구가된 ‘애국행진곡’ 따위에 대한 보복인 것처럼 전국적인 열창으로 되지 않을 수 없었지.

김형수=‘해방가’는 1980년대에도 민중가요로 불렸습니다. 어쩌면 8·15가 미완의 사태임을 역설하는 현상인지 몰라요. 선생님! 일본이 물러간 후 천황을 대체할 새 표상이 출현했습니까? 삼천리강산 같은 것이었을까요?

[고은과의 대화]해방 전 두 미군대령이 한반도 허리를 잘랐지, 해방이 분단이 된 거네

고은=삼천리강산, 삼천리금수강산이라는 조국의 공간 수사(修辭)는 새로운 것이 되자자마자 100년간이나 상투화된 듯한 낯익은 구어가 되었어. 사실인즉 단재사관쯤으로 말하자면 옛 고조선이나 광개토대왕의 영토로 기억해 만 리이고 만리강산이어야 했어.

김형수=삼천리강산이 주는 공간감이 좀 아기자기한 것은 사실입니다. 광야가 증발되고 없으니까요. 몽골반점의 소유자들이 신성시하는 숫자가 3이라 그런 수사가 나오나 생각했어요.

고은=고려 후기 강화도 천도 시절 인구 300만이던 것이 조선 말에는 2000만 미만에 이르렀어. 굶어죽고 병들어 죽고 외적의 칼에 죽어가며 한반도 역내의 종족을 필사적으로 불려온 바 1940년대 후반 전체 인구는 삼천만 동포라는 이름의 모진 번식력을 과시했어. 그것은 일제시대 구호였던 ‘일억황민’이라는 조선·대만·일본 본토 인구를 망라한 억지 과장을 뭉개버린 것이지.

김형수=그것도 삼천리라는 공간 언어가 삼천만이라는 주체 언어로 전이된 줄 알았는데….

고은=그래서 삼천만 동포라고 말하면 그것처럼 모계사회적인 동기감(同氣感)을 자아내는 것이 없을 지경이었지. 바야흐로 한말의 위기위식이 낳은 민족의식 및 역사의식으로서의 ‘민족’ 개념이나 식민지 저항논리로서의 민족주의 투혼들이 마치 휴화산이 활화산으로 바뀐 듯이 화염을 내지르며 사람들의 손쉬운 단어로 일상화되었어.

김형수=‘민족’ 개념도 요새는 꽤 심한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고은=민족이 근대 제국주의의 기반이 되었던 욕망의 개념으로 만들어진 사실과는 다른 현실에서 민족이야말로 잃어버린 자아를 되찾아 나설 때 가장 열렬한 정치적 중심개념이었어. 이 골수에 맺힌 논리를 서구의 지성은 몰라.

김형수=김구 선생이 “나라는 망했어도 민족은 망하지 아니하였다”고 할 때 저는 민중에게는 국경으로서의 대지가 아니라 삶의 터전으로서의 대지가 있다던 문익환 목사의 사관(史觀)을 느낍니다. 다시 말해 민족이란 생태공동체, 문화공동체, 언어공동체를 공유하는 사람들이라 생각되는 겁니다.

고은=당연히 ‘민족’은 ‘국가’나 ‘민족국가’라는 것과 유리된 단일의 추상어가 아니라 반드시 국가라는 규범집단의 구체적인 의미와 직결되겠지. 그것이 해방전후사에서 해방이 독립과 동의어이고 ‘광복’이라는 전통과 ‘해방’이라는 근대의 일치와도 이어지지. 끝내 그것은 인권 내지 민권과 국권의 체험적인 합일을 이끌어내는 총화의 당위이기도 했어.

김형수=그렇다면 식민지의 민족주의란 생태·문화공동체와 정치·경제공동체가 합치되기를 바라는 정신이 아닐까 싶습니다. ‘국민’이 ‘국가’와 ‘민족’을 한 자씩 따온 느낌이듯이요.

고은=그런데 국민은 민족 이후이고 민족은 국민 이전이기도 하지. 옛날 누군가 “왜 스위스는 3개국어와 2개 종교, 4개 민족을 내포하는데도 한 국가를 이루고 토스카나는 같은 주민이 사는데도 하나의 국가를 이루지 못하는가” 하고 질문을 던진 적이 있어. 르낭이지. 19세기 말 조선인으로는 처음으로 파리에 체류했던 김옥균, 암살의 자객이었던 홍종우가 자주 만났던 ‘인간화의 예수’를 그린 프랑스 지식인이었지. 홍종우는 보들레르와도 조금 사귀었다더군.

김형수=그래서 민족을 ‘상상의 공동체’라고 말하는지 모르겠어요. 허구 같지만 ‘언제나 심오한 수평적 동료의식이 유지되는 공동의 기억집단’ 같은 개념으로서요. 선생님의 시 ‘눈보라’도 그것을 노래하지 않습니까?

고은=민족이란 혈통과 그 민족이 사는 토지를 기본으로 삼겠지만 그 이상으로 언어와 종교 전통 따위가 민족 구성의 중요한 요소이지. 책상 위에서 ‘민족’과 ‘국가’는 엄연히 별개의 개념이겠지만 최소한 한반도에서는 민족의 구성 요건이 다 갖추어진 천부적인 민족이고 그 민족의 의미가 아무런 무리 없이 국가의 본원적 의미에 직결되는 것 아닌가. 내가 자주 문화복합론이나 문화의 혼혈을 말했지만 한민족 자체도 우리가 기초교육으로 강조해온 오랜 단일민족이라는 것은 민족의 단합 차원 밖에서는 부정확하기 짝이 없어. 한족이나 글안, 여진, 몽골, 만주, 퉁구스, 심지어 일본의 역류된 피가 스며온 자취를 부인할 수 없는 것 아닌가.

김형수=‘일민족’이란 조선이 그래도 종족상, 인종상, 언어상 차이가 거의 없는 공동체를 가졌음을 강조하는 말인데요.

고은=히틀러의 아리안 절대주의도 ‘원(原) 게르만’의 씨에 대한 누대 혼혈을 잠시 숨긴 것이지. 우리 민족의 부분적·시대적 혼혈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치적 도그마나 배타주의 권력의지에 의해서 만들어낸 민족이 아니지. 밖으로부터의 시련과 안에서의 뚜렷한 문화적 자아형성이나 심화된 전통의식들이 하나의 ‘민족’을 창조적으로 재생시킨 것 아닌가. 그런데 이런 민족의 의미망도 그것을 자기 진영화로 사용할 때는 그 개량성이나 반동성, 그리고 그 장식성이 지적되지 않을 수 없어. 여기에다 일제강점기 식민지 기득권을 누려온 저 조선 후기 노론의 잔재 역시 민족의 의미를 그 역동의 의미가 아니게 만들었어. 그래서 식민지 시대의 약소민족 실체인 피착취, 피압박 기층민중의 간극이 있지 않은가. 실로 오랜만에 말해지는 민족 단일정서의 진원인 ‘삼천만 동포’나 ‘배달겨레’라는 육친정서가 해방시기 하루하루의 불안 속에서 묽어져 갔지.

김형수=양반들, 친일 부역자들, 부패한 위정자들이 준동해 한반도를 친(親)민족세력과 반(反)민족세력으로 균열시킨 상황을 말씀하는 겁니까?

고은=정치는 동정(童貞)을 파괴시키지. 해방의 감격은 1년 정도의 유효기간을 더 연장시킬 힘을 잃고 말았어. 관념이 풍속 안에 잠겨버리고 의미가 현실의 화학으로 빠르게 변질하는 시대에는 인간정신의 일정한 성찰이 불가능하게 되지.

김형수=해방의 물결이 빠른 속도로 오염된 거죠? 자주적 민주정부의 수립이 절실했는데.

고은=일제 말의 국내 지하조직인 여운형 주도의 건국동맹을 기초로 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조직이 전국적으로 확대됨으로써 그 산하의 전문대생이 주축이 된 건국 치안대와 ‘학도대’가 완장을 차고 일제의 통제력이 정지된 사회공백에 최소한의 질서를 대행했어. 미군 진주 이전에 이미 이 같은 정치기반이 형성된 것인데, 우리 마을에도 건준 말단조직이 만들어지고 그 조직에 학도대 2~3명이 수시로 파견되어 해방시기의 첫 자치 가능성을 열고 있었지.

김형수=어쨌든 당장에는 시골 장터에서 약장수 굿이 지나간 마당을 빗자루로 쓸어낸 듯 시원했을 것 같습니다.

고은=그러나 해방이라고 해서 흐린 날과 갠 날이 분명한 것처럼 일제가 8월15일 그 다음날에 사라져버린 것은 아니었어. 우선 내 국민학교 3년 담임인 여선생 모리 히데코나 교장 아베 쓰토무 일가족의 일본 귀환 절차는 조선 전역의 일본인 90여만명의 송환이라는 커다란 사건의 개체 단위였지. 소위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이름 아래 일본 본토인은 조선, 대만, 만주, 중국 각지 그리고 동남아 일대까지 망라할 때 650만명이나 정주생활을 하고 있었어. 조선반도 90만명 중에 북위 38도선 이북에 33만명, 이남에 60만명인데 이들의 철수 문제가 하루 이틀에 해결될 수 없었지. 해방 다음해인 1946년에는 콜레라(호열자)라는 무서운 전염병이 한반도를 휩쓸어서 부산항이 폐쇄되자 거기 모여든 일본인 약 2000명은 현해탄을 건너기는커녕 군산항으로 후퇴 송환되어 수용되었어. 군산 일대의 일본인 집결로 한동안 군산항은 쌀의 항구가 아니라 ‘쪽바리 항구’로 소란했지.

김형수=군산항은 꽃이 피고 새가 울 틈이 없네요. 사람들은 그 정치적 카오스의 상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을까요?

고은=해방이라고는 하나 조선총독부나 조선주둔의 일본군은 곧 진주할 미국에게 모든 체제기구를 인계할 때까지 조선에 대한 강제를 일삼고 있었어. 심지어 조선총독부와 조선군사령부는 오키나와의 맥아더 연합사령부 산하 24군단의 하지한테 가서 조선은 공산당이 들끓으니 일본인 지배의 바탕에 미군이 주둔하라고 제안했어.

김형수=<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에 의하면 미국인들은 자국이 1945년에서 1948년 사이에 한국을 점령해서 군사정부를 운영한 사실을 몰랐다고 합니다.

고은=과연 미군은 맥아더의 일반명령 제1호라는 결코 해방군이 아닌 적지 점령군의 전시 군정체제로 한반도에 군림하게 되었어. 막말로 하면 일제 대신 미군이었지. 한반도의 미군정은 맥아더의 태평양 미군 판도 가운데서 오키나와 상륙작전 후반에 투입된 부대가 일본의 항복 이후 조선반도 상황을 대강 탐색한 뒤 온 것이지. 그것은 오키나와 작전 다음 조선반도 작전의 미군 전략을 그대로 진행한 셈이기도 하네. 그네들은 한반도를 일제하 식민지이고 일본 본토에 대한 제2의 적지라는 작전의 대상으로만 판단했어. 한국이 무엇인지 한국인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점령군으로 서울의 늦가을에 나타나 현대 세계사 얄타 체제의 한국 무대를 주도한 것이지.

김형수=화나는 게 바로 그런 사태입니다. 교활한 ‘내선일체’로 조선인들은 만주에서도 경찰로 이용되어 잔인하고 부패한 제국주의 하수인으로 악명을 떨쳐 해방이 되자 곧 중국 민중의 공격을 받습니다. 가장 큰 피해자가 가장 큰 가해자로 둔갑되는 겁니다. 그리고는 쫓겨 와 다시 미국이라는 해방군에게 점령당하는 거죠.

고은=이제 해방은 입으로 말하는 단어일 뿐 그것은 두 개의 영토로 된 분단을 의미하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냉전 최전방을 의미했어. ‘해방’ ‘자유’ ‘독립’ 또 ‘자주독립’이라는 말과 함께 한반도의 현실은 ‘38선’이라는 미·소 동시주둔의 분단 기호로 채워졌지. ‘38선’이야말로 감탄사 없이는 말할 수 없고 감탄부 없이 쓸 수 없는 현대 한반도의 비운을 표현하고 있어. ‘해방’이 한반도의 천상이라면 ‘38선’은 한반도의 발바닥이 내디딘 지상이었어. 끝내 해방이 분단이고 그 분단은 끝내 해방을 날것으로 삼켜버리는 공룡이고 말았어.

김형수=역시 브루스 커밍스의 말입니다. “한국의 분단에는 어떤 역사적 정당성도 없었다. 만약 어떤 동아시아 나라를 분단했어야 한다면 그것은 일본이었다.” 너무나 안타까워요.

고은=그동안 한반도는 오랜 역사 속에서 몇 번의 분단을 선험하거나 체험한 사실도 확인할 필요가 있어. 한반도의 정치지리는 언제나 타자들의 각축이 타협을 서두를 때나 힘의 완충으로 불안한 평상을 유지시킬 때마다 배분의 공간으로 될 함정이기도 했어.

김형수=삼국시대를 염두에 둔 말씀입니까?

고은=고대사 세 개의 전시체제가 자주 각축하던 지역이 37도선과 39도선 사이였어.

김형수=국토의 복판이라 해서 중앙탑이 들어선 남한강 일대에는 고구려, 신라, 백제 중 어디가 세웠는지 모를 성터가 여럿이던데….

고은=때로는 그 일대가 움직이는 국경이 되기도 하고 타자와 외세가 이익의 균형을 위해서 조정되는 타협분할의 현장이 되기 십상이었지. 38선 시나리오도 그런 사례였는지 몰라. 그래서 1945년 여름, 소련군이 한반도 북부에 발을 내디디는 상황에서 미국은 한반도에서 600마일이나 떨어진 오키나와에서 한반도와 만주 일대의 일본군 항복절차를 끝내는 데 초조한 나머지 한반도 허리를 자르는 북위 38도선 확정을 단숨에 제안한 것이지. 소련이 들어줄지가 걱정이어서 만약 38도선이 아니라 그보다 더 남쪽인 36도선이나 37도선을 주장한다 해도 들어줄 처지였는데 스탈린은 그 정도로 만족했어. 미국 쪽은 전략적으로 서울이라는 한반도 수도를 확보할 수 있고 부산과 인천 등 항구를 확보할 수 있는 것으로 조선반도의 일본군 해체 송환과 조선총독부 항복 처리에 안도했어. 미국이나 소련 양국은 한반도 주둔의 목적을 일단 영구주둔이 아니라 다만 이 지역에서의 일본 처리에 두었던 것이지.

김형수=1943년 카이로에서 루스벨트가 한국의 독립은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절차를 밟아 이루어진다고 말할 때 알아봤어야 했어요.

고은=38선이야말로 8월15일을 앞두고 5일 전에야 미국에서 구상된 것이네. 미·소 양국의 제안과 수락에 의한 합의 내용이 ‘맥아더 일반명령 제1호’로 공포된 것이 9월2일이더군. 그날 서울 상공에서 미군 비행기가 미 제24군단 사령관 하지 중장 명의의 포고문 삐라를 뿌렸지. 이에 앞서 8월10일 미군 육군 차관보 사무실에서는 일본 항복에 대비한 국무성과 육해군 조정위의 적군 무장해제와 점령 등의 대책을 위한 철야회의에서 두 대령 딘 러스크와 찰스 본스틸이 극동지도를 놓고 한반도 허리를 잘랐지. 그 북위 38도선에 미·소 각군 주둔으로 일본군을 정리하기로 한 입안이 그대로 긴급절차를 밟았고 그 구상이 마닐라의 맥아더에서 모스크바의 스탈린에게 왔다 갔다 하며 확정됐어. 러스크는 뒷날 케네디, 존슨 정권의 국무장관이 되고 본스틸은 주한 UN군 사령관이 되었지.

김형수=그 장면을 <문익환 평전>에 쓰면서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습니다. 한 민족의 절박한 운명을 다른 나라의 대령 둘이서 장차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모르고 처리하는 모습이라니!

고은=바로 이 임시적인 군사행위로서의 38선이 그 뒤 20세기 후반 세계 냉전체제 첨단지역의 대결장이 되고 이윽고 두 개의 단정(單政)의 분단체제가 시작되는 원인으로 굳어졌어. 그러니까 해방은 그 해방의 날 5일 전에 이미 분단의 날로 만들어졌단 말이네. 그것이 8·15로부터 20일도 채 안되는 9월2일 미주리함 선상에서 일본항복 당일 맥아더의 이름으로 공식화되었어. 그로부터 한반도는 해방의 노래가 아닌 ‘가거라 삼팔선아’를 부르는 분단의 공간이 되고 말았지. 그토록 심장의 고동소리가 쿵쿵거리던 ‘해방’의 감탄사로서의 단어는 ‘분단!’이라는 비탄 감탄부를 찍어야 하는 단어로 교체되었어. 어디 그뿐인가. 한반도에서 일본은 끝난 것이 아니라 나무의 마디처럼 이어지고 있었어.

김형수=슬픈 일입니다. 그 시절 현인이 불러 유행시킨 ‘럭키 서울’의 신명은 얼마나 무분별한 열정이었는지, ‘귀국선’의 희망이 꺼져가던 그 짧은 순간에 한반도는 세계 냉전의 대리체제를 잉태하느라 어쩜 그리 고생했는지….

눈보라

캄캄한 현기증 눈보라 속이었다

너 어디에 쓰러졌느냐

어디에 묻혀

온통 귀머거리

아무리 불러도 네가 없구나


고립무원의 벌판


차라리 너 눈구덩이 파고들어

땅속 파고들어

숨막혀

거기 무덤 속

고구려 벽화


네 죽은 손가락 살려내여

불 밝혀

달리는 말 탄 시절로 돌아가거라


시간이 소생이다

열두 살의 고주몽이

세운 나라

눈보라 속으로 하얗게 넓혀간 나라

활에서 화살 떠나

핑!

그토록 찬란하게 날아가거라

(하략)
눈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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