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송전탑 위의 칠수와 만수

홍명교 | 한예종 영상원생

“높은 놈, 배운 놈, 잘난 놈, 있는 놈! 모두 다 내 얘기를 들어봐라. 나도 말 좀 해야겠다. 이 높은 데 있을 때 큰소리 좀 쳐보자!” 1980년대 최고의 영화 <칠수와 만수>에서 빌딩 옥상에 오른 만수(안성기)가 이렇게 외친다. 구경하는 시민들, 공권력, 기자들은 이를 노동자들의 농성 투쟁으로 오인하고, 여기서 비롯된 일대 촌극에 동참한다. 그리고 칠수와 만수는 결국 자신들이 살고 있는 시대의 비극성을 확인한다. 빌딩 아래서는 누구도 칠수와 만수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 그것은 공허한 메아리로 자동차 소음 가득한 도시의 하늘로 사라질 뿐이다. 만수는 뛰어내리고 칠수는 체포됨으로써 그들의 의도치 않은 고공농성은 이렇게 끝난다.

외환위기의 거센 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하던 1997년 가을 중학교 때다. 학교가 파하고 집에 돌아가던 어느 날 평생 잊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했다. 경사가 가파른 언덕을 올라 집 앞에 다다랐을 때, 두 눈 앞에 펼쳐진 믿기 어려운 장면. 3층 빌라 두 동을 짓는 건설현장에 쌓여 있는 속칭 아시바 맨 꼭대기, 땅에서 15m가량 떨어진 높이의 철 구조물 위에 한 남자가 올라 있었다. 그는 몸을 지탱할 꼬챙이나 로프도 하나 없이 단지 두 손으로 아시바 끄트머리를 부여잡고 버티고 있었다. 그리고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당장 약속해라, 은행에서 돈을 출금해서 당장 갖고 오란 말이야!”

[2030 콘서트]2012년, 송전탑 위의 칠수와 만수

듣고 보니 그는 지난 넉 달째 임금 체불에 시달리고 있는 일용직 건설노동자였다. 3층짜리 빌라 건물 공사의 거의 막바지 상황이었다. 그런데 건축업자가 끝까지 임금을 주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외침 속에 섞인 절박함을 잊을 수 없다. 그것은 벼랑 끝에 선 절망이었고,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무관심한 세상에 대한 울분이었다. 이 소란에 모여든 주민들은 넋 놓고 아슬아슬하게 선 노동자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것은 그 동네에서 가장 격렬했던 ‘계급투쟁’의 시간이었다.

그 때문일까? 높은 탑 위에 오른 사람, 크레인에서 소리치는 사람이 더 많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이 사회가 해고되었거나 비정규직인 노동자에게 매우 잔인한 곳이라는 걸 알게 됐다. 21세기에 이곳처럼 고공농성이 많은 나라가 또 있을까? 조선소에서, 건설현장에서, 한강 다리 위에서, 높은 빌딩 위에서 벼랑 끝에 선 노동자들은 외치고 또 절규한다. 이렇게 높은 곳에 올라 ‘죽을 각오’를 하지 않으면 세상은 귀도 기울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노동자 최병승씨와 천의봉씨도 울산공장 송전탑 위에 올랐다. 최병승씨는 이미 대법원에서 현대차의 ‘불법파견’에 따라 정규직이 인정된다는 확정 판결을 받았으니 마땅히 다른 모든 비정규직 동료들과 함께 ‘정규직’이 되어 공장으로 돌아가 일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대차 자본과 정몽구 회장은 대법원 판결마저 깡그리 무시하며 ‘불법파견’을 자행하고 있다. 그가 그렇게 골리앗에 맞선 다윗의 싸움을 벌인 지 벌써 8년째다. 어느 새 사내하청 불법파견 문제는 전 사회적인 이슈로 등장했고 현대차 자본이 불법적으로 비정규직을 늘려왔다는 건 만인이 안다. 여러 언론에서 밝힌 바 있듯 현대차 자본의 이 ‘버티기 탄압’은 아무런 근거가 없다. 자본이 제 힘을 믿고 노동자들을 정규직과 비정규직, 1차 하청과 2차 하청으로 나누어 착취하고 있을 뿐이다.

정부는 정몽구 회장이 수천억원대 횡령을 했음에도 쉽게 풀어준 바 있다. 당장 구속 수사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경찰과 울산지법은 도리어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구심점인 박현제 현대차 비정규직지회장과 노조 간부들에게 구속영장을 발부하고 농성하고 있는 천의봉씨에게는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공권력마저 제 본분을 잃고 빼앗기고 착취당하는 노동자를 탄압하고 있으니 1500만 노동자들은 어떻게 자신의 잃어버린 삶을 찾아야 하는 걸까? 오는 17일은 울산에서 ‘3차 포위의 날’이 열린다. 영화에서 칠수와 만수가 선 높은 빌딩 아래 구경꾼들이 “우리가 바로 저 페인트공이다”라는 마음이었다면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송전탑 위에 두 하청 노동자가 걸어놓은 저 작고 빛나는 희망에 내기를 걸어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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