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모닝]남자핸드볼 코로사 총감독 정명헌

‘핸드볼계의 이단아’.

남자 핸드볼 코로사팀 정명헌총감독(43)은 늘 이렇게 불린다. 중학교 2년때부터 송진액 묻혀가며 시작했지만 부지깽이 들고 말렸던 어머니·아버지의 뜻을 꺾지못해 포기했던 핸드볼. 국가대표는 물론 스타선수가 되지도 못했지만 이제 머리 히끗히끗하고 얼굴에 주름이 생기고 나서야 가슴의 한을 풀어낸 느낌이다.

“모르겠어요. 핸드볼이 왜 그렇게 좋은지. 부모님 뜻을 따라 책벌레로 살았지만 핸드볼의 꿈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죠”. 동성중 2년때 잠시 잡았던 핸드볼 공. 던지고 받을때마다 손에 가득하던 송진액의 간지러움과 향긋했던 냄새, 그 유년의 시절을 휘감았던 감미로움. 그러나 불과 1년만에 부모님의 극성스런 반대와 팀 해체로 핸드볼과 이별해야 했다.

공부에 매달렸다. 그리고 서라벌고를 거쳐 한국외대 독일어 교육과에 입학, 캠퍼스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핸드볼과의 인연은 쉽게 떨쳐지지 않았다. 어느날 캠퍼스에서 눈앞을 스쳐 지나가던 핸드볼공. 순간 가슴깊이 묻어두었던 병이 다시 도지기 시작했다. 당시 외대 유이한 스포츠 클럽중 하나였던 핸드볼부. 어느순간 몸은 그리로 향했고 내리 4년동안 공을 날리고 또 날렸다. 그러나 이별은 또 다시 찾아왔다.

이번에도 부모님의 극성스런 반대. “핸드볼해서 뭐 먹고 살길이 있느냐”. 84년 단돈 30만원을 들고 독일행 비행기에 올랐다. 빌레벨트대학에서 어학코스를 밟으며 자동차 부품회사인 보쉬에서 주경야독의 생활을 이어갔다. 그런데 거기에도 핸드볼이 있었다. “독일친구 랄프가 핸드볼을 한다지 않는가, 어디에서 포이어바흐클럽에서”. 그때 그 희열을 그는 아직도 잊지못한다.

한국 고교수준 이었지만 공을 만질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팀에는 의사와 변호사 등 각종 전문 직업인들이 즐비했다. 운동에 대한 관념이 달랐다. “모든 것을 송두리째 던져버리는 우리의 스포츠 시스템과는 달랐죠”. 95년 박사학위를 안고 귀국한 뒤 장미육종회사 코르테스사의 한국 대리점 코로사에 입사해서도 그의 핸드볼 집착은 계속됐다. 그리고 기어이 지난해 5월 실업팀 코로사를 창단했다. 정감독의 선수선발은 까다롭기로 유명하다. 컴퓨터 특히 엑셀에 운전면허, 타자 250타 이상은 기본이다. 일과도 일주일중 3일만 오후4시부터 운동일 뿐 다른 것은 일반회사와 똑같다. ‘운동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그러다 소수정예에 뽑히지 못하면 어긋난 삶을 살아야하는 한국적 엘리트 스포츠의 한계를 극복해보고자’ 하는 실험이다. 실험은 성공적인 평을 받고 있다. 코로사는 처음으로 참가한 2001 핸드볼 큰잔치서 지난해 우승팀 충청하나은행을 꺾는 등 우승을 노리고 있다. 성적지상주의라는 척박한 한국핸드볼계에 변화의 씨앗을 뿌리는 정감독. 그가 뿌린 씨앗은 아름답고 튼튼한 장미로 자라날 것인가. 적어도 정감독은 그렇게 믿고 있다.

〈배병문기자〉

▲60년 2월 전남 완도생

▲서울 동성중-서라벌고-한국외대 독일어교육과 졸업

▲84년 독일 빌레벨트대학 유학

▲95년 독일 언어학박사 취득

▲98년 코로사 대표이사 취임

▲2000년 8월 아마추어 ‘코로사’ 창단

▲2001년 5월 실업 ‘코로사’ 창단, 감독취임

▲2001년 10월 총감독 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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