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 마니아들, 그들의 손목 위에서 빛나는 건 ‘취향과 안목’

류형열 기자

수백, 수천만원 혹은 억대 새 시계 위해 적금도 불사

남자들의 기계에 대한 로망, 보석과 기계가 합쳐진 시계가 채워줘

경기 안산에서 자영업을 하는 ID ‘Mr.시나브로’(23)는 아무리 바쁘더라도 하루에 한두 시간씩 국내외 시계 포럼을 둘러보는 게 습관처럼 돼 있다. 눈에 띄는 새로운 브랜드가 있으면 추가 정보를 찾아보고, 인터넷 장터에 관심을 가질 만한 매물이 나와 있는지도 빼놓지 않고 체크한다.

시나브로는 “틈날 때마다 둘러보고, 가끔 좋은 매물을 지인에게 추천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는 시계 마니아다. 그림이나 포도주를 즐긴다고 하면 고상한 취미를 갖고 있다며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산을 타는 사람에겐 경외심을 갖게 되고, 사진을 취미로 하는 사람에게선 뭔가 예술가의 향기를 느낀다. 그런데 “취미가 시계”라고 하면 차원이 달라진다. 사람들은 약간의 당혹과 혼란스러움을 느끼게 된다. ‘시계는 시간만 보면 되지 푹 빠질 거까지 있나’ 또는 ‘시계 수집가란 얘기인가’라고 고개를 갸웃하기 마련이다.

시계를 취미로 즐기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가운데 서울 압구정 갤러리아백화점 명품관을 찾은 한 고객이 파텍 필립 시계를 차보고 있다. |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시계를 취미로 즐기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가운데 서울 압구정 갤러리아백화점 명품관을 찾은 한 고객이 파텍 필립 시계를 차보고 있다. |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 시간이 아닌 시계를 보다

시계에도 마니아들이 있다. 가지고 싶은 시계를 꿈꾸고, 거의 매일 시계 사이트를 검색하고, 다른 사람의 시계를 구경하고, 무브먼트나 브랜드의 역사를 공부하고, 손목 위를 한번 쳐다보며 행복해하고, 시간을 보는 것보다 시계를 보는 횟수가 더 많아지고, 시계를 사기 위해 적금을 들고, 입양(시계 구매)과 방출을 거듭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면 시계 마니아일 가능성이 크다.

시나브로처럼 ‘국내 최대 시계 동호회’의 회원으로 활동하는 ID ‘코르바’는 “실용성이나 타인에 대한 과시가 아닌 자기만족을 위해 시계를 구매하고, 시계에 대해 공부하는 그런 사람들”이라고 마니아를 정의했다. 이군방씨(가명)의 마니아 기준은 좀 더 구체적이다. 이씨는 “ETA 계열의 범용 무브먼트뿐만 아니라 자사 무브먼트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다면 마니아로 부를 수 있다”고 말했다. 무브먼트는 기계식 시계를 돌아가게 하는 부품들의 집합체로 자동차의 엔진, 사람의 심장에 해당하는 시계의 핵심 장치다. 기계식 시계의 미학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시계의 정체성 그 자체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시계 마니아들, 그들의 손목 위에서 빛나는 건 ‘취향과 안목’

시계 마니아들에게 시계는 단순히 시간을 보는 장치가 아니다. 이씨는 “여자가 보석에 끌린다면 남자는 기계에 대한 로망이 있다. 보석과 기계, 두 가지가 합쳐진 것이 시계”라고 말했다. 시계는 정교한 기계장치인 동시에 예술적인 아름다움까지 갖추고 있다. 남자들이 즐길 수 있는 액세서리이자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하나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 “남자는 시계”라는 말이 나오는 배경이다.

시나브로는 “독립제작자인 필립 듀포가 표현한 ‘시계는 소우주와도 같다’는 말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수백개에 이르는 부품들이 하나의 질서 속에 조화롭게 돌아갈 때 시계는 작동한다. 직경 5㎝도 안되는 작은 장치에 수많은 구경거리가 숨어 있다. 시나브로는 “시계는 아는 만큼 보인다”고 말한다.

역시 ‘국내 최대 시계 동호회’의 회원인 김아름씨(가명)는 “작동원리나 기계식 메커니즘과 관련된 공학적 측면뿐 아니라, 다이얼과 피니싱(마감처리)이 주는 아름다움에 관한 미적 측면, 시계 자체의 역사뿐 아니라 각 브랜드마다의 전통과 역사에 관한 역사적 측면까지,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새로운 즐거움들이 톡톡 튀어나오는 ‘유희의 보물창고’ 같은 것이 바로 기계식 시계”라고 말했다.

시계를 말썽을 잔뜩 부려도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아기 고양이에 비유하기도 한다. 태엽을 감아주거나 착용을 해야만 움직이고, 충격과 자기, 물에 조심해야 하는 등 신경써야 하는 것이 많지만 그만큼 애정을 더 쏟게 되는 존재라는 얘기다.

김씨는 “손목의 움직임으로 로터(rotor·회전자)를 돌리거나, 직접 용두를 돌려 태엽을 감아줌으로써 시계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 또한 조그만 생명을 돌보는 듯한 즐거움을 주기도 한다”고 말했다.

바쉐론 콘스탄틴필라소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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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계가 좋은 이유? 수백, 수천가지도 댈 수 있다

어떤 이에겐 조그만 손목 위 세상이 제제의 ‘라임 오렌지 나무’와 같은 안식처 역할을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에겐 오랫동안 함께할 수 있는 친구이자 분신이 되기도 한다. 동호회의 한 회원은 “시계가 ‘자자자자자’ 하면서 가는 소리를 들을 때 시계와 내가 살아있다는 느낌이 온다. 그 순간만큼은 누구한테도 뺏기기 싫은 행복”이라고 말했다.

시계 마니아들이 시계를 좋아하는 이유는 수백, 수천가지도 넘기 때문에 일일이 설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로터 돌아갈 때 느껴지는 진동에 반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시스루백에서 보이는 자그마한 부품들의 반복적인 움직임에 매혹되는 사람도 있다. 아 랑게 운트 죄네의 칼리버 L951.6이나 파텍 필립의 칼리버 240 같은 무브먼트의 아름다움과 완성도를 좇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흰 판에 깔끔한 다이얼이나 디자인에, 묵직하고 존재감 넘치는 다이버 시계에 꽂히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희소성 있는 모델을 좋아하고, 어떤 이는 어둠 속에서 빛나는 야광이나 극심한 온도변화와 자기장, 수압에서도 정확한 시간을 보여주는 견고함에, 달의 움직임을 보여주는 문페이즈의 아름다움이나 고장이 없는 한 한결같은 정직함에 매료되기도 한다.

코르바는 “작은 공간 내에 톱니바퀴와 태엽만으로 필요한 기능을 다 구현하면서 정확한 시간을 맞추는 게 매력”이라며 “직접 태엽을 감고 템포 바퀴가 뛰는 소리를 들으며 시계와의 교감을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ID ‘Rhymemaker’는 “장인들이 수제작한 무브먼트를 보면 정말 시간을 보는 도구를 뛰어넘은 하나의 작품이라고 느껴진다”고 말했다.

매력 요소가 워낙 다양한 탓에 시계 마니아들 사이엔 피할 수 없는 병이 하나 있다. 바로 ‘지름신’이다. 어떤 시계에 꽂혀서 사고 싶어 안달하는 증상이다. 지름신은 한 번 왔다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게 특징이다.

시나브로는 “지름신이 얼마나 자주 찾아오느냐고? 매일 매시 매분 온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이 차고 있는 시계를 볼 때나, 시계 매장을 둘러볼 때, 국내외 포럼에서 예쁘게 찍힌 시계를 볼 때 사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만 실행에 옮기는 경우는 적고, 보통 실물로 질릴 때까지 보면 해소되는 편입니다. 현실을 직시해야죠.”

롤렉스 서브마리너(왼쪽)·그랜드 세이코

롤렉스 서브마리너(왼쪽)·그랜드 세이코

시나브로가 가장 꽂혔던 시계는 필립 듀포가 만든 ‘심플리시티’다. “모든 공정을 손으로 만든 시계였어요. 가장 간결한 디자인인데도 가장 화려한 느낌이 들더군요. 궁극의 시계라고 할까요.” 300개 한정판으로 나온 심플리시티는 세계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에게만 판매됐고, 중고 매물로 나오는 것도 거의 없는 초희귀 아이템으로 시나브로에겐 영원한 드림워치로 남아 있다. 코르바는 “중고급 이상의 브랜드에서 만든 미닛 리피터가 내 꿈”이라면서 “아름다운 종소리로 시간을 알려주는 매력적인 녀석인데 너무 비싸서… 과연 죽기 전에 손목에 얹을 날이 올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씨는 “지름신이 오면 몸살을 앓는다”고 말했다. “어떤 시계에 꽂혀도 새것은 비싸서 못 사요. 그럼 중고로 나오기만을 기다리며 잠복하는데 그 기간이 정말 고통스러워요. 시계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거든요.”

김씨는 “처음 기계식 시계를 접할 때는 수백만원씩 하는 가격에 깜짝 놀라지만, 일단 시계를 취미로 삼게 되면 나중에는 가격에 대한 기준이 달라져서 절대적인 금전 감각이 마비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지름 때문에 시계 마니아들에 대해 호사스러운 취미를 즐기는 사람들이라는 인상을 갖기 쉽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시나브로는 “특별하지 않으면 새 제품 구매보다 중고거래를 선호한다. 금방 질리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라며 “중고는 훨씬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고, 다시 팔아도 크게 손해볼 일이 없다”고 말했다. “쓰고서 돌릴 수 없으면 소비지만 시계는 다시 팔 수 있잖아요. 오히려 가치가 더 오르는 모델도 있어요. 지금까지 한 300개 정도 경험했는데 전체적으로 봤을 때 손해는 없었어요.” 시나브로는 “시계를 정말 좋아한다면 하나로 만족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살면서 수백, 수천가지의 시계를 볼 텐데 목표를 이루면 또 다른 목표가 생기기 마련이잖아요. 목적이 생겨서 인생에 충실해지는 수도 있습니다. 나에겐 거기까지 다다르는 시간이 소중합니다.”

이씨도 “자기의 경제적 수준을 감안해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자제할 수 있는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면서 “충동구매만 안 하면 재정적인 부담 없이 충분히 즐길 수 있다”고 말했다.

오메가 스피드마스터 크로노그래프(왼쪽)·파텍 필립 문페이즈

오메가 스피드마스터 크로노그래프(왼쪽)·파텍 필립 문페이즈

■ 좋은 시계가 곧 비싼 시계는 아니야

시계 마니아들은 주기적으로 지름신을 겪으면서 시계를 더 자세히 알게 되고, 취향과 안목도 높아지게 된다. 통상 ‘비싼 시계=좋은 시계’일 때가 많다. 시계가 작기 때문에 작은 부분이라도 문제가 있으면 크게 느껴진다. 좋은 시계들은 그런 부분들이 깔끔하다. 하지만 좋은 시계가 비싼 시계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마니아들은 가격이 저렴하면서도 품질과 성능이 좋은, 이른바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 높은 시계를 찾아 즐기는 경향이 많다.

이씨는 “로렉스 무브먼트와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좋다라는 평가를 받는데도 가격은 절반 이상 싼 시계에 요즘 빠져 있다”고 말했다.

김씨도 “가격 거품이 적고 품질이 우수한 시계들을 찾아내는 과정 역시 시계를 즐기는 방법 중의 하나”라며 “요즘은 1~2인 규모의 공방(工房) 수준 마이크로 브랜드들에서 품질 좋고 가성비 좋은 제품들을 많이 내놓고 있어 자신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개성 있고, 품질 좋은 시계들을 즐길 수 있다”고 말했다.

시나브로는 “차 팔아서 산 시계를 서랍에 보관하거나 일상생활의 불편을 감수하면서까지 애지중지하는 사람도 봤다”고 말했다. “이건 시계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시계를 모시는 겁니다. 사람이 시계 차지 시계가 사람 차는 건 아니잖아요. ‘내가 이 정도 차면 편하게 맘놓고 다닐 수 있겠다’ 하는 게 자기 자신에게 딱 맞는 시계 같아요.”

코르바는 “자신에게 잘 어울리는 시계를 손목에 차고 있는 사람을 보면 왠지 뿌듯하다”고 말했다.

시계 마니아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시계생활을 즐긴다. 사람마다 성향이나 라이프스타일, 소득수준이 다르기 때문에 정답이 있을 수 없다. 저렴한 시계를 즐기든, 비싼 고급시계를 즐기든, 먼 길을 돌아왔든, 그렇지 않았든 시계를 즐기는 사람들은 결국 하나의 결론으로 모이게 되는 것 같다.

이씨가 말했다.

“시계도 취미잖아요. 즐기되 책임질 수 있을 만큼만 즐기는 게 최선이죠.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는 말이 있는데 시계생활도 그런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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