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

더 많은 이들이 누구나 고른 삶을 누리는 사회 복원이, 21세기의 진정한 ‘발전’

홍기빈 |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소장

▲거대한 역설 | 필립 맥마이클 지음·조효제 옮김 |교양인 | 600쪽 | 2만3000원

오늘날 ‘개발’ 혹은 ‘발전’이라고 옮기는 development라는 말은 본래 ‘맹아의 상태로 응축되어 있는 것이 성장하면서 잠재된 모습과 능력을 펼쳐내는 것’이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이 말의 독일어 단어인 Entwicklung은 특히 관념론 철학의 전통과 맞물려서 ‘인간의 잠재된 능력을 총체적으로 펼쳐내는 것’이라는 함축을 강하게 담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말은 언제 어떤 맥락에서 처음으로 오늘날과 같은 경제 용어로 최초로 쓰이기 시작한 것일까. 의외로 최근인 1949년이다. 소련과의 냉전이 막 시작된 당시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이 미국의 발전된 과학과 기술을 통해 못사는 나라들이 ‘발전’과 ‘성장’을 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야 한다는 연설이 그 최초의 용례라고 한다.

오히려 본래의 어원이나 용법을 따지자면 우리가 쓰고 있는 ‘개발’ 그리고 ‘발전’의 의미를 담은 단어는 오늘날 ‘개선’이라고 옮겨지는 improvement가 가까웠을 것이다. 이 단어는 영국에서 영리적 목적의 농업이 본격적으로 발전한 17세기에 출현한 말이었다. 그 이전의 농업이 전통과 관습에 의해 조직되었던 데에 반해 이 당시에 출현한 농업 자본가들은 한조각의 땅 한 그루의 나무라도 철저하게 ‘이윤(prof-)’이 나오도록 ‘만드는 (en-)’ 방향으로 사용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렇게 한푼이라도 더 높은 이윤이 나오도록 토지와 그 사용법을 개혁하고 바꾸는 것이 바로 improvement였던 것이다.

[책과 삶]더 많은 이들이 누구나 고른 삶을 누리는 사회 복원이, 21세기의 진정한 ‘발전’

21세기에 들어선 오늘날 이 ‘발전’만큼 많은 논란과 근본적인 비판에 봉착한 개념도 흔치 않을 것이다. 본래 전혀 다른 의미를 담고 있었던 이 두 단어가 오늘날 이렇게 자리를 바꾸게 된 것을 음미해보면 21세기의 지구적 사회가 봉착해 있는 문제의 성격이 무엇인가 그리고 그로부터 탈출할 해법이 무엇인가에 대해 중요한 답을 얻을 수 있다. 서양 자본주의 국가들은 몇 백년간 비서구 지역의 인간과 자연을 자신들의 뒷마당과 거기에 풀어놓은 가축쯤으로 여겨왔다. 그러다가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공산주의의 도전과 탈식민주의 시대가 도래하는 상황이 되자 미국을 필두로 한 이 나라들은 갑자기 비서구 지역의 ‘발전’을 돕겠다고 나선다. 이러한 세계 강국의 지구 경략 프로젝트로 시작된 ‘발전’이 비서구 지역의 인간 사회 및 자연의 ‘잠재된 능력을 총체적으로 펼쳐내도록’ 돕는 고전적인 의미의 Entwicklung이 될 리는 없다. 되레 그 이전 제국주의 시절이나 별로 다를 바 없이 자신들의 이익과 이윤을 위해 그것들을 근본적으로 새롭게 배치하고 활용하는 improvement에 가까울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이러한 물질적인 ‘발전주의’ 시각을 미국 주도의 지구적 ‘발전’ 프로젝트를 비판하는 제3세계 지식인들조차도 공유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70년대까지 우리나라를 포함한 제3세계 지역을 풍미했던 종속이론이나 신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의 비판은 ‘발전’ 프로젝트가 ‘부등가 교환’을 통해 서구가 비서구 지역을 수탈하는 ‘신식민주의’에 불과하며 그 결과 비서구 지역은 진정한 ‘발전’이 좌절되는 ‘저발전’의 상태가 영구화되고 있다는 데에 초점을 두는 것이었다. 따라서 생산력을 발전시켜 제대로 된 물질적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급진적인 탈서구 프로젝트를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 해법으로 제시되었다. 과연 이러한 프로젝트가 ‘인간과 자연의 잠재된 가능성을 한껏 펼쳐내고 실현한다’는 의미의 발전이 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보다 근본적인 질문은 무시되거나 아예 떠오르지도 않는 경우가 많았다.

80년대의 외채 위기와 90년대의 지구화를 통과하면서 이러한 ‘물질주의적’ 비판 담론은 급속하게 자취를 감추었다. 물질적 번영과 ‘발전’을 달성할 더욱 강력한 담론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물질적 번영의 첩경은 국제적 자본 유입을 통해 전 세계적으로 팽창하는 지구적 경제에 적극적으로 뛰어드는 것이라는 ‘지구화’ 담론이 그것이었다. 그 결과 우리나라의 일부 뉴라이트 지식인들의 경우에서 보듯이 한때 비판적 발전 담론의 신봉자였던 이들이 맹목적인 지구화 담론 신봉자로 변모하는 일들도 도처에서 벌어졌고 이는 충분히 논리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90년대 말이 되면 일부 ‘무모한’ 좌파들과 불평분자들을 제외하면 지구화를 통한 전 세계의 번영과 발전은 인류 역사의 필연이라는 거대한 합의가 나타나게 된다.

물론 이러한 합의는 그다지 오래가지도 못했고 그렇게 설득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먼저 지구화가 약속한 전 지구적인 번영과 고른 발전은 나타나지 않았다. 우선 국가 간 사회 집단 간의 불평등은 계속되었고 전체적인 경제 성장의 실적도 실망스러운 수준이었다. 그 대신 과도한 시장적 관계의 침투와 자본의 지배가 빚어낸 사회의 파괴는 지구촌 곳곳을 갉아먹는 질병으로 만연하면서 끝없는 불안정성의 원천이 되었다. 나아가 자연 자원의 지나친 착취와 무질서한 남용은 전면적인 생태 위기를 현실의 문제로 가져오게 되었다. 2008년의 세계 금융 위기까지 겪으면서 그토록 믿었던 지구적 자본 시장의 자기 조정 능력까지 허구로 드러난 지금 지구화가 약속했던 전 지구적인 ‘발전’이라는 신화는 지금 근본적인 불신과 도전에 처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지구화 담론과 거기에 실린 ‘발전’의 신화를 비판할 수 있는 관점은 새롭게 마련되어야 하는 채로 남아 있다. 예전과 같은 ‘물질주의적’인 관점의 비판 담론으로는 또 다른 ‘발전’의 신화를 만들어낼 뿐이며, 이는 방법과 형태만 다를 뿐 지금도 넘쳐나고 있는 각종 사회적 불평등과 불안정성 그리고 인간과 사회와 자연의 파괴를 계속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발전’의 개념 자체를 다시 생각할 수 있는 보다 근본적인 관점을 필요로 한다.

필립 맥마이클의 <거대한 역설>은 이러한 지구화 담론의 ‘발전’ 신화에 대한 비판의 관점을 풍부하게 제시하는 보기 드문 교과서이다. 맥마이클은 코넬 대학교의 ‘발전 사회학과’ 교수로서 이론적으로도 또 농업사회학 분야에서도 정평있는 연구자로서 자리를 굳혀온 이다. 이 책은 96년에 처음으로 출간하여 이후 다섯 번이나 판을 갈아 2012년에 새롭게 출간된 판본의 번역으로서, 지구화의 신화가 극점에 도달하였다가 초라하게 시들어갔던 기간 동안 학자로서 또 참여 지식인으로서 16년간 저자가 몸소 관찰하고 성찰한 바가 성실하게 적혀 있다.

이 저서 전체를 통틀어서 관철되고 있는 시각의 틀은 칼 폴라니가 그의 저서 <거대한 전환>에서 개진한 바 있던 ‘이중적 운동’의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좁은 의미의 경제적 착취나 수탈이라는 관점 대신 보다 폭넓게 인간 사회와 자연에 대한 파괴라는 관점에서 시장 자본주의의 모순과 한계를 비판했던 폴라니의 사회학적 시각이 지난 몇 십년간 진행되어 온 지구화의 ‘발전’ 프로젝트를 분석하는 틀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즉 발전 프로젝트는 그 기원으로부터 시장적 상품 관계와 자본의 합리성을 앞세운 이들이 비서구 지역의 인간과 자연을 자신들의 이익에 맞게 마음껏 동원하고 (재)배치하기 위한 지배의 계획이었다는 점을 풍부한 근거와 사례를 들어 체계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요컨대, ‘발전’이란 애초부터 Entwicklung이 아니라 철저하게 자본과 시장을 위한 상품화 즉 improvement였다는 이야기가 되는 셈이다. 따라서 이 책에 그려진 지구화 시대의 ‘발전’은 그 초점이 착취나 물질적 빈곤보다는 인간과 자연에 대한 총체적인 지배에 맞추어져 있으며, 그 결과 벌어지는 사회와 자연의 파괴에 맞추어져 있다. 그리고 이렇게 파괴당한 인간과 자연은 순순히 희생당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안정성과 존엄성을 회복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자본과 시장의 지배에 반격을 가하는 능동적인 존재로 그려진다. 그리고 이러한 ‘이중적 운동’에 본격적으로 휘말리게 되면서 지구화 프로젝트 자체의 미래 또한 전혀 보장할 수 없는 취약한 것이 된다. 이런 식의 지구화와 ‘발전’이 얼마나 더 계속될 수 있을지 아무도 확신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발전’ 자체를 포기해야 할까. 맥마이클의 책이 제시하는 길은 다르다. ‘인간과 자연에 잠재되어 있는 가능성을 한껏 펼쳐낸다’는 본래 의미로 ‘발전’을 재규정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물질주의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는 GDP 성장률이나 도시화 등을 준거로 삼는 ‘발전’의 개념은 낡은 것이 되어 버렸다. 이제 ‘발전’이란 자연의 엄청난 보복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자명한 방식으로 산업 조직을 팽창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있어야 할 자리에서 흘러가야 할 자신의 과정을 밟아나가도록 하면서 그 조화 속에서 인간의 욕망을 실현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진정한 ‘발전’의 대상은 물질적 부가 아니라 인간 자신의 역량이 되어야 한다. 스스로의 교양과 역량의 발전은 전혀 이루지 못한 채 물질적 부만 잔뜩 쌓아놓은 졸부와 비록 가진 것 많지 않아도 예술을 감상하고 인생을 향유할 줄 아는 사람 중 누가 진정으로 부유한 자인가. 전자라고 대답하는 관점은 이제 낡은 것이 되었다.

더 많은 이들이 누구나 고르게 삶의 역량을 발전시킬 수 있도록 사회를 복원하는 것이야말로 21세기의 진정한 ‘발전’이 될 것이다. 이 책의 중요한 미덕이 바로 여기에 있다. 폭력적인 자본의 지구화를 비판하는 책은 넘쳐나도록 흔하다. 하지만 명확한 관점에서 중요한 사실들을 우선적으로 체계적으로 제시하는 책도 드물지만, 어떠한 방향으로 우리의 집단적인 노력을 모아 나가야 하는지를 또렷이 제시하는 책은 더욱 드물다. 지구화 이후의 세계가 어디로 가는지 또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알기 원하는 이들은 그래서 반드시 곁에 두고 틈틈이 물어보아야 할 책이다.

한 가지 꼭 덧붙여 두어야 할 말은 역자인 조효제 교수에 대한 감사이다. 한국의 지성계는 언젠가부터 번역을 쓸데없는 짓으로 치부하는 어처구니없는 스노비즘에 지배당하게 되었으며 학계에서는 학술지 논문만큼도 업적으로 평가하지 않게 되었다. 조 교수는 이러한 적대적 환경에서도 그 동안 학술적 가치가 높지만 별로 빛이 날 것 같지 않은 중요한 책들을 소리없이 꾸준히 번역하는 소중한 역할을 해왔다. 금전적 보상은커녕 박수도 일지 않으며 골만 잔뜩 빠지고 핀잔이나 받기 일쑤인 일이 번역인지라 말하기 참 염치없다. 하지만 지금까지 해 온 역할을 앞으로도 해주십사 하는 부탁을 드리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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